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의 시간만큼 휴식의 공간도 중요합니다.
그 곳에서 소는 인간이 꺾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헤밍웨이의 논픽션 작품 중 스페인 사람보다 깊이 있게 투우를 분석한 글이라고 평가를 받는 '오후의 죽음(1932)'의 한 문장이다.
위에서 언급한 그 곳, 즉, 소가 막강함 힘을 가지는 그곳을 바로 ‘케렌시아(Querencia)'라 한다.
케렌시아는 스페인어 ‘바라다’라는 동사 ‘케레르(querer)’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전적으로 애정, 애착, 귀소 본능을 뜻하고, 피난처, 안식처 등으로도 개념을 확대할 수 있다.
투우에서 케렌시아는 소가 지친 심신을 가다듬는 장소를 의미한다. 소는 경기장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장소를 기억해둔다. 경기가 시작되고, 투우사와의 싸움에서 지치거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자신이 정한 케렌시아로 이동해 숨을 고른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자신 만의 케렌시아에서 머무는 동안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안정을 되찾은 후 죽을 힘을 다해 투우사와 다시 쟁투한다.
케렌시아에 있는 소는 다루기가 몹시 위험하고, 죽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케렌시아에 있는 소를 죽이려고 덤벼들다가 목숨을 잃는 투우사가 부지기수다.
이처럼, 소가 자신 만의 공간, 즉, 케렌시아에 있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케렌시아라는 단어는 2018년 소비 트렌드 키워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케렌시아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른 것은 2015~2016년에 방영 되었던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XTM)>라는 프로그램이다. 집 안에서 마음 편히 쉴 공간이 없는 남편들을 위해 아내 몰래 방이나 거실 공간을 평소 꿈꿔왔던 공간으로 탈바꿈 시켜주는 내용이다. 거실이 낚시터, 캠핑장, 야구장, 영화관으로 변하기도 하고, 방이 게임방, 사우나, RC카존, 심지어 화장실로 바뀌었다.
바뀐 공간을 보고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불안해하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공간이 생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남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아내의 입장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했지만, 묘하게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현재 방영 중인 인기 프로그램 ‘미운우리새끼’에서도 토니안은 자신의 주방과 거실을 자신이 좋아하는 편의점, bar로 개조해서 살고 있는 모습이 전파를 탔고, 쉰건모 또한 포장마차 테이블, 횟감이 들어있는 수조, 소주 정수기 등을 구비해 집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연출했다.
워라밸 시대,
휴식의 시간만큼
휴식의 공간 또한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 사회 속에서 마치 투우 경기를 벌인 소처럼 자신만의 케렌시아를 찾아 나선다.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하듯 캡슐형 만화카페, 힐링카페, 수면카페 등이 생겨나고 있다. 직장이 밀집되어 있는 여의도 CGV에서는 오전11시 반부터 오후1시까지 '시에스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침대처럼 180도 젖혀지는 리클라이너 좌석, 클래식 음악, LED촛불, 허브티, 담요, 귀마개, 안대 등이 구비되어 있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휴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케렌시아가 이슈가 되면서 마케팅과 연결되어 인테리어 차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사무실에서도 자기만의 책상을 꾸미는 '데크스테리어'로 직장생활 속 활력을 찾기도 한다.
[관련 기사 : http://news.joins.com/article/22328700]
케렌시아를 단순히 휴식하기 편안한 물리적 의미에서 취미와 같은 새로운 활동이 결합되고, 이를 통해 재충전하며, 창의력이 발현되는 공간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심리적 케렌시아가 아닐까 한다. 케렌시아는 단지 쉬는 장소 뿐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장소, 나에게 집중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포털에서 케렌시아를 검색하면 예쁘게 인테리어가 된 집과 경치가 좋은 해외 여행지가 먼저 검색이 된다. 당장이라도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결혼한 이후로 집 안에서 나만의 케렌시아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먼저, 물리적 공간이 매우 협소해졌다. 집안의 모든 공간이 부부의 공동 공간이 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공간은 갈 곳을 잃은 옷들과 물건들의 차지가 되었다. 글을 쓰며 그동안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해보니 의외로 생각들이 길을 찾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발견했던 장소가 몇군데 떠올랐다.
첫 번째가 바로, 대중교통이다. 출퇴근길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이 시간 동안 책을 읽으며, 또 멍때리며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지만, 의외로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좋은 시간이다.
또한, 길거리를 걸으며, 샤워를 하며 새로운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곳은 가장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집 근처 카페다.
나의 케렌시아는 생각보다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적어도 매일 한번씩은 거치는 동선에 케렌시아가 숨어있었다.
실제로 소셜분석 시스템으로부터 확인된 휴식, 재충전 관련 생활 속 공간에 대한 연관어를 살펴보면, 카페, 집, 침대, 버스 등의 키워드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된다. 거창한 공간이 아닌, 일상 속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이다.
세상은 계속 발전하는데 살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만성 피로, 스트레스, 우울감, 고독감 등에 시달리기도 한다. 마치 치열하게 투우 경기를 벌인 소처럼...
기술의 발전으로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 하나면 원하는 정보에 닿을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와 동시에 타인에게 방해 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다. 어쩌면 케렌시아의 사전적 의미처럼 이러한 모습이 인간의 귀소 ‘본능'일 수도 있겠다.
어느 누구에게나 케렌시아는 있을 것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하루의 생활 속에서
숨어있는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