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살 싱글언니 시간여행 (22)
30년 전에 독일로 가서 10년 넘게 독일에 살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 시장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는 듯하다. 아마 그때는 그냥 당연한 것으로 알고 지나간 것 같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 동네 축제처럼 열리는 행사로만 생각하고 그냥 방관만 하고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끔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소시지와 글루와인을 마시면서 산책하듯이 힐끗힐끗 쳐다는 보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정말 귀국한 이후에 크리스마스 시장은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장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장소라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직장인이 연말에 유럽으로 1주일 넘게 휴가를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을 보기 위해 여행하는 것은 완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겨울철 가끔 마트에 가서 글루 봐인 그러니까 글루와인이라고 된 와인이 있으면 종종 사서 따뜻하게 덥혀서 마시곤 했다. 나름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크리스마스 시장에 대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냥 학창 시절 때 하일베르크에서 강의 듣다 쉬는 시간에 잠깐 나와서 강의실 바로 앞에 열려있는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따뜻한 글루와인과 갓 구운 허니아몬드를 사 먹은 추억만 남아있다. 그때도 수다를 좋아하는 나였기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군것질하는 재미가 골치 아픈 미적분 함수 그래프로 정책론을 운운하는 강의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었다. 특히 따뜻한 글루와인은 골치 아플 때 만치통병을 해결해 주는 좋은 약이었다. 이렇게 쉬는 시간에 잠깐 마신 글루와인은 나의 몸을 따뜻하게 뎁혀 주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강의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마신 글루와인으로 다시 수업이 시작되면 몸이 노곤해지면서 술 취해서 졸음이 온 건지 아니면 소시지를 사 먹어 식곤증으로 졸리지는 모르겠지만 몰려오는 졸음을 참기 위해 무진장 애썼던 기억은 남아있다.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는 전혀 보하고 살았는데 1년 전 오늘 나는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에 내가 서있었다. 퇴사가 준 선물일 것이다.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기에 언제 어디서든 돈만 있으면 유럽 크리스마스 시장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돈이 많아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상태에서 도망가듯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기에 크리스마스 시장을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뭔지 모르는 답답함이 남아있었다.
작년 11월, 12월을 유럽에서 배낭여행을 하면서 나는 오래전에 독일에 살았을 때 보다 크리스마스 시장을 곳곳히 다 둘러본 것 같다. 이탈리아, 독일, 체코에서 크리스마스 시장을 둘러보았지만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이 제일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1년 전 오늘 나는 나의 제2의 고향 하이델베르크 근처에서 7박 8일을 머무르면서 이 날은 예전에 가보지 못하고 그냥 듣기만 했던 Speyer 도시를 가보았다.
슈파이어 Speyer는 하이델베르크에서 30킬로 떨어져 있고 인구가 5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이다. 도시는 작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시다. 로마제국 시대 때 지어진 슈파이어 대성당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기도 하다. 슈파이어 대성당은 1030년에 착공하여 1106년에 완공되었다. 여기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8명이 이 성당 안에 안장되어 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시대 때 지어진 건물이어서 로마네스트의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당 안도 로마제국처럼 웅장한 기운이 넘치고 또 화려하기도 하다.
이 날 듣기만 했던 슈파이어 대성당을 둘러보기 위해 갔었지만 엄숙한 성당보단 성당 앞 광장과 거리에 있는 크리스마스 시장에 더 끌렸다. 하이델베르크 크리스마스 시장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시장. 동네축제처럼 동네 사람들이 더 즐기는 크리스마스 시장. 길거리 곳곳에 있는 먹거리. 그냥 귀여웠다. 거리 사람들도 상점들도 그냥 귀여웠다.
아침 일찍 하이델베르크에서 출발하여 슈파이어에 기차로 50분 정도 타고 슈파이어 대성당과 크리스마스 시장을 다 둘러보았는데도 시간이 남는다. 정오도 안되었는데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이른 점심을 이 작은 도시 슈파이어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점심으로 슈니첼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따뜻한 글루와인으로 때웠다.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마시는 글루와인은 도시마다 특색이 있다. 글루와인 맛도 도시마다 다르지만 크리스마스 시장 때 사용하는 글루와인 머그컵이나 잔은 도시마다 다르게 만들어진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마셨던 글루와인 머그잔은 그냥 커피머그컵처럼 튼튼해 보였다면 슈파이어 크리스마스 시장에 나온 글루와인 컵은 유리글라스다. 보통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글루와인을 마실 때 와인잔 보증료 3유로가 포함되어 있다. 와인잔을 그냥 가져갈 수도 있고 마신 후 컵을 다신 반환하면 3유로를 돌려받는다. 나는 하이델베르크 와인잔은 가져왔는데 다른 도시에서 맛보면서 사용한 컵들은 가져오지 못해 좀 아쉬웠다. 이렇게 이른 점심을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때우고 다시 나는 나의 제2의 고향 하이델베르크에서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처럼 내가 다니던 길을 걸어보았다.
기차에 내려 예전에 많이 다녔던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여유 있게 걸어 거리를 둘러보았다. 많이 바뀌지 않아 감사한 하이델베르크.
교통의 중심지인 비스마르크 광장에도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작은 먹거리 트럭. 활활 타오르는 장작에 연어구이가 눈에 들어온다. 먹고 싶었지만 이미 나의 배는 슈니첼 빵으로 채워져서 그냥 눈으로만 호강하면서 메인 스트리트 Hauptstrasse 걸어 대학광장까지 현지인처럼 둘러보았다.
길을 걸으면서 보는 길거리 공연으로 나 혼자의 크리스마스를 미리 즐긴다. 오래전에 내가 하이델베르크에 살았던 때와 1년 전 오늘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길거리 공연도 마찬가지다. 꼬맹이들도 길거리로 나와 공연을 하고 용돈을 스스로 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혼자서 애쓰면서 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고 독일 아이들이 왜 자립심이 강한지 알 수 있다.
다양한 길거리 공연을 보고 즐기면서 다시 나의 걸음은 대학광장에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 거기에 멈추어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장소, 나의 추억의 장소에서 모든 것을 다시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이 광장에 열린 크리스마스 시장 곳곳을 눈으로도 꾹꾹 담고 사진과 영상으로도 많이 담았다.
언젠가는 하이델베르크에 다시 오겠지만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이 시기에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장면 하나하나가 나에게 소중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뚜벅뚜벅 걸으면서 하이델베르크의 많은 것을 눈과 나의 핸드폰에 담았다.
여행숙소가 있던 에버바흐로 가는 트램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데 이탈리아 여행 때보다는 생기가 도는 모습이었고 그때보다는 깔끔한 모습이었다. 아마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르면서 나는 여행자가 아닌 거주자였던 것 같았다. 하이델베르크는 그냥 집 같았고 그리고 세탁기도 사용할 수 있어 그래서인지 더 내가 더 깨끗하게 보인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오늘 역시 나는 그때가 또렷하게 기억이 나고 크리스마스 시장을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맛보고 싶다. 아마 이 생각은 지금뿐만이 아니라 1년 후 오늘도 변함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도시여서이다.
지금은 당장 못 가지만 1년 후 오늘 다시 가기 위해 나는 그때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때는 1년 전 오늘 가졌던 무거운 마음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거기를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