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들어갔다고 다는 아니에요
필자는 꽤 상위권 대학에서 학업코칭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코칭이란, 코치와 피코치가 동반자적 관계를 맺고, 피코치의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우며 궁극적으로 피코치의 성장을 돕는 과정이다(탁진국, 2019). 코칭은 스포츠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퍼져나갔으며, 대학 안으로도 들어와 '학업코칭(Academic Coaching)'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학업코칭은 피코치의 목적이 바로 '학업'이 되는 것이다. 좁게는 학점을 높이는 것에서 넓게는 대학 생활 전반을 잘하는 것, 또는 대학생으로서의 이 시기를 각자의 목표에 따라 잘 보내는 것이 목적이 된다.
학점을 반드시 4.5를 받고 싶어서 코칭실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도 있지만, 더 시급한 문제는 학사경고를 받고 대학생활에 위기를 맞은 학생들이다. 학사경고는 학교마다 그 기준이 다른데, 우리 대학 기준으로는 학점 1.75 미만의 학생이 학사경고를 받고, 3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받으면 제적(퇴학)을 당하게 되므로 학사경고는 꼭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밖에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그리고 이런 도움이 필요한 학사경고 학생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아니, 그 대학까지 간 친구들이 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아니잖아? 그런데 왜 학사경고를 받는 거야?" 하며 놀라곤 한다. 그리고 저번 학기 학사팀에서 전달받은 학사경고자 명단이 무려 1200명이 넘었다는 말을 해주면 더욱 놀란다. (사실 나도 처음 받아보고 놀라기는 했다. 사실 몇십 명 정도의 명단을 받게 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 놓고, 공부를 "못", 혹은 "안"하는 걸까?
첫째, 잘못된 전공(진로) 선택을 한 경우이다. 전공 선택을 잘못한 데에도 여러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의견이 전혀 없이 부모가 일방적으로 전공을 정해준 경우이고 또 하나는 막연한 환상만을 가지고 진로를 정한 경우이다. 학사경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실제로 다수의 학사경고 학생들은 입시 준비 시절 스스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거나 정보를 찾을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부모님의 의견을 따랐다고 이야기했다. 원서접수를 아예 부모님이 다 해버린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자신이 어디에 지원을 했는지를 시험을 보러 가서야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설령 스스로 진로를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대학에 진학해서 실제 공부하게 되는 내용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것을 경험하는 학생들도 있다. 어렴풋하고 부족한 정보들만 가지고 진로를 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전공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그동안 공부한 교과목을 바탕으로 이름만 보고 대충 예측해서 전공을 선택하곤 한다.
둘째, 스스로 자기 생활 및 시간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경우이다. 대학에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부모님과 학교가 자신의 스케줄을 모두 짜주고, 아침에 깨워주고, 차로 바래다주고, 밥때 밥 먹여주고 하니 스스로를 관리할 필요가 없이 주어지는 것만 수동적으로 하면 되었는데, 완전히 수동적인 삶을 살다가 갑자기 생활을 온전히 스스로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와 와서 부모님 집에서 나와 기숙사 생활이나 자취를 하는 경우 이런 경우들이 있는데, 이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맞춰 일어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 관리가 안 되니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셋째, 성격적 요인으로 학업이 어려운 경우이다. 이 유형의 학생들은 실제로 공부를 안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사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성격적 요인도 또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완벽주의이고, 또 하나는 고집스러움이다. 완벽주의적 성향의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100% 완벽하게 하지는 못한 경우 A+를 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아예 시험을 보러 가지를 않는다. 과제의 경우에도 과제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해 B를 받을 바에야 아예 제출을 안 해버린다. 이 학생들은 100점이 아닌 것은 모두 0점이라는 흑백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 공부를 잘 해온 학생들의 경우 자신이 그동안 고수해온 공부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방법을 고집하는 경로의존성에 빠지기도 한다. 