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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Feb 27. 2020

기억해줘요 내 모든 날과 그때를

별이 지던 날, 거기에 있었던 나

2019년 2월 12일,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키퍼 고든 뱅크스(Gordon Banks)가 사망했다. Banks. 은행처럼 안전하게 골문을 지킨다고, “잉글랜드의 은행”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선수였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 당시 골문을 지켰다.


팬은 아니고, 그가 사망한 날 에어비앤비로 런던 한 가정집에 묵고 있었다. 덕분에 사망 소식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방송에서는 고든 뱅크스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선수 시절 인상적인 플레이들을 계속 보여줬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 펠레 헤딩을 막았다. 이 선방은 뱅크스 선수 시절 전체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펠레가 당시를 회상하며 했던 인터뷰도 다시 방송을 탔다. 아,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에서 축구원로 죽음은 이 정도구나. 축구 뉴스가 아니라 영국 사회 뉴스였다.


선수 시절은 못 봤지만, 운 좋게도 시대를 수놓은 한 선수의 끝은 볼 수 있었다. 이 날 축구영웅 마지막을 보며 느낀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영예(榮譽)'


영광(榮光)스러운 명예(名譽)


잉글랜드는 영예롭게 한 선수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에어비앤비로 가정집에 묵은 덕에 축구영웅 마지막을 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웸블리가 아니어도 축구를 느끼기 충분했다.


다음날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토트넘과 독일 도르트문트, 챔피언스리그 16강 경기가 있었다. 런던 도심을 구경한 후 저녁에 웸블리 스타디움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런던 도심을 되는대로 구경하다가 트라팔가 광장을 찾았다. 


한 예술가가 바닥에 각국 국기들을 그리고 있었다. 국기 순서를 보니 태극기를 가장 먼저 그렸다. 태극기 위에는 동전이 꽤 놓여 있었다. 여행 중인 한국인들이 하나씩 두고 간 게 아니었을까. 다른 국기 위 동전과 비교해보니, 태극기를 가장 먼저 그릴만 했다. 일부 한국인들도 헷갈리는 건곤감리를 런던 거리 위 예술가는 정확히 그려냈다. 이건 자본의 힘이다.


도르트문트 엠블럼도 국기들 사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국기가 국가를 상징하듯, 엠블럼은 지역을 상징한다. 도르트문트 엠블럼 위에도 동전이 꽤 쌓여 있었다. 도르트문트 머플러를 한 독일 시민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 경기가 있긴 하구나. 축구, 챔피언스리그는 경기장 안에만 있지 않았다. 축구장 밖에도 축구가 있었다. 이 날 런던 도심 곳곳에 축구가 스며 있었다. 


1년 전, 2년 전, 5년 전, 10년 전 전 트라팔가 광장에도 이렇게 축구가 있지 않았을까? 10년 전에도 한 예술가는 경기가 있는 날 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그때도 자기 팀을 응원하러 온 시민들이 이 곳에 있었을 테다. 나는 겹겹이 쌓인 시간 중 한 순간 거기 있었던 거고. 트라팔가에서 그림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든 뱅크스 덕인가?


국기를 그리고 있는 트라팔가 광장 거리 예술가, 1행 1열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동전갯수를 보니, 그럴만했다.
독일 클럽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엠블럼도 그려놓았다. 도르트문트는 이 날 런던 클럽팀 토트넘과 경기를 가졌다. 
텀블러가 아니라 캔맥주를 가지고 거리를 배회하는, 독일 시민의 전형을 보여준 도르트문트 팬들.



한 순간 거기에 있었던 이유로, 잉글랜드 축구영웅의 영예로움을 목도한 이유로, 한국사회에 질문하게 된다.


한국 축구 당대의 스타플레이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축구를 만날 수 있는 한국의 트라팔가 광장은 어디일까? 

어디에 가면 축구장 밖에서도 축구를 만날 수 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영국이라서, 유럽이라서 가능한 풍경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다.

그러면 한국사회에 축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고든 뱅크스는 피파 선정 20세기 최고 선수 100인, 피파 선정 올해의 골키퍼 6년 연속 선정(1966~1971) 등 잉글랜드 축구, 세계 축구계를 수놓은 선수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출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든 뱅크스(2007년). 1937년 태어난 그는 2019년 2월, 81세로 생을 마감했다.
1970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발행된 고든 뱅크스 트레이딩 카드.
1970 피파 월드컵 브라질전 선방 장면을 그린 그림. 고든 뱅크스를 상징하는 선방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E9RCAdWaE

고든 뱅크스 선수생활을 상징하는 선방. 48초부터 확인할 수 있다.
고든 뱅크스는 레스터 시티와 스토크시티에서 활약했다. 셰필드 출생인 그는 셰필드 지역 레전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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