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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구락부: 손탁호텔의 사람들> 앙코르 요청

by Lanie

2022년에 작성하는 2018년 공연 리뷰라니, 여전히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앙코르 요청을 해봅니다.




<정동구락부: 손탁호텔의 사람들>은 정동극장의 ‘창작ing'시리즈로 기획된 낭독 연극으로, 정동극장 내 비지정석 30석의 소극장인 정동마루에서 진행된 공연이다. 콘셉트가 독특하고, 무엇보다 대학생활 막바지의 가을날에 잠들어있던 감수성을 다시 끌어올려준 공연으로 최근 관람한 공연 중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공연이다.


정동마루의 무대 설치


<정동구락부: 손탁호텔의 사람들>의 콘셉트는 “과거와 미래,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공간, 1900년대 정동 속으로”이다. 190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개화기이다 격동기로, 신문물이 빠르게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이고 그 중심에는 정동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손탁호텔은 서울 내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자 프랑스 레스토랑 및 카페였다. 당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 장소가 갈망과 낭만의 장소였을 것이다. 서구 문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도 당시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면 정동이라는 공간, 손탁호텔이라는 장소에 대해 가지는 느낌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동은 몇몇 대사관들이 위치한 국제적인 곳이면서,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과 같은 문화 공간과 당시부터 있던 정동 교회,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그리고 예원학교와 창덕여자중학교와 같은 역사가 있는 학교들, 곳곳에 남아있는 작은 역사적인 터들, 가장 대표적인 덕수궁 돌담길의 고즈넉함까지 작은 동네에 다양함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이렇게 정동은 다양함이 자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어지럽거나 북적이지 않고 나름의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곳으로 현재도 매력적인 공간이다. 본 공연은 정동을 그 배경으로 하면서 실제 공연이 진행되는 공간도 정동극장으로 그 상징성을 확대하며 관객들을 “1902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 세계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이 있던 곳, 정동으로 초대”하는 동시에 2018년의 정동에도 초대하였다.


정동길의 카페와 언제 걸어도 좋은 정동의 덕수궁 돌담길


손탁호텔은 외교 타운 정동의 폭풍의 눈이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친미친러파들의 사교모임의 장소로서, 고종을 궁 밖으로 탈출시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른바 정동파(정동구락부)들의 회합 장소로 유명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주권을 잃기 직전까지 빠르게 신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였으며, 조선의 중심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조선스럽지 않은 공간이기도 했다. 본 공연은 정동을 통해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그 시절과 사람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어떤 불안과 격랑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꿈꾸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자라나며, 작은 독립에 이르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총 6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신식 교육을 받고 신식 결혼을 올렸으나 이혼 후 손탁호텔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마리아, 고아 출신으로 친척의 빚 대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 호텔 여급으로 팔려온 호텔 메이드, 손탁 여사가 청계천 다리에서 데려온 호텔 벨보이, 창원 선비 집안의 자제로 조부의 심부름으로 한성에 올라온 손탁호텔의 장기 투숙객 삼시어른, 고종이 하사한 손탁호텔의 주인 손탁, 독립신문 탐방원 출신의 서정적인 자유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리고 조연으로는 스토리를 전개하는 장치로 정동길에서 560년을 산 터줏대감인 회화나무와 인물들을 관찰하며 재치 있는 말투로 스토리에 코믹한 요소를 더해 공연을 빈틈없이 채우는 잔챙이 구락부가 등장한다.


560여 년 전부터 살아온 회화나무의 정령이 이곳 정동에서, 116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손탁호텔의 오픈식부터 전별파티까지, 1900년대 초 정동거리는 저마다 다른 희망과 꿈, 불안을 갖고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청계천에서 손탁 여사에게 구제된 소년은 시간이 흘러 열두 살이 되고 어느덧 어엿한 호텔 벨보이로 성장한다. 1902년 10월, 손탁호텔의 확장 오픈식, 정동구락부의 유력 인사들은 호텔을 오가고 손탁은 시인을 기다린다. 상복을 입은 시인이 오픈식에서 축시를 읊고, 메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고 그걸 지켜보는 벨보이 역시 마음 아파한다. 한편, 마리아는 전과 같지 않은 시인의 모습에 실망한다. 호텔의 장기 투숙객인 ‘시골쥐’ 삼시어른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돌며 그들을 지켜본다.


