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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05. 2024

어디에 살아야할까.

나의 옛집을 그리며.


어제는 치과에 가느라 옆동네 신도시에 다녀왔다. 이사온지 반년이 넘었지만,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잘 정비된 도시를 걸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하늘을 뚫을 듯한 아파트, 즐비한 상가. 나는 차를 타고 먼 길을 왔지만, 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몇 억이라는 돈을 지불해야만 가능할 아파트에서의 삶, 그런 삶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삶의 공간이 나와 아이들에게 최선일까.



사실 삶의 공간을 선택한다는 것이 내게는 낯설다. 성인이 되도록 나는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왔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ㅁ자 모양의 전통적인 가옥에서 중학생때까지 살았다. 건물 안팎에는 삶에 필요한 다양한 공간들이 있었다. 북쪽에는 거주공간, 서쪽에는 부엌, 동쪽과 동남쪽에는 돼지우리와 외양간, 서남쪽엔 물건을 저장해두었던 광이 있었다. 안뜰에는 이리저리 얽힌 포도나무가 평상위에 그늘을 드리웠고, 바깥뜰에는 사과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등 다양한 과일나무가 수확의 계절을 풍요롭게 했다. 안뜰과 마당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거나 누군가 돌아가시면 동네사람들과 친척들이 모여 북적북적 음식이 만들어지고 상이 차려지곤 했다. 어린시절의 내게는 그런 각각의 공간이 놀이터와 탐구의 장이 되고도 남았다. 할머니와 늘 함께 지냈던 나는, 공간만큼이나 삶의 방식도 할머니가 살았던 옛 시대의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던 장독대에 올라가 정안수를 떠놓고 치성을 들이던 모습, 누가 아프면 이불을 뒤집어 씌우고 복숭아나무로 툭툭 때리면서 귀신을 물리치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생활은 집에 국한되지 않고, 동네로 확장되었다. 흙먼지나는 마당에서 아이들이 모이기만 하면 다양한 놀이가 이루어졌고, 명절마다 틀별한 놀이와 행사가 우리의 삶을 채웠다. 성격이 좀 쭈뼛쭈뼛한 나였지만, 소외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가고 중학교를 가던 무렵, 동네에서는 사람들은 새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세월을 흔적을 담은 옛집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옛집에서 사는 것이 좀 뒤쳐진 것 같아 보였는지, 우리도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새로 집을 지어 옛집의 맞은편으로 이사를 간다. 나의 옛집은 허물어지고, 모르는 이가 터를 잡았다. 풍요의 상징이던 과일나무들이 모두 사라지고, 너무 커서 벨 수가 없었던지, 내가 사랑하던 커다란 밤나무만이 남아 그곳이 나의 옛집터였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집과 동시에 사람들과도 소원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형제들은 유산다툼이 시작됐고,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면서 명절에 오가는 일도 없어졌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동네를 시끄럽게 하던 놀이도 사라지고, 성인이 되어가던 아이들은 서서히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다.



새 집에서 지낸 것은 고작 몇년이다. 대학교에 가면서 나도 영영 집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집을 떠나고, 할머니가 큰아버지댁으로 떠나고, 내가 나의 고향을 떠나고. 모든 일은 내게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 것 같다. 인이 됨과 맞물린 이 일련의 일들은, 내게 성장한다는 것이 '상실'로 느껴지게 했다.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내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떠돌이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게. 대학교때부터는 삶의 터전에 관해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의 살게 되었다. 2년을 계약한 월셋집은, 계약이 끝날무렵 좀 더 나은 곳을 찾아 이사를 다니게 되었다. 옥탑에서 살다가, 너무 추워서 반지하게서 살다가, 어두운게 싫어서 다시 옥탑으로 갔다가. 어딘가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늘 떠나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게 됐고 나의 짐은 단촐했다. 어찌하여 정붙이고 살 곳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내게는 그게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집'이란 옛집과 같이 모든 공간과 사람을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방'만 존재하던 서울의 집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쉽게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삶의 패턴은 결혼하고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결혼 7년차에 벌써 이사를 다섯번이나 다녔다. 이런게 운명인지, 남편의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시아버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에 드물게 서울로 유학을 하셨던 시어머니는 자녀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을 서울의 강북으로, 강남으로 보내면서 교육을 시키셨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은 어릴적부터 옮겨다니며 살았던 게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여기저기 옮겨다닌다.



나의 아이들이 점점 커가고 초등학교 입학이 머지않은 미래로 다가오면서, 어디에 살아야할까라는 질문은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껏 내 편의를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옮겨다니던 삶을 그만두고 어딘가에 '정착'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린시절을 보낼 환경을 생각하니, 자연히 나는 내가 살았던 옛집, 동네가 떠올랐다. 나의 자유를 마음껏 펼치던 공간, 늘 공간속에 사람들 속에 품어져있을 수 있었던 곳. 그런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왔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도시에서 주는 편리함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원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전에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을 때처럼 저렴한 일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의 어떤 선택에 대해서 비용을 생각하고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내가 이렇게 어른의 세계에 들어왔구나 싶어 씁쓸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셋째를 임신하고, 괴산으로 갈 것을 정하고 그곳에 살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알아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괴산에는 임대할 주택이 별로 없었다. 시골이라 집값이 쌀것 같지만, 매물 자체가 적었다. 군청 근처에는 그나마 집을 구하는게 가능할테지만, 그외의 원하는 지역을 택해서 살 집을 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역 초등학교로 전학오는 가족을 위해 지역에서 임대하는 저렴한 주택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소멸되어가는 지역, 폐교위기에 놓인 초등학교 살리기에 일환으로 진행되는 사업이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이사고, 아기가 나오기 전에 가야하는 거라 여유있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정기모집기간은 아니었지만 한달에 두어번 임대주택의 추가모집이 있었고, 운좋게 그중에 한 집에 당첨되어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괴산으로의 이사는 결정되었고, 가능해졌다.



이로써 나의 아이들의 삶이 내 어린시절과 상당히 비슷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물론 비슷한 면도 많고, 다른 면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생활환경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생각은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내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나는 좋은 선택을 한 것일까, 아이들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괴산은 우리가 정착하기에 적합한 곳일까, 이번에는 '정착'하게 될까, 나는 평생 어딘가에 정착할 수 있을까. 물어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답 없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인 것일까. 어쩌면 떠나고자 했던 나의 마음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답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일까. 이번 이사를 계기로 나의 마음을 돌아보아야겠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삶의 터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눌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정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알아야하니까 말이다. 나는 어느 길이 좋은 길인지 말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길을 찾는 와중에 방황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그러다 새로운 길을 찾게 될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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