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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Oct 23. 2021

내 안의 늪

영화 아네트(2021)(스포가 될 수도 있어요)

LA의 유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관객들을 막대하는 시크한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 오페라 가수 안과의 스캔들로 아주 핫한 위치에 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네트가 태어난 이후부터 눈에 띄게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안과 비교해 유명세가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루머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 루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이 흘러, 크루즈 가족 여행에서 안이 안타깝게 죽고, 그가 안을 죽인 용의자가 되는데, 그는 정말 안을 죽인 걸까? 그렇다면, 아네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1. Kill or Save


"How did the show go?

"I killed them."

"I saved them."


공연을 잘 끝냈냐는 말에, 내가 다 죽여버렸지 라고 대답하는 헨리와 내가 다 살렸지 라고 대답하는 안. 똑같이 공연을 잘 끝냈다는 표현이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의 태도가 이 대사에서 드러난다. 헨리는 관객들이 웃으면, 관객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관객들과 대결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반대로 안은 오페라 가수로서 오페라에 몰입해 감동을 주고, 관객들을 홀리는 연기를 한다. 관객들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헨리는 더 이상 관객들이 죽어주지 않자, 약올라하고, 관객들과 싸우는 것도 불사한다. 하지만 안은 관객들을 아끼고, 이 관객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헨리는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이전처럼 관객들이 자신에게 정복당해주지 않음에 분노한다.  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는 과정이 그의 몸이 망가져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열심히 무대 전에 운동하고, 자기 관리하던 헨리 자신은 이제 없고, 아네트의 탄생 이후 육아스트레스에 찌든, 점점 배가 나오는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자기파괴적인 성향은 그의 상황을 모두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떨어지지 않는 안의 인기에 반해, 자신은 인기가 다 떨어져 집에서 육아나 하고 있다는 삐뚤어진 자존심이 그가 한 때, 너무 사랑했던 피앙세를 질투,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게 했다. 자기 파괴가 자기 연민, 피해망상으로 커져가는 과정 속에서 그가 질투, 증오, 부러움의 대상인 안와 함께 추는 광기의 왈츠는 한 여자를 이렇게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장면이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심연'이다.

그는 그녀가 그의 심연을 본 사람이고, 그 심연 속에서 끌어내어 빛의 영역으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심연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정복욕, 어두운 마음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킬러 마인드에 대해 알고서도 그를 사랑한 안은 그의 인생에 그를 구원할 구원자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 속 심연의 어두움을 구원할 사람은 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그 킬러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업보가 다 자기 자식에게 갈 것이었으므로.


2.  심연의 복제품, 아네트

영화를 잘 보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헨리의 딸로 등장하는 아네트는 puppet 인형 같은 몸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듯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네트가 '사람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네트의 사람같지 않아 보이는 것은 헨리가 아네트를 자신의 삶의 인형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네트는 헨리의 인생을 장식할 일종의 부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소유한 꼭두각시처럼 표현하기 위해 아네트의 몸은 인형처럼 표현된 것이다. 이런 헨리와 아네트의 관계성을 보고 있자면, 수많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가스라이팅을 생각나게 한다. 부모는 자신의 사랑의 결과물로서 아이를 사랑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이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부모가 외치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자식을 수단화한 부모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는 아이가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결판이 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는지는 자식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그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날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증오로 변질된다. 그 증오는 그 아이의 심연으로 치환된다. 고로 이 영화는 헨리의 심연이 대물림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I won't forgive and I won't forget.


아네트는 그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이 대사를 통해 아네트는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음을, 자신에게 대물림된 심연의 어두움을 이미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영화 후반부에 헨리가 아네트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이 메시지는 아네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네트는 그 심연을 보면,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심연의 존재를 인지한 아네트에게 이제와서 충고랍시고 하는 헨리의 대사는 적반하장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다시 풀어 해석한다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를 잊고, 너의 인생을 살렴."

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상처를 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헨리의 문제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는, 자신의 심연,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을 소유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남을 수단화했던 것이었다. 안을 사랑하는 시간 동안 잠시 위안을 얻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타는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고, 자식을 위한다는 변명 아래 자식의 유명세로 자신의 인생의 꽃을 피워보고자 했지만 그 작전도 실패한다. 남의 힘에 기대어, 자신의 업보처럼 지니고 있던 심연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업보였던 심연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이 극복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부모가 될 자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단순하게 아기가 예쁘다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아이를 낳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모라는 사람이 완벽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하고, 그 콤플렉스를 자식에게 대물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깊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부모는 한 아이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창조자이기에.


3. 총평

이 영화를 왜 뮤지컬 형식으로 만든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순간까지도 왜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이고, 뭐 때문에 이 영화는 난해한 걸까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전체적인 시나리오의 분위기는 아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인데, 계속 정신없이 몰아치듯이 영화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대사도 뮤지컬처럼 노래하듯이 진행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영화의 형식 사이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 같다. 우울하고, 어두운 씬인데, 인물은 계속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낯선 경험인가!

결국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된 이유는 이 잔혹동화를 더 잔혹해 보이도록, 관객들이 그 잔혹함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질감 때문인지 그 정신없는 영화를 곱씹는 와중에도 모든 장면들이 하나하나 감정적으로 잘 각인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 중이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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