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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ie Dec 07. 2023

교육에서 여백이 필요한 이유

IB & KB 교육과정 실제 개선방향 탐구 (6)

“교육에 여백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혹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섣불리 공부를 이어가지 않고 뜻하지 않았던 일을 하며 다음 공부를 고민한 지난 2년은 저에게 Gap Year와 같은 작용을 하였습니다. 정말로 공부를 더 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교육 문제는 너무나도 무겁고 복잡한데 과연 교육학을 할 수 있을지, 차라리 다른 전공을 할지, 그저 노동으로서의 일을 할지, 그것이 차라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닐지 등과 같은 고민을 치열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민의 시간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몸소 겪은 후인 지금, Gap Year의 의미를 직접 느껴본 것이 미래의 교육학자로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는 내가 교육과정학 전공 대학원에 입학 자기소개서에 기술한 내용이다. “여백”이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Gap Year 대신 여백이라는 말을 썼을 것 같기는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교육학적으로 분명 의미 있다고 느껴본 입장에서 대학원 수업에서 이를 다루는 것은 반갑기도 하고 더 와닿는 일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를 방황을 했다. 졸업하는 해에는 임용고시를 준비했고, 나는 그동안 나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누구보다 알차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졸업하면서 바로 임용에 합격하는 신화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부터 꽤 긴 시간을 쉼 없이 달려온 데에 지친 데다가 진로에 대하여 다시 방황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졸업하던 시기는 코로나19의 유행이 막 발발하기 시작할 때였고, 당장 해야 할 것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수도 없는 비로소 인생 최초로 “광활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완전히 백수였더라면 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교육 관련 기관에서 계약직 하나를 얻게 되었고, 업무량이나 업무 강도가 세지 않아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의 가정 안에서 더더욱 눈치 보지 않고 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이 생각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생각할 충분한 시간 좀 주어지기를 항상 원했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무슨 일을 할 때에 마구 피어오르는 생각이 당장 해야 할 일들에 방해가 되곤 했기 때문에 생각의 고리를 좀 끊어내고 단순하게 좀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여전히, 내가 만약 생각이 좀 없고 더 단순했더라면 고등학교 공부도 좀 더 잘해서 대학도 조금 더 잘 갔을 것 같고, 임용고시 공부도 좀 더 수월하게 했을 거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광활한 시간 속에서는 생각의 고리 좀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생각하는 일은 내게 매우 즐거운 일이 되었다.


나는 책을 좋아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광활한 시간 속에서 그동안 미뤄둔 읽고 싶던 책을 정말 실컷 읽었다. 책을 한 권 읽고 나서는 마음에 들거나 인상 깊은 구절은 필사를 했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글로 쓰곤 했다. 어떠한 외압도 없이, 시간적 제한도 없이 하고 싶은 걸 실컷 하면서 그간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생각들이 정리되었고, 점차 내가 누구인지 명확해졌으며, 적당한 때에 또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때라도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감사하고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시간을 청소년기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있다.


아무튼 이 경험을 통해 광활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팁도 생겼다. 첫째는 스스로에 대해 관찰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스스로에게 압력을 가하지 말고, 마치 흐르는 강물에 자신을 띄워 놓듯, 나는 과연 가만히 두면 무엇을 하는가,를 한 번 실험해 보고 관찰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 외부에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여백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데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학교교육에 의한 압박이 이전에 비해 훨씬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외압에 의해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꼭 학생 때가 아니더라도,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여백의 시간을 스스로 허락하지도, 그런 시간에 익숙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생산적 규율 권력은 현재 사회형태의 지배 권력 유형을 이루며, 앞선 두 권력(억압적 권력, 규범적 통합 권력)처럼 일탈하는 것을 제거하거나 감금하지 않으며, 배제와 규범적 재통합을 통해 일탈자를 개조하는 것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권력 유형은 개인을 내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1920년대와 1970년대 학교 개혁 시대를 계기로 낡은 학습 학교와 주입식 학교는 새롭고 보다 유연한 교수 및 학교 문화로 대체되었고, 이로 인하여 학습자의 자기 활동이 강조되었으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판옵티콘적 권력 원리의 완성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력 원리는 더 이상 외부로 영향을 미치기보다, 자기기술로서 내부로부터 발전되기 때문이다(Krüger, H. H., 2023).

규율사회는 ‘뭔가를 해서는 안 된다(당위의 부정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면, 성과 사회는 ‘무한정 할 수 있다(능력의 긍정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규율사회가 부정성의 사회라면 성과사회는 긍정성이 사회로서, 그 긍정성이 과잉된 결과 소진과 우울증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당신이 곧 경영자”라고 이름하면서 마치 모두가 각자 삶의 주인인 것처럼 주문을 외지만, 사실은 바로 그것이 더욱 효율적인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강수돌, 2012).


