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입장에서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더 듣고 싶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돈 드렸으니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하면 섭섭하지요. 할머니들은 돈 때문에 손주를 봐준다고 하는 게 정서상 불편합니다. 물론 손주 양육은 대가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손주를 봐주는 이유는 ‘내 자식이 필요로 하니까’, ‘손주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손주가 행복하게 잘 자라야 하니까’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자 할머니의 손주 육아법>, 조혜자
엄마 온다, 엄마 온다
업무를 마치고 급한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면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친정엄마가 저를 반깁니다. 저는 아이를 낳은 지 170 여일쯤 되어 복직을 했고, 310일이 지난 지금까지 친정엄마가 아이를 전담으로 돌봐주고 계시죠.
친정엄마와 아이는 제가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저는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며 두 사람의 얼굴을 슬쩍 살핍니다. 아이의 컨디션은 어떤지, 엄마는 괜찮으신지 말이죠. 아이가 잘 놀고, 낮잠도 잘 잔 날에는 엄마의 컨디션도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잠이 부족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못한 날은 엄마의 낯빛도 굉장히 어둡습니다. 제 마음도 덩달아 어두워집니다.
요즘 원더윅스를 보내고 있는 아이는 오늘도 역시 낮잠도 잘 안 자고 하루 종일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다고 하네요. 지친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급기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서 쉬다 오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육아를 해본 사람은 혼자 하는 육아와 둘이 하는 육아는 천지차이라는 말에 공감하실껍니다. 친정엄마는 제가 집을 나서는 아침 7시 반부터 집에 돌아오는 저녁 7시 넘어서까지 매일 거의 12시간동안 독박육아를 하고 계신거죠.
당연히 그래야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맞벌이 자녀들을 대신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를 일컬어 '할빠', '할마'라고 합니다. 아이 5명 중 1명은 할마 육아를 하고 있다고 하네요. 할머니들은 자녀를 위해 손주 육아를 선택합니다. 마음 편히 맞벌이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에게 손주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양육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노년의 쉼을 포기하시죠.
할마 할빠들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손주를 돌보시지만, 현실적으로 육아를 전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엄마인 저도 육아휴직 기간에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게다가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날수록 육아는 체력적으로 더욱 힘들어집니다.
저희 아이의 경우도 키는 벌써 할머니 키의 반을 넘어섰고, 몸무게는 10킬로그램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활동량도 많도 힘도 점점 감당하기가 버거워집니다. 친정 엄마는 자꾸 안아달라고 하는 아이의 요구를 온 힘을 다해 하루 종일 들어주고 계시고요. 물론,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아이로 인해 얻는 행복감도 크지만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에는 집안일은 물론 엄마의 개인적인 삶 또한 모두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이를 보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화장실도 맘편히 가기 힘들고, 밥도 제대로 챙겨먹기 힘들죠.
더 마음 아픈 사실은 제가 늦게 결혼하고, 더 늦게 아이를 낳은 탓에 친정엄마도 이제 곧 법적으로 경로우대을 받을 연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손주 육아를 하고 있는 할마의 40% 이상이 '노년에도 내 삶을 찾지 못해 우울하거나 화가 난다'라고 응답했고, 55% 이상이 '손주를 돌보는 일 때문에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으며', '손주를 돌보기가 체력적으로 힘들다'라고 응답한 할마는 63.7%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40%에, 55%에, 63% 모두에 저희 친정엄마도 포함되어 있겠죠.
평생을 자녀를 키우고, 시집 장가보내 놨더니 이제는 손주 육아로 자신의 삶은 뒷전으로 미룹니다. 친정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지만,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그냥 속상해하기만 하고 있는 제 자신이 참 무능하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힘이 들지만 아이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는 못하겠다고 하시며, 또 건강이 나빠져서 손주를 봐줄 수 없게 되면 안된다라고 하시며 운동도 열심히 하시는 엄마를 보며 난 대체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합니다.
다행히 출생신고를 하자마자 예약을 걸어둔 어린이집에 자리가 나서 내년 3월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를 기관에 맡기는 것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친정엄마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고 싶습니다. 아이도 잘 견뎌내 줄 거라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끝까지 이기적인 엄마인 듯하네요.
남편과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휴가를 같은 날 쓰지 말자고. 번갈아가며 휴가를 내어 아이를 돌보자고.
그게 현재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요.
그리고 내일은 “엄마 덕분에 아이도 건강하게 안정적으로 잘 크고 있고, 저 또한 마음 편히 직장생활 할 수 있다고. 건강하게 가까이에서 함께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은혜 모두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답하겠노라고. 필요하거나 힘든 부분 있으면 다 말해달라고. 고맙고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할머니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드리는 존재가 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