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 & KB 교육과정 실제 개선방향 탐구 (5)
개념기반 교육과정에 대한 관심
오늘날 기술이 발전하고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단순한 사실 차원의 지식들을 기억하도록 하는 차원의 학습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사실을 암기하는 활동은 흥미롭지도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울뿐더러 인터넷에 검색어만 잘 입력하면 원하는 지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사실들을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실을 내 머릿속에 직접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래도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들 기억하고 있던 사실을 꺼내어 쓸모 있게 활용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관련된 듯한 기억하고 있던 특정 지식이 떠오르면서, 두 상황은 서로 다르지만 어떠한 원리가 유사하게 적용되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정보는 (현재의 기술로는)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 서로 다른 상황의 연결점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개념”이다.
개념기반 교육과정은 바로 우리가 단순한 사실의 차원을 넘어 “개념”을 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습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가 그동안 개념기반 교육과정 하에서 학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개념적 사고를 활용하지 않아 온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사고 능력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사실들만 학습했을지라도 그렇게 학습한 서로 다른 사실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사고하고 일상생활에 사용해오기도 했다. 다만 기존의 교육과정에서는 그러한 과정이 “어쩌다가”, “운 좋게”, “우연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 그리고 미래 사회에서는 개념적 사고가 점차 중요시됨에 따라 더 이상 이러한 과정을 우연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학습자가 개념적 사고를 할 수 있게끔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초중등 교육과정에 이 “개념”을 교육내용 선정과 조직의 주요 요소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국가 및 주 단위에서 주요 교과별 기준들이 개발되던 때 Erickson의 개념기반 교육과정 등 지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교육과정 설계 이론과 모형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질적으로 우수한 수업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교과의 교육내용이 핵심 개념과 원리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교과의 사실이나 기능을 단순히 암기하거나 숙지하는 차원을 넘어 학습한 지식이나 기능을 새로운 사태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홍후조 외, 2023). 우리나라의 경우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 각 교과의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내용 적정화를 교과 교육과정 개발의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고 하였고(교육부, 2015),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깊이 있는 학습’을 교과 교육과정 개발의 지향점으로 삼고 학습 내용을 선정하고 교과 고유의 사고와 탐구를 명료화하는 것을 설계의 원리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교육부, 2021).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IB 교육과정에서도 이미 개념적 접근의 관점에서 교육과정을 설계하여 운영하고 있다.
잘 적용되고 있는가
이렇듯 거시적 차원의 교육적 논의에서는 개념을 중시하며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표방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표방한다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교육과정의 구성 요소별 내용 관련 지침의 제시 방법에 있어는 막상 ‘내용 요소’를 반복적으로 나열하고 있거나 실행 측면에서 구체적 지침을 제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김은영, 2023). 이러한 사례는 또한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대표적으로 표방하는 IB 교육과정을 도입하여 실시하는 우리나라 학교 교사들에게도 나타난다(임유나, 2022). 아래 표는 우리나라의 IB PYP 후보학교에서 개발한 탐구단원 UOI이다. 핵심 개념은 IBO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한 것들이고, 관련 개념은 교사들이 직접 추출한 것들이다. 관련 개념은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추출할 수 있으나, IB에서 관련 개념의 예시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에는 특성, 구조, 차이, 유사성, 패턴, 행동, 적응, 주기, 상호의존성 등이 있다(IBO, 2018). 이러한 개념들의 공통점은 추상적이고, 여러 사실과 상황에 적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래 관련 개념으로 제시된 것들은 추상적이기보다는 미시적이고, 특정 대상을 나타내는 낱말이거나 혹은 역시 ‘내용 요소’에 해당되는 것들이 많다. 관련 연구자는 ‘개념’의 의미와 속성, 개념 추출에 대한 교원의 이해와 전문성이 함께 개발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였다(임유나, 2022).
