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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연주의 무너지는 경계와 그 의미

by Lanie

전통적으로는 연주자가 작곡가이거나 편곡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창작과 연주의 경계선이 불분명했지만 곡목의 확장 등을 위해 학교교육에 의해 연주와 창작을 분리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창작과 연주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가령 대중음악의 경우 가수이자 송라이터인 경우와 전통음악 그룹에서도 음악연주를 자작곡으로 하는 추세가 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작곡가와 연주가의 역할은 무엇이며 이 둘의 병합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날 창작과 연주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는 경향이 나타나 작곡과 연주의 병합이 나타나는데 이 둘의 병합은 것은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음악인으로서의 경쟁력의 향상이고 둘째는 다원주의적인 현상이다.


첫째, 작곡과 연주의 병합은 작곡가와 연주가 개인의 음악인으로서의 경쟁력 향상을 의미한다. 경제 수준의 향상에 따른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한 개인이 갖출 수 있는 역량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취업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외국어 한 가지만 잘할 수 있어도, 혹은 컴퓨터만 잘 다룰 수 있어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요즈음 외국어 한 가지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한 개인이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제2외국어는 물론이고 거기에다가 컴퓨터도 잘 다뤄야 하고 글도 잘 써야 하고, 문화적인 교양도 갖춰야 하고 사회성도 좋아야 하는 등 한 명의 청년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매우 많다. 이는 경쟁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경쟁을 받쳐줄 교육이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기반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는 연주자가 악기 연주 하나만 잘 하면 되었다면, 오늘날 경제와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악기 연주만을 잘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은 넘쳐난다. 따라서 음악인으로써 경쟁력을 갖추려면 악기 연주 하나만으로는 더 이상 승부를 보기 어렵고 다른 역량을 함께 갖춰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다른 역량이 바로 작곡 능력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두 가지를 모두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사실상 어렵지 않다.


둘째, 작곡과 연주의 병합은 다원주의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시대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원주의는 정치, 종교, 문화 등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문화에서는 더욱 쉽고 빠르게 나타나고 그 중심에 예술이 있다. 예술에 있어서의 다원주의는 기존에 예술이 왕이나 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이 되었을 때부터, 즉 사회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기서 ‘인간’이 바로 오늘날의 ‘대중’이고, 대중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향유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만큼이나 예술이 다양화되는 것이다. 대중들은 어떤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의해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각자가 어떤 작품을 통해 기쁘고 즐거운지, 공감할 수 있는지,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되는지 혹은 특정 감정을 자극하는지 등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고 소비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예술이 매우 다양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의 움직임은 대중예술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들의 평가 기준에도 영향을 미치고 예술 전반으로 곧 퍼지게 된다. 더 이상 작품의 예술적 ‘수준’만이 그 작품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고 따라서 다양한 예술이 양산되게 된다.


예술적 수준만이 특정 작품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일정정도의 감각과 기술만 있으면 누구든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기존에도 누구나 예술 작품을 만들 수야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가 만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연주자가 곡을 작곡하고, 작곡자가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작곡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작곡을 하고, 악기 연주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연주를 하는 것, 즉 아마추어적인 것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추어적 예술도 예술의 다양성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위 두 현상을 종합해보면 기술을 갖게 되는 것이 쉬워지는 만큼 기술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다른 것, 즉 ‘새로움’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작곡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작곡가와 연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연주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다양성과 함께 가는 것이 바로 ‘보존’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원형의 보존’을 포함하는 말이다. 작곡과 연주를 둘 다 얼추 잘 하는 사람도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일부 음악인들은 분명히 이를 비판할 것이다. 여전히 기존의 방식대로 완벽하게 연주하고 예술적으로 꼼꼼하게 양식에 맞춰 작곡해내는 작곡가를 찾는 사람도 존재한다. 다만 예술이 다양화되면서 그 비율이 조금 적어질 뿐이다. 다시 말해, 작곡과 연주가 병합된 형태가 일부 받아들여진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해서 각자의 역할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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