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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Feb 25. 2020

안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지역감정 심해지니까. <프로팀이 전국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

스포츠 공화국, 프로축구리그를 탄생시키다.


5 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우민화 정책 일환으로 스포츠를 적극 활용했다. 1982년 프로야구리그가 출범했고 1983년 프로축구리그가 뒤를 이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유치도 이 흐름 위에 있었다. 5 공화국은 스포츠 공화국이었다. 한국 프로축구는 1983년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슈퍼리그는 아시아 최초 프로축구리그였다. '아시아 최초', 우리는 이 명예로운 타이틀을 전두환 정부에 빚지고 있다. 프로축구 초기 '지역 정체성'은 없었다. 지역 정체성 부재는 정치적 지역주의가 채우고 있었다.




지역 정체성을 뒤덮은 정치적 지역주의, 연고지를 '배정'하다.


한국 프로축구 초창기는 정치적 지역주의가 지배하는 무대였다. 한 해 먼저 출범한 프로야구는 처음부터 지역 연고에 기반해 운영됐다. 프로축구는 아니었다. 프로축구 초창기는 전국을 떠돌며 경기를 치르는 유랑극단이었다. 정부가 연고지 배정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지역감정이 심화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유럽 축구클럽, 축구리그 역사는 아래에서 시작했다. 종교, 학교, 노동조합 등 지역 공동체가 축구팀을 만든다.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지역에 자리 잡아 오늘까지 이어진다. 아스날 FC는 지역 무기공장 노동자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해운회사 노동조합이 만들었다. 사례를 있는 대로 들자면, 유럽축구 역사 전부 뿐만 아니라 유럽사회사를 훑어봐야 할 정도다.  


한국은 유럽과 달랐다. 유럽처럼 아래에서 시작할 지역 정체성과 지역공동체가 탄탄하지 못했다. 연고지 '배정'이라는 표현이 가능한 이유다. 한국은 중앙에서 연고지를 ‘배정’ 받은 팀들이 지역에서 축구를 했다. 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이다.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팀은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왔다.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축구단은 1980년 창단했다. 당시 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이 만든 ‘할렐루야’다.

           


프로팀이 두 개인 프로리그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은 1979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프로축구리그 창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축구계는 ‘야구에 밀린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980년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축구팀 할렐루야가 창단됐다. 1983년 프로리그 출범보다 3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리그 없이 창단된 프로팀, 당연히 할렐루야는 지역 연고가 없었다. 주님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1983년 슈퍼리그 출범 전까지, 할렐루야는 지역이 아닌 주님의 품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프로리그 원년, 할렐루야는 강원, 충남, 충북이라는 광활한 지역을 연고지로 배정받았다. 

대한민국 첫 번째 프로축구팀 할렐루야 축구단(Hallelujah FC), 팀 엠블럼 독수리는 전국을 순회했던 당시 프로리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83년 5월 8일 마침내 대한민국에 ‘프로리그’가 탄생했다. 할렐루야와 또 다른 프로팀 유공이 개막전에서 맞붙었다. 당시 개막전은 한국에서 '프로'경기가 가능한 유일한 조합이었다. 슈퍼리그 원년에 참가한 프로팀이 할렐루야와 유공 밖에 없었다. 프로리그에 프로팀이 두 개밖에 없었다! 원년은 실업팀 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이 참가해 5개 팀이 리그를 꾸렸다. 어쨌든, 5월 8일 개막전은 ‘프로’ 축구팀끼리 맞붙은, 대한민국 프로축구 출발이었다.

      

할렐루야가 배정받은 광활한 연고지 '강원, 충남, 충북'은 그냥 상징이었다. 또 다른 프로팀 유공은 '서울, 경기, 인천'을 연고지로 배정받았다... 슈퍼리그는 전국 9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됐다.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축구 붐을 조성하고, 1984년에는 더 많은 구단들 참가를 유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각 팀에 배정한 연고지는 가볍게 무시됐다. 프로가 두 팀인 프로리그, 지역에 애착을 쏟고 싶어도 전국을 떠돌아야 했던 프로리그,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내 지역 축구팀, 1983년 프로리그 자화상이었다. 이 와중에 할렐루야는 첫 번째 프로팀이라는 자부심을 지켰다. 할렐루야가 리그 원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축구단 경기 장면




전국을 떠다니던 민들레 씨앗, 그 이름은 프로축구단


2010년 월드컵 대표팀을 이끌고 원정 16강을 이끈, 허정무 전 감독은 초창기 지역 연고 부재를 프로리그 문제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우선 태생부터 비정상적이었다. 프로스포츠는 지역 연고가 확실해야 한다. 그래야 응원할 팀이 생기게 된다. 프로스포츠는 국가대표팀 경기하고 틀리다. 프로축구는 태생부터 유랑극단처럼 연고지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녀 초기 정착에 실패했다. 나중에 급히 연고지 정착을 했지만 아까운 시간이 흘렀다. 초기에는 연고지보다 기업의 이미지가 강해 지역주민의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프로축구 초기는 디딜 땅 없이 허공을 떠다니는 민들레 씨앗이었다. 배정받은 연고지도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할렐루야는 1983년 강원, 충남, 충북으로 시작해 1984년 강원, 1985년에는 전남과 전북을 연고지로 삼았다. 떠돌다 지친 할렐루야는 1985년 리그가 끝난 뒤 선언한다. "아마추어로 남아 할렐루야 축구단 본연의 목적인 선교 활동에 중점을 두겠다" 1985년을 끝으로, 한국 1호 프로팀이자 프로리그 원년 우승팀 할렐루야가 리그를 떠나 버렸다. 해서 K리그 원년 트로피는 지역 클럽이 아니라 주님의 품에 있다. 부디 K리그를 보살피소서... 아-멘.


할렐루야가 떠났지만, 이미 대우, 현대, 럭키금성이 프로리그에 참가하고 있었다. ‘프로리그’에 걸맞은 규모는 유지할 수 있었다. 1986년에는 실업팀으로 리그에 참가하던 포항제철이 프로팀으로 전환한다. 5개 프로팀(유공, 대우, 현우, 럭키금성, 포항제철)과 실업팀 한일은행이 참가해 리그를 꾸렸다. 1986년, 축구계는 전국 순회 대신 지역연고제 기반 홈&어웨이 도입을 추진했다. 이때도 전두환 정부는 반대했다. ‘지역감정을 유발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정부를 설득하지 못한 프로리그는 한 해 더 둥둥 떠다녔다. 한국 프로축구 초기는 빈약한 지역 정체성을 정치적 지역주의가 어떻게 메우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홈&어웨이 리그 방식은 다음 해인 1987년에야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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