그 방법을 통해 지금까지의 성과가 좋았기 때문에 더욱 벗어나기가 힘들고, 또 자신이 잘못된 방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다. 대학 공부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공부와는 다른 차원이다. 지식의 폭이 훨씬 방대하고 고등학교 때처럼 그것을 모두 달달 외워서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또 어떤 부분은 직관적으로,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타협하는 것이 필요한데,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교 적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넷째, 더 이상 공부를 해야 하는, 혹은 성적을 잘 받아야 하는 목적을 상실한 경우이다. 이 학생들은 명문대 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죽을힘을 다해 그 목표를 이루었다. 그런데 막상 그 목표를 이루고 나니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또한 어른들이 외적 동기를 너무 강하게 심어 주어 내적 동기가 고장 나버린 경우도 있다. 어릴 적 '공부를 잘한 것' 혹은 '시험 점수를 높게 받은 것'에 대해 부모님이 과도한 칭찬을 하거나, 과도하게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 아이의 목표는 그때부터 공부 자체가 아닌 부모님의 칭찬을 듣는 것, 혹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님의 최종 바람인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내적 동기가 고장 나버린 아이들에게 부모가 바라는 목표가 더 이상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다섯째, 번아웃이 온 학생들이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많이 힘들고 이미 다 지쳐있다. 그동안 분명 잘했었는데, 이제는 책상에 앉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나조차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나는 애초부터 공부와 맞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대학에 오면 좀 쉴 수 있다고, 대학 가면 좀 놀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다들 지치지도 않았는지 대학에 와서까지 무언가 계속 열심히 한다. 나는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대학에 와서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학생이라면 그나마 건강한 경우이다. 위기가 더 커지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누리고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길 바라고, 혹은 휴학을 하고 충분히 즐긴 후 공부할 준비가 되었을 때 돌아오는 건 어떤지 조심스레 제안해볼 뿐이다. 그래도 이 학생들도 인생의 어린 시기에 얼마나 압박을 받으며 압축적으로 에너지를 쏟았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그밖에도 다양한 이유와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소위 명문대를 입학해서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들이 학사경고를 받는 원인을 크게 다섯 가지로 유형화해보았다. 이렇게 학사경고를 받은 후에도 코칭이라는 툴을 통해, 또 개별 대학마다 마련된 여러 제도를 통해 사후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기는 하지만(교육심리학적 접근), 사실은 학생들이 대학에 이런 식으로 방치되지 않도록, 애초에 이런 일이 (적어도 이렇게 대대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도록 중고등학교 때부터 잘 채비시켰어야 했다(교육과정학적 접근). 결국 이런 학생들이 생기는 이유는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간의 괴리, 대학 입시와 고등교육 간의 괴리, 자기 관리를 연습하고 인생의 목적에 대한 고민하고 기회가 없던 사춘기 시절, 잘못된 공부방법과 그것이 먹혔던 학교 시험 때문인 것이다. 결국 대학생으로서, 성인으로서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그리고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채로 허울만 좋은 대학 캠퍼스에 내팽개쳐진 문제 많은 우리 교육의 희생자들이다.
혹여 학사경고를 받은 학생이 이 글을 본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을지와, 명문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핑크빛 인생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을 때 느꼈을 당혹감에 위로를 전합니다. 또 인생은 오묘하기에 젊은 날의 위기를 자신만의 소중한 스토리로 잘 풀어나가길 응원하며(자기소개서 쓸 때 딱히 위기가 없었던 인생 또한 풀어나가기 곤란하잖아요.) 후대는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앞으로의 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교수학습개발원(2019). 2019학년도 또래코치 양성 프로그램 개발보고서.
남상은(2016). 대학생 학사경고자를 위한 코칭 프로그램의 개발 및 적용에 관한 실행 연구. 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전호정(2017). 상위권 대학 학생들의 반복적 학사경고 경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탁진국(2019). 코칭심리학.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