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는 걸려 넘어져도 흙과 풀이 안아준다는 어느 시의 구절이 있다. 홍콩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서는, 한국에서 명절을 지낸 지가 언제였는지 아득하다. 고향이라는 장소적 의미가 그립기보다는 마음 편히 늘어질 수 있는 존재들이 그리운 듯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도시를 떠나 산이나 바다를 찾아 떠나면 고향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비 온 뒤 풀내음이나 진한 흙냄새, 상쾌한 공기를 가슴 깊은 데까지 집어넣고 나면 비어있던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가족은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때 되면 고향처럼 찾는 곳이 있다. 홍콩의 유명 배우 주윤발의 고향이기도 한 '라마섬'이다.
배에서 내려 해변이 나오는 데까지는 꽤 걸어야 한다. 언제 도착하냐며 아이들이 투덜대기 시작한다. '거의 다 왔어.’ 나도 모르게 어릴 때 늘 부모님에게 듣던 말을 하고 있다. 바닷가에 도착하기 전 지나치는 여러 집들 가운데 한 곳이 부모님의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문 앞에 나와 우리를 보곤 멀리서부터 손 흔들며 뛰어오실 모습을 상상해 본다. 두 팔 벌려 안아주는 부모님 대신, 넓은 품과 같은 바다를 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뙤약볕이라도 바닷물에 들어가면 시원해서인지 온도에 대한 감각도, 시간에 대한 감각도 잊어버리게 된다. 조금씩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며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저녁을 먹고 선착장으로 간다.
배에 올라탈 때만 해도 노을빛으로 잔뜩 물들어있던 하늘과 반짝이던 바닷물이 순식간에 어둑해진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서러운 마음이 든다. 인생 역시 찰나 같다 싶다.
외로운 타지 생활에도 고향과 같은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사회적인 옷을 입지 않아도 되고, 나를 내비치는 일이 두렵지 않고, 고향의 내음을 들이켠 것처럼 숨이 가지런해지는 그런 만남들 말이다. 나 역시 고향을 잃은 것 같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뿌리 뽑힌 채 살아가며 어디 마음 둘 곳 없어 메말라 가는 삶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환대받을 만한 삶임을 알려주고 싶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내 마음의 그늘로 남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삶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