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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Feb 25. 2020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독립운동가의 체육사랑, 체육인의 독립운동. 몽양 여운형




1935년 전경성축구단이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다. 전경성축구단 우승으로 김용식은 일본 대표팀에 합류,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활약했다. 국제무대를 경험하며 축구에 눈을 뜬 김용식은 평생을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전경성축구단은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가 꾸린 팀이었다. 당시 축구협회장은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이 맡고 있었다. 전경성축구단 구단주 여운형, 2대 대한축구협회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대 대한축구협회장 목록,  여운형은 제2대 협회장을 역임했다. 신익희, 윤보선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이름들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 체육 대부, 몽양 여운형


1948 런던 올림픽은 대한민국 첫 번째 하계 올림픽이다. 한국은 1947년 6월 20일, 스웨덴 스톡홀름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통해 IOC에 가입한다. 정부를 공식 수립하기도 전에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가 출범 전 IOC에 가입한 건 한국이 최초였다. 런던 올림픽은 1948년 7월 29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열렸다.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됐다. 


이 바탕에 체육을 강조했던 몽양 여운형이 있다. 몽양 여운형은 당시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축구는 이 같은 배경 위에서 올림픽 무대를 경험할 수 있었고, 국제무대 첫 승리(멕시코 5-3)도 거둘 수 있었다.




몽양은 독립운동가이자 체육인이었다. 한국 체육사에서 몽양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다. 몽양은 1912년 황성 와이엠시에이(YMCA) 운동부 주장으로, 국내 첫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와세다 대학과 친선경기를 가진다. 상하이에 체류하던 1926년에도 상하이 야구팀 코치, 상하이한인체육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푸단대 명예교수로 있을 때는 대학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순방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중국 상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조선으로 압송된다. 상하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중이었다.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몽양을 찾았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야 하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몽양은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있지만 등에는 조국을 짊어지고 있다"며 출전을 권했고, 손기정은 금메달을 목에 건다.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몽양은 손기정 금메달 소식을 국내에 전하며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다. 


1933년 9월 현대철봉운동법이 발간됐다. 한국 역도 선구자, 문곡 서상천이 엮은 책이다. 몽양은 이 책에서 상의를 벗고 모델로 나선다. 국내 철봉운동 보급에 앞장섰던 몽양이었다. 


축구, 야구, 역도, 마라톤 등. 한국 체육 전반에서 몽양 여운형을 만날 수 있다.


상의를 벗고 현대철봉운동법 모델로 활약(?)한 몽양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자 체육인이었다.




체육인으로,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몽양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19세 청년 한지근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이 날은 대한민국 IOC 가입을 축하하는 한국-영국 축구경기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몽양은 축구 경기 참관 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몽양 여운형 데스마스크(Death Mask), 암살 당시 입고 있던 옷에는 혈흔이 뚜렷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첫 인민장(국민장)으로 치러진 몽양 여운형 장례식. 마라토너 손기정, 역도인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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