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살 싱글언니 시간여행 (23)
1년 전 오늘 나는 여행자 모드가 아니라 그냥 여기에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여행객들이 많이 없는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을 걸었다. 철학자의 길은 하이델베르크 로렌츠베르크 언덕에 있는 산책로다. 이 철학자의 길을 19세기 때 하이델베르크 많은 교수들이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하여 철학자의 길로 불린다. 우리가 아는 칸트, 괴테, 헤겔도 이 산책로를 걸으면서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도 관광명소로도 유명하지만 관광객들이 여기 언덕까지 올라오지는 않는다. 로렌츠 언덕에 있는 철학자의 길까지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전 90년도 중반에 내가 여기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를 했을 때도 한 번도 가보질 않았다. 왜냐하면 넥카강에 있는 칼스토어 다리를 건너 이 언덕에 등산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단지 우리 연구소가 있던 도서관에서 창 너머에 언덕에 있는 이 길을 그냥 바라만 보았다. 생각하는 대신에 나는 창 밖의 철학자의 길을 보며 시험공부하기 위해 달달 외웠다. 전공과목이 독일어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외국어이기에 전공과목에 있는 모델도 그냥 단어 외우듯이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외운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책상 위에 있는 노트 대신에 도서관 창 밖 언덕 위에 있는 철학자의 길을 보면서 공부를 했었다.
그 당시 5년 동안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보지 못했던 이 철학자의 길을 독일에 놀러 올 때마다 시간이 되면 이 철학자의 길을 가보곤 했다. 1년 전 오늘 이 날도 나는 철학자의 길로 오르기 위해 만만의 준비를 했다. 왜냐하면 언덕 위에 있는 철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좁고 좁은 꼬부랑 뱀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칼스토어 다리에서 15분 정도 이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철학자의 길을 만날 수 있다.
이 뱀길 (Schlangenweg)이라고 불이우는 이 길도 유명하다. 15세기에 만들어져 있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만만치는 않다. 좁고 좁은 돌길을 올라간다는 것 그냥 등산과 같다. 우리 집 뒷산에 비하면 이 언덕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꼬부랑길과 좁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일단 이 뱀 길을 지나 철학자의 길로 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라는 것을 별 것이 아닌 지치지 않게 내 배를 채우는 것. 그래서 일단 학창 시절 때 자주 이용하던 대학광장에 있는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든든한 한 끼를 해결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시장은 아이들의 천국이다. 글루와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코코아도 있고 달달한 케이크와 쿠키도 여기저기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뱀길로 철학자의 길을 갔어야 했기에 당을 보충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바나나와 초콜릿크림이 발라져 있는 팬케익을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따뜻한 코코아 대신 글루와인을 주문했다. 혹시 술 취해서 오름 막길에 미끄러질까 봐 걱정은 했지만 그냥 따뜻한 글루와인으로 정했다.
이렇게 따뜻하게 든든하게 먹고 철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 칼스토어 다리를 건넜다. 건너서 하이델베르크 성 쪽을 바라보니 새롬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나에겐 언제나 설렌 곳이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하이델베르크가 더 예뻤다.
일단 나는 좁고 좁은 골목길과 같은 이 길을 알리는 팻말 "뱀길 (Schlangenweg)" 보고 심호흡을 하고 헉헉거리며 오르기 시작했다. 글루와인 한 잔에 약간 취기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를 수 있었다.
이 뱀 길은 너무 좁은 오르막 꼬부랑 길이어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이러한 뱀길 같은 고행을 통과해야만 그 어려운 철학의 도에 이르는 것 같다. 십오 분 정도 헉헉 거리면서 올라가니 언덕 위에 철학자의 길이 보였다. 거기서부터는 평평한 산책로이다. 그 산책로에서 넥카강변과 또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으니 없던 생각도 저절로 잘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수들과 철학자들이 이 길을 좋아한 것 같다.
이 길을 걸으면서 여기서 아무 생각 없이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철학자 길에 있는 집들은 진짜 서울 성북동에 있는 집들처럼 부자들만 산다. 독일 테니스 선수로 유명한 슈테피 그라프도 이 산책로에서 살았었다. 하지만 퇴사하고 도망치듯이 온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 시설 안 좋은 오래된 호텔에서 하룻밤 숙박비 100유로도 아까와 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좀 떨어진 에버바흐에 숙소를 얻은 것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시 독일에서 그것도 비싼 동네 하이델베르크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한다.
하지만 꿈은 꾼다. 언젠가 돈을 충분히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 내가 원하는 곳에 시간제약 없이 지내는 것을 꿈꾼다. 학창 시절 때 도서관에서 창너머 이 철학자의 길을 보며 시험을 통과하기에 공부했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나는 지금은 못 가지만 언제 가는 갈 수 있는 그곳을 위해 또다시 인생공부를 한다. 다시 오기 위한 다짐을 하듯이 나는 이 철학자의 길에서 나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