에릭슨의 지식의 구조
개념이라는 것이 사실 그 성격 자체가 매우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지만,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개발하거나 개념기반 수업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주창한 에릭슨이 제시한 지식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개념기반 교육과정을 주창한 에릭슨이 표현한 지식의 구조이다. 지식의 구조는 사고의 대상을 ‘사실 - 주제 - 개념 - 일반화 / 원리 - 이론’으로 구조화한 틀이다. 사실(fact)은 구체적인 예이고, 주제(topic)는 사실들을 묶는 틀이자 단원 학습의 맥락을 제공한다. 개념(concept)은 사실과 주제로부터 도출된 지적 구성체로, 추상화 수준이 높으며 전이가 가능하다(홍후조 외, 2023). 에릭슨은 ‘사실’은 ‘지식’에 해당하고, ‘개념’은 ‘이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사실적 지식은 전이되지 않지만, 개념적 이해는 전이된다(Stern, J. H. 외, 2022). 일반화는 두 개 이상의 개념 간 관계이며, 원리는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진리이다. 이론은 현상이나 실천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적 아이디어의 집합이나 가정이다. 고등교육 수준에서 이론을 다루게 된다면, 초중등교육에서는 개념과 일반화 수준까지를 주로 다루게 된다(홍후조 외, 2023).
IB에서는 이러한 에릭슨의 지식의 구조 모형을 가지고 PYP와 MYP의 학습의 예시를 설명한다. PYP에서는 “나의 가족”의 주제에서, “가족”, “협력”, “유사성/차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낼 수 있으며, “가족은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혹은 “가족은 서로 닮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도 하다.”라는 일반화 내지는 원리를 도출해 낸다. MYP에서는 "초기 유럽 정착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했다.", "초기 유럽 정착민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섰다."라는 사실들은 "초기 유럽인들의 이주"라는 주제를 구성한다. 이 주제에서는 "이주", "문화 확산", "요구/필요", "변화"와 같은 개념을 도출해 낼 수 있고, 이 개념들의 학습을 통해 "사람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다.", "이주는 문화의 확산을 이끌고, 이는 사회적/경제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라는 원리 내지는 일반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되었으리라 본다. 위의 내용을 먼저 살핀 후 학자들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보면 개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나, 아무런 배경 없이 개념에 대한 정의만 먼저 읽어봤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개념이란, 여러 대상이나 현상의 즉 사실들의 ‘공통된 특성’에 기초하여 하나의 범주로 분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추상적 용어로 단어나 구로 표현한 용어로 제시된다. 사실들이 어떤 속성으로 묶이는가에 따라 같은 사실이 다른 이름의 개념에 속하게 될 수 있다(조호제 외, 2021; 김은영, 2023). 개념은 수많은 현상이나 사실을 일일이 암기하지 않더라도 다양하고 복잡한 사실이나 현상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안목과 사고의 틀을 제공해 준다. 또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이나 현상을 넘어 새로운 현상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복잡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조호제 외, 2021). 철학에서 개념은 판단에 의해 얻어지는 것, 판단을 성립시키는 것이 되고, 사회과학에서는 연구, 분석, 이해, 설명, 예측 등을 위해 사용되는 중요한 인지 도구이다(김은영, 2023).
IB에서는 개념이 다음 세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시간과 장소, 공간을 초월하여 의미와 가치를 가져야 한다. 둘째, 추상적이면서 한 단어, 두 단어 또는 짧은 구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축약적인 특징을 포함해야 한다. 셋째, 특정 예시들의 공통적인 속성을 표현해야 한다(IBO, 2012).