둘째는 인내이다. 처음 심심하기 시작할 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나는 시간 있어 봤자 어차피 잠만 자고 의미 없이 TV만 보고 스마트폰만 봐.’라고 한다면, 그건 아직 심심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휴식의 상태이다. 그렇게 쉬고 쉬다가 충분히 쉬어서 다시 완충이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무얼 하게 되는지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정범모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가 여백의 시간을 돌려받았을 때, 처음에는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며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라고. 그러나 결국에는 그 정도 시간은 스스로 책임지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삶의 시간’을 되돌려 줄 때, 한 과도기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 예견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부당하게 매여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해방’되었을 때, 아이 자신도, 부모도, 교사도 당장엔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되돌려 받은 방과 후를 무엇으로 보낼지, 부모는 일찍 집에 돌아온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교사는 방과 후에도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아이는 그의 삶의 시간을 뜻있게 보낼 수 있도록 생각하고 계획하는 책임을 져야 하며, 부모와 교사는 그것을 도와주고 지도해 주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은 회피할 수 없는 ‘삶의 책임’이다. 그 책임이 두렵다고 아이를 다시 ‘노예’ 상태에 되매어 놓을 수는 없다(정범모, 1993).


갭이어, 광활한 시간, 혹은 여백의 시간을 몸소 경험한 입장에서 교육에서 여백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창의성의 발현이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교재로 활용하는 인형에는 눈, 코, 입이 없다. 그래야 아이들이 인형의 표정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슷한 원리로 우리의 삶의 시간도 백지로 만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발도르프 인형(출처: https://inamu.org/boardPost/106263/54)


둘째, 우리는 공부한 것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영양소를 섭취할 때, 영양소가 적절히 기능하도록 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영양소가 소화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소화될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섭취만을 한다면, 결국 적정량 이상의 것은 몸의 이상 반응을 일으켜 배탈이 나거나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의 지식을 집어넣는 만큼 그것이 소화되어 자신의 것으로 될 때까지 적절한 텀을 주어 가며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자아와 자기 진로의 깊이 있는 탐구, 즉 개성의 계발을 위해서다. 자신에게 알맞은 진로를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진로 방향이 있는지를 알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재능이 무엇인지, 어떤 것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시간이다. 독일에서 전일제 학교가 논의될 당시 ‘학교에 너무 오래 체류하게 되면 학생들이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과 다른 학생들의 결정에 의존하게 되어 자기주도성이 감소하고, 학교 밖의 자유시간이 제한됨으로써 개성이 상실된다 ‘는 점은 전일제 학교의 반대 근거로 제시되었다(정기섭, 2021).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학교에 더 많은 학습과 체류를 요구하거나, 너무 많은 사교육을 시키는 것은 학생들의 자기주도성과 개성 상실을 위해 힘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즘 시간강사로서 초등학교 5~6학년 교실을 들어가고 있는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입술과 온몸을 꿈틀대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방과 후와 주말까지 학원과 가정에서 얼마나 억압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가 상상이 간다. “너희들 학교 끝나고도 학원에 가서 잡혀있으니까 여기 와서 이러는 거지? “ 하니 맞단다. 초등학생이 벌써 제발 좀 쉬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방과 후에는 자유롭게 뛰놀며 에너지를 충분히 분출하고 와야 학교에 와서는 집중을 잘할 수 있을 텐데, 방과 후에 더 매여 있을 테니 그나마 학교에 와서 억압된 에너지를 분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정범모 선생님께서는 교육에서의 여백에 대해 ‘방과 후의 시간’이라는 표현으로 이미 30년 전부터 이야기하고 계셨다. 우리는 언제쯤 신체적, 지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인 탐색과 성장에 불가결한 시간을 아이들에게 되돌려 줄 것인가?


한국의 고교생에겐 ‘방과 후’라는 삶의 희열과 성장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다. 본래 학교란 … 많아야 일곱째 시간 하고 나서 서너 시경에 파해야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새장에서 해방된 새들처럼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닌다.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소설을 읽든지, 친구와 놀러 가든지, 또는 학교에 남아서 그야말로 하고 싶은 스포츠, 공작, 실험, 연극 등 ‘과외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오후 두세 시만 되면 몸을 비틀면서 기다리는 해방과 희열의 시간이고, 실은 그들의 신체적, 지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인 탐색과 성장에 불가결한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박탈당하고 있다(정범모, 1993).



강수돌(2012). 성과사회, 자기착취, 그리고 피로사회: 한병철,[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뉴 래디컬 리뷰, (52), 275-283.

목영해(2020). 자기주도학습 개념과 신자유주의. 교육사상연구, 34(2), 25-41.

정기섭(2021). 독일의 학교교육. 살림터.

정범모(1993). 입시와 교육개혁. 나남.

Krüger, H. H.(2023). 독일 교육학의 전통과 갈래: 교육학 연구의 현대적 패러다임(우정길, 김상무, 김철, 정기섭, 정상호, 조상식, 최재정, 홍은영 역). 박영스토리(1998)


배경사진 출처: https://ihoneybee.cafe24.com/m/product/발도르프교구와-놀잇감-계절탁자-테이블-동화인형-양모솜-니들펠트-정다운가족/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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