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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직딩 Nov 02. 2020

점심시간이 있는 삶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긴장, 걱정을 해소시켜주는 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사소한 장난, 시시콜콜한 농담, 시답지 않은 이야기 들이다. 워너원의 노래 <갖고 싶어>에는 "매일 하루의 끝에 시답지 않은 얘길 하고 싶은데"하는 가사가 나온다. 누구나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만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쓸모없고 시시한 말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한 사람쯤은 갖고 싶은 것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황선우 김하나


복직을 하고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매달 25일 통장에 입금되는 월급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에는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할 수 있으며, 밥을 먹을 때 놀아달라고 치맛자락을 붙잡는 사람도 없고, 자다가 일어나서 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식탁 위가 궁금해서 발 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안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없으며, 여유롭게 음식 맛을 음미하며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하루에 세끼의 식사를 합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밥 먹는 시간이 이토록 소중해지다니요.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먹는 시간은 일상이 아닌 비상이 되었습니다.


3분 카레를 즐겨 먹게 되었습니다.

손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합니다.

입에 하나 넣고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얼굴을 마주하고 여유롭게 밥을 먹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일단 당신 먼저 먹어요.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밥 먹는 기술이 점점 더 생깁니다.

배달의 민족 사랑해요.


아이는 하루에 여덟 번이고, 여섯 번이고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정작 아이를 돌보는 어른들은 끼니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아이 먹는 것만 봐도, 밥 안 먹어도 배불러요.’
이런 거 없습니다.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뭐라도 입에 넣어줘야 아이의 에너지를 반쯤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복직을 하니 보장되어있는 점심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여유로워서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이렇게 밥을 먹어도 되나.’ 싶기도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밥을 함께 먹는 동료들과의 수다였습니다. 요즘 투자하고 있는 주식 종목, 아이들 이야기, 주말에 갔던 맛집, 결혼 준비 이야기, 연애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도 흥미롭더군요. 밥을 먹고 나서 한 잔씩 마시는 커피타임도 소중합니다. 커피 쏘기 가위바위보에서 져도 즐겁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날씨가 좋아서 밥을 먹고 회사 근처에 있는 남산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가을의 끝자락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깊은숨을 들이쉬었을 때 콧구멍에서 폐까지 타고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머리끝까지 상쾌하게 해 주었던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도 대단할 것 없는 점심시간이 스트레스와 긴장, 걱정을 해소해주고 자유를 느끼게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 함께하는 쓸모없고 시시한 말들도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는 동료가 있어서 참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한편, 이런 점심시간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일하는 딸 대신 손주를 돌봐주고 계신 엄마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네요.

점심은 챙겨 드시고 계실까.
엄마도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싶으실 텐데.
올해 가을은 단풍구경도 못하고 넘기시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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