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강의에서 나는 질적연구방법에 대하여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질적연구방법 수업은 양적연구방법 수업 때와 수업의 분위기부터 다르다. 양적연구방법 수업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가 주였다면, 질적연구방법에서는 “그런 문제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돼.”가 주다. 전반적으로 다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대체로 정해진 것이나 정답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느낄 수 있는 ‘수용되는 느낌’은 학습자에게 참 푸근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적연구방법의 철학적 기반에 대한 읽기에서 나는 질적연구의 함정과 위험성을 느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지난 학기 <공통필수 교육과정> 강의에서 다루었던 구성주의에 기반한 지식의 상대주의와 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실재론에 대한 논의가 오버랩되었다. 교육과정의 주요 물음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고, 그중 공통필수 교육과정은 “모든 학생들에게 공통적이고 필수적으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이든 삶의 태도이든 “정답”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고, 연구는 향후 가르치게 될지도 모르는 그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지식이라는 대상을 공유하고 있는데, 질적연구의 패러다임에서도 과연 절대적인 지식이라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야기된다.
구성주의에서는 인간이 지식을 발견하거나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구성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구성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역사적, 사회문화적 차원이 개입되기 때문에 공유하는 지식, 실천, 언어 등을 기반으로 하여 해석을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구성주의가 너무 급진적으로 가게 되면, 합법적인 지식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요인들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하게 확대 해석하게 되고, 이는 과격하고 회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입장으로 흐르게 된다. 의미, 진실, 지식은 사회적 교섭 과정의 결과에 불과하며, 진실이란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망각해 버린 환상일 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재 질적연구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극단적인 사회적 구성주의 관점이나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다. 이런 패러다임에서는 어차피 우리에게는, 따라서 연구자에게도 좋거나 나쁜 것을 구분해 낼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요즈음에는 누구도 자신만이 올바른 관점을 가졌다고 쉬이 말하지 못한다. 사람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다르며, 저마다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세계와 텍스트를 보는 것이 당연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푸코의 전기 사상에 따르면 중세인은 타율적이며 감성이나 판단의 근거를 성경에서 빌려와 권위에 의존해서 말했지만 근대인은 자율적, 이성적,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따라 도덕적 판단을 스스로 내린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저마다 다른 판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양심적인가? 도대체 어느 게 옳은 해석이고 더 적합한 해석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없어져가고 있다. 해체는 이러한 무결론의 결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결국, 해체주의란 삶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인 것이다. 질적연구에서 어떤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닌 그저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서 그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러한 입장인 것이다.
여기서 ‘연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우리는 연구를 왜 하려고 하는가?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한 연구자로서의 내 입장에서 연구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무엇을 더 잘 앎으로써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연구 과정이 없이도 상식적으로 무엇에 대해 결론이나 답을 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아직 위험하다. 그래서 그 상식이 진리인지 아닌지 밝혀내기 위해 연구를 한다. 만약 어떤 연구의 결과가 오직 하나의 연구대상자 혹은 연구참여자를 이해하는 데에 그쳤으며 그곳에서 나온 시사점이 그 어디에도 적용될 수 없다면, 그것은 좋은 연구라고 볼 수 없다. 좋은 연구라고 할지라도, 다소 소모적이다. 한마디로 무용하다. 기본적으로 연구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기여를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보편성-즉 정답 내지는 진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반 훈이는 수업에서 어떻게 소외되는가”와 같은 연구에서, 또 다른 훈이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는 데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그래서 질적연구의 패러다임과 연구 자체가 추구해야 할 목적은 부딪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한편 그래서 어떤 연구 과정이나 결과는 독자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나에게 적용되지 않으므로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비판적 읽기는 좋으나,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연구가 이루어지고 출판되었다고 끝이 아니고, 그 순간부터 수많은 연구물들은 생태계 속에서 살아남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할 것이다. 연구의 타당성은 연구 수행 가운데에서만 추구될 뿐 아니라 연구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검증될 것이다. 어떤 연구는 많은 공감을 얻고 많이 회자되고 인용되며 살아남을 것이고, 어떤 연구는 관심받지 못하고 서서히 잊힐 것이다. 결국에는 질적연구자도, 사실은 연구방법과 상관없이 결국 연구자들은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어떠한 보편타당한 원리 내지는 이론을 추구하기 위해 작은 날갯짓이라도 해야 할 숙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