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갓 개봉한 노르웨이 전쟁영화 보기
69° 38' 57.1488'' N18° 57' 19.1664'' E.
북위 70도의 트롬쇠는 가장 북쪽에 자리한 도시 중 하나다. 매서운 추위와 고독함을 필요로 했던 당시의 나는 장기근속휴가를 핑계 삼아 최북단 도시 중 연고가 없는 곳으로 향하였고, 그렇게 오로라와 트롤의 도시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진 건 약간의 크로네 화폐와 피엘라벤 방한모자, 눈밭을 걸을 수 있는 패딩부츠였는데 그 정도면 새로운 겨울을 충분히 대비한 셈이었다. 서울은 한창 가을이라 가벼운 카디건 하나면 종일 산책을 할 수 있는 날씨였고 왜인지 나에게는 모자란 온도였다. 어차피 12월이 넘어가면 서울도 시베리아 같은 추위를 자랑할 텐데 굳이 그 시절에 나는 더 춥고 고립된 환경을 찾았다. 외로울 것 같으면 더한 외로움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 행위였다. 신기하게 그러면 외로움은 사라지고 오롯한 나로서 타인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겼다. 정제된 고독은 외롭지 않다. 잃어버려도 좋다는 마음으로 들고 간 검은 유광 패딩을 걸치고 트롬쇠 시내의 돌길을 걷다 시내에서 거의 유일해 보이는 큰 영화관에 발을 들였다. 기껏 낯선 도시에 가서 알아듣지 못할 영화를 보고 싶었다. 어쩌면 직업에서 비롯한 병일지도 모르지만 가리지 않고 콘텐츠를 향유하는 버릇에 가깝다고 느낀다. 한국에서는 탑건 시리즈의 신작이 한참 휩쓸고 간 후였는데 그곳은 9월 말에 탑건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포스터 서너 장과 함께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키오스크가 두어 대 서 있었고, 말없는 안내원과 매점 외에는 한산하였다. 영화를 고르던 중에 Krigsseileren이라는 낯선 영화의 설치물이 눈에 띄었다.
개봉일 9월 23일이면 불과 며칠 전 개봉한 영화였다. 영화 수입 과정을 생각하면 한동안, 혹은 영영 서울에서 볼 수 없을 작품임이 자명하여 호기심을 채우기로 하고 표를 구매하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티켓 머신은 영어를 지원하지 않았고 내 노르웨이어 실력은 고작 한 달 차였다. 그것도 여기 오려고 틈틈이 들여다본 수준. 좌석이 26G 같은 직관적인 단어가 아닌 무슨 줄, 무슨 열 같은 어감의 단어였기에 눈치껏 골라 결제한 좌석이 어디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표에 쓰여 있는 문구를 연구하다 실패하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좌석에 숫자가 쓰여 있지 않았다. 도대체 내 자리는 어디인가. 고민하다 영화관 매점에서 사 온 멘토스를 베어 물었는데 아뿔싸, 감초맛이었다. 외국인이 김치를 처음 본 것처럼 나에겐 은단껌 비슷한 그저 낯선 맛이었다. 이후로도 감초맛의 공격은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다. 입안에 맴도는 감초를 뒤로 하고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아무도 안 앉아있는 맨 뒷자리로 향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노부부 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너무나 노르웨이 현지 스타일의 영화에 혼자 온 아시아인 여성이 희한하게 보일 법도 하였다.
아직 멀티플렉스를 운영하지 않는 국가라고 들었으나 영화관은 깨끗하고 넓었다. 크루아상 형의 붉은 좌석이 오페라 홀을 연상케 하였다. 막간 광고시간을 이용하여 영화 제목을 검색하였는데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노르웨이 전쟁영화였다. 따뜻한 아마색 털재킷을 입은 노부부가 한번 더 나를 쳐다보았다. 나라도 유럽 사람이 여수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보러 혼자 와서 앉아있으면 기이할 것이다.
영화는 노르웨이어 음성과 자막으로 재생되었다. 자국어 자막을 넣는 건 주로 쓰이는 노르웨이어가 단일 종류가 아니며 방언이 많은 이유로 보이는데, 자막 자체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보크말(bokmål)이었다. 노르웨이어는 보크말 외 뉘노르스크(nynorsk), 그리고 그 내외로 나뉘어 다양하고 분쟁적인 언어 환경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경험은 그때였다. 한 달 배운 노르웨이어가 들으면서 70% 선에서 자막이 읽히고 들리는 것이었다. 평소 과하게 책을 보는 탓인 것이라 생각하고 듣다 보니 끊어 들리는 수준에서 점점 편안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전쟁(Krig)과 선원(Seileren)을 결합한 단어였는데, 전쟁이 끝난 1948년의 싱가포르에서 시작하여 노르웨이가 나치에 점령당하기 직전인 1939년으로 장면이 전환되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전쟁을 보여준다기보다 그 안에서의 사람에 대한 영화였다. 주인공 알프레드가 친구 시그뵨과 배를 탔으나 전쟁에 휘말리며 표류하듯이 떠돌며 동료를 잃고, 바다에도 빠지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갖가지 고난을 겪는다. 인생이 그런 것이라 말하듯 속절없이 목숨줄을 시험하면서도 끝없이 귀향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선원은 한편으로는 그 시절의 우리나라와도 묘하게 닮은 정서색이 엿보였다. 소설을 쓴 한 노르웨이 역사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가진 것을 잃었음에도 삶에 성실하려는 눈빛이 비슷하였다. Hjelp(도와줘요)를 외치는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손으로 노를 젓는 장면처럼. 약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생존에 임박한 사람의 감정선을 단순하고 격렬하게 그려낸 영화는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내 마음을 끌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 개 있다. 주인공이 탄 뗏목에 있는 곧 죽을 청년을 위해 모르핀을 주지만 태워주지는 못하고 떠나는 독일 군인 같은 모습. 친구의 아내와 외도한 시그뵨과 그녀는 집에 돌아온 알프레드의 난처한 모습에서는 희극적으로 헛웃음이 나기도 하니 지루하지 않고 흥미로운 영화였다.
이때의 기억은 작년 봄 넷플릭스에서 <워 세일러>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공개하였을 때 바다 냄새와 함께 살아 돌아왔다. 넷플릭스에서는 3화짜리 드라마로 편집되었는데,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셋 모두 삶에 천착하는, 그러나 관조적인 태도를 그려내었다. 관 안에 울리던 파도 소리와 밖에서 들어온 서늘한 공기는 아직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