개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어떤 것이 개념인지 스스로 도출해 내는 것이 어렵다면, 예시를 참고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은 매우 폭넓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IB가 제시하는 개념의 예시는 아래 표와 같다(IBO, 2018).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싶다면, 그 개념이 여러 주제와 사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또한 다른 개념과 함께 어떠한 원리와 일반화를 끌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사실적 질문과 개념적 질문
개념의 키워드를 살펴보는 것보다 개념적 질문을 살펴보면 개념에 대한 이해가 더 쉽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수업에서 ‘프랑스혁명’을 배웠다고 하자. “프랑스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와 같은 질문은 사실적 질문에 해당한다. 그러나 개념적 질문은 “혁명과 폭력의 관계는 어떠한가?”, “혁명적인 정치의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사실적 질문은 쉽게 객관식 선다형 문항으로도 바꿀 수 있겠지만 개념적 질문은 객관식 문항으로 제시할 수 없으며, 단순한 답변도 불가하다. 곧바로 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사고가 시작되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심오한 주제나 사고만을 다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전 글에서 예시로 다룬 IB PYP의 아기돼지 삼형제와 같이 얕고 가벼운 주제도 가능하다. 또한 같은 주제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도 다양한 질문이 가능하고, 얼마나 좋은 질문을 던지는가는 교사의 역량이 되며, 교사들 뿐 아니라 아이들도 스스로 질문의 제기가 가능하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질문하는 능력을 길러 나가게 된다.
이해중심 교육과정과는 다른가?
개념기반 교육과정의 키워드를 “이해”로 보았다면, 이해중심 교육과정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두 교육과정 모두 ‘단원 역순설계’, ‘깊은 이해’를 강조하는 점 등에서는 같다. 하지만 이해중심 교육과정에서는 개념기반 교육과정처럼 지식, 기능, 개념 간의 관계를 정치하게 구분해 다루지는 않는다(이찬승, 2021.12.02.). 또한 이해중심 교육과정에서는 이해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는다.
학문중심 교육과정과는 다른가?
개념기반 교육과정의 키워드를 “전이”로 본다면,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무엇이 다르냐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도 지식의 구조를 학습하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용과 전이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지식의 구조가 가지는 전이 효과는 실제 학생의 삶으로의 전이보다는 유사한 학문 분야에서의 전이에 국한된다. 학문에서 발견한 지식의 구조는 관련 학문 분야에 쉽게 전이되어 학생의 이해를 도울 수는 있지만 실생활에서의 적용이나 전이는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한혜정, 이주연, 2017). 이에 비하면 개념기반 교육과정에서는 학문이나 교과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을 논하며 실제 세계로의 전이를 지향하고 사회적 필요의 변화에 능동적인 대응을 함께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홍후조 외, 2023).
맺으며
고도의 지능정보화사회에 접어들고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식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이 한정된 사회에서는 지식 자체와 지식의 양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지식을 모르는 것, 질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지식은 “상식”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기성세대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젊은이들도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이는 소통의 부재 때문에도 생기지만 워낙 복잡 다양한 지식이 널려 있다 보니 서로 공유되는 부분 자체가 적어졌기 때문이기도 한다. 지식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지식의 유효기간도 점차 짧아지는 가운데 학교에서 배워야 할 “필수적인 지식”은 과연 어디까지 어떻게 선정할 수 있을까? 지식으로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까지 생긴다. ‘미리 알고 있는 자의 오해’를 의미하는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 ‘더 많이 알수록 지식의 덫에 빠진다’는 ‘역설적 무지(無知)’와 같은 신조어도 생겨난다. 학교에서 겨우 Chat GPT가 답변해 줄 만한 것들을 학습한다면 학교의 매력은 점차 떨어질 것이다. “19세기 학교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학교의 오명을 획기적으로 벗어버릴 방안은 무엇일까? 점점 발전하는 기술을 쫓아가며 디지털 교육, AI교육을 급하게 끼워 넣는 차원을 넘어서 그 어떤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학교교육을 공고히 지켜나갈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교육자들과 교사들이 독일, 프랑스, 핀란드, 싱가포르 등지의 선진 교육을 보고 배워 어설피 적용해보려 하는 차원을 넘어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 선진 교육에 적용되고 있는 원초적인 이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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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그림 출처: https://www.structural-learning.com/post/key-concepts-pyp
에릭슨의 지식의 구조 그림 출처: https://teacherfulton.wordpress.com/2019/04/03/concept-based-education-the-structure-of-know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