1903년 6월 손탁호텔의 가장무도회, 시인은 마리아에게 춤을 청하며 마음을 고백하지만 마리아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다가오는 시인에게 더 이상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더욱 거리를 둔다. 한편, 메이드와 벨보이는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창문 너머로 구경하며 부러워하다가 호텔 뒷마당에서 춤추는 것을 따라 해 보며 즐거워한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손탁호텔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다. 1905년 손탁이 고향으로 휴가를 간 동안 을사늑약이 채결되고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이준이 순국하며, 급기야 고종이 강제 퇴위된다. 그동안 대한제국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일에 체념하고 술과 담배와 시만을 향유하며 실패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던 시인은 결국 모든 것을 이제 포기한다는 듯 미국으로 도피하지만 시인이 도미한 진짜 이유는 1908년 친일 스티븐스 저격 사건에 가담하기 위함이었다.


1909년 손탁의 전별파티, 손탁호텔은 이제 문을 닫게 된다. 시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마리아는 손탁의 지인이 세우는 새로운 호텔의 매니저로 가게 된다. 그동안 호텔 식당을 기웃거리며 요리에 관심을 보였던 벨보이는 손탁 여사의 양자로 입양되어 손탁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가 공부하게 되고, 메이드도 학교에 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본 공연은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있다기보다는 연대기별로 장면이 전환되며 각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성장과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있어 인물들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 사건들을 듣고 간접적으로 접하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교차한다. ‘희망 뒤의 불안’이라든지, ‘감히 희망할 수 없는 애틋한 희망’, 그리고 ‘희미하지만 진짜 존재하는 희망’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본 공연의 문화원형은 바로 ‘손탁호텔’이라는 역사적 건축물이자 유적(현재는 터만 남았지만)이다. 손탁호텔은 앞서 계속 언급되었듯이 그 자체로 시간적(1900년대 초, 개화기), 공간적(서구 문물이 빠르게 유입된 정동) 상징성이 강하다. 손탁호텔이라는 문화원형은 스토리의 배경적 요소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공연의 배경을 제한하고 그 안에서만 스토리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추적이고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손탁호텔과 현재의 손탁호텔 터(출처: 아틀라스뉴스)


본 공연은 문화콘텐츠로서 ‘오래된 참신함’을 보여준다. 손탁호텔이라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옛 건물 및 공간과, 약 100년 이상 이전인 역사적 배경으로 ‘오래된’ 원형이지만,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진 대상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의 대상에 가깝고, 역사적 사건이 아닌 그 속에 있을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어내어 역사만으로는 접하지 못한 새로운 ‘참신한’ 스토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 콘텐츠는 ‘낭독연극’이었다. 낭독연극이란, 특별한 무대 장치나 배우들의 의상 변화 없이 배우들이 대본을 낭독하며 연기하는 다시 말해 대본과 배우만 있으면 가능한 훨씬 ‘간단한’ 연극이다. 낭독연극을 좀 더 완성시키면 더 화려한 연극이 될 수도 있다. 본 공연을 보기 전에는 낭독연극인 점을 감안하여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간 것도 사실이다. 이전에도 낭독뮤지컬을 한 번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때는 나의 컨디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지루한 공연은 처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본 공연은 낭독 연극으로 충분했고 완전했다. 오히려 무대에서 ‘덜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장면을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으며 여느 공연에서도 받기 힘든 큰 감동을 받았다. 공연 내내 배우들과 함께 웃고 울었으며 막이 내린 후에는 공연의 인상과 감동에 대한 여운을 가득 안고 밖을 나왔다.


특별한 무대 장치나 배우들의 의상 변화 없이 배우들이 대본을 낭독하며 연기하는 낭독연극 (출처: 브릿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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