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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10. 2024

그들이 나를 구한 것은 동정, 선의, 인간됨에 기인했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나의 인생'을 읽으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나의 인생'의 독일어본을 이제 절반정도 읽었다. 이 글은 그 책을 읽는 와중의 기록 정도가 될 것 같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하고 책을 주문하였다. 내가 챙겨보는 독일의 독서토론 프로중의 하나인 '문학적 사중주(Das literarische Quartett)라는 프로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언급되었고, 유튜브로 찾아본 결과 그가 이전의 그 프로의 진행자였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는 것 정도를 추측하며 그의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책을 통해 알게된 그는, 독일에서 살았던 유대인이며 존경받는 독일문학평론가로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생이었던 그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12살무렵 독일로 이민해서 살았다. 그랬기에 그의 생애를 담은 이 책의 절반은 그가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이야기로 채워지는 것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야만의 공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던 무렵 학창시절을 보내고, 몇년뒤 유대인 거주지역인 바르샤바의 게토로 추방되고, 그곳에서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했던 그의 부모와는 달리, 극적으로 게토를 탈출해서 폴란드인의 도움으로 숨어지내며 그 암흑의 시대 속에서 생존했던 이야기 말이다.



그가 겪고, 보아온 것을 기록한 이 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을만큼 비현실적이다.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다고 할까. 그래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많이 접해봤었다. 기억나는 것은, 또 한명의 유대인이자, 역시 부모를 가스실에서 잃었다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라는 영화이다. 피아니스트가 폭격이 남긴 폐건물에서 배고픔을 견디며 전쟁이 끝날때까지 숨어서 생존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실존인물의 이야기로 기억하는 이 영화 또한 내게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라이히라니츠키의 경험과 글은 좀 더 다채롭다. 어느 상황에서도 그는 그가 사랑던 독일 문학과 음악으로의 연결고리를 찾고, 그것이 그가 처한 독일인으로부터의 죽음의 위협이라는 상황과 대비를 이룬다. 이 얼마나 기묘한 역설일까 싶다.



그가 그의 부모와 형을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잃었다고 들었다. 책에서 그 부분을 어떻게 언급할지 궁금했다. 2부의 뒷부분으로 갈무렵, 폴란드의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지내던 유대인들은 하루에 수천명씩 기차를 타고 트레블링카의 수용소로 옮겨진다. 아마도 그들은 그곳의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매일 독일군은 줄지어선 유대인 중에 살사람과 수용소로 갈 사람을 왼편과 오른편으로 구분하는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초반에는 살사람쪽으로 구분되었던 라이히라니츠키의 부모는, 나이때문에 나중에는 수용소로 갈 사람들로 분류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로 떠나고 남겨진 이들이 새로운 집을 배정받아 살게된다. 라이히라이츠키는 어느 부부가 살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게될 두 부부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그의 부모에 대한 것과 연결된다. 독일인들이 위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트레블링카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수감자들을 일을 시키기 전에 샤워를 하게했을 거라고 말한다. 아니면 샤워를 시킨다면서, 관에서는 물이 아니라 가스가 나오고, 수용소로 간 두 부부는 벌거벗은 나의 부모와 함께 샤워실과 비슷해보이는 그곳에서 죽어갔을거라고 언급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부모를 멀리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의 무력감을 그 어떤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정말 운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대로 당시에 게토에서 도망친 유대인이 살아남기가 정말 어려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젊고, 독일인들을 위해 번역일을 했던 작가는 그의 부모보다는 오랜기간 게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인은 모든 유대인을 말살하고자 했기에 결국에 그 또한 수용소로 향하는 행렬에 끼게 되었다. 마지막을 직감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 행렬에서 이탈해 도주를 시도하고, 그들중 상당수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에 죽었다고 한다. 작가와 그의 아내 토시아도 그렇게 도주를 시도하고, 다행히 총에 맞지 않고 그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게토에서 숨어지내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기에 그곳을 떠나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우연한 기회로 그는 큰 돈을 벌 수 있게 된다. 독일인들을 위해 일을 하던 그는, 그곳에서 매주 유대인이 독일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들은 독일인에 저항하는 유대인 지하조직은 그 돈을 가로챌 것을 계획하고 그 일은 성공한다. 그 일에 대한 보수로 그에게는 큰 돈이 생기는데, 그 돈으로 독일인을 매수해서 게토를 탈출하고자 한다. 결국 중간에 그 일을 주선한 사람이 돈을 가로채긴 했지만, 게토를 벗어나는 것은 성공했다고 한다.



게토를 나와서도 그와 그의 아내는 매일 죽음의 위협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이 유대인것을 알아차린 폴란드인들은 그들을 협박하고 돈이나 옷 등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돈이 다 털렸을 무렵, 처음엔 자신에게 돈을 훔쳤던 폴란드인은 그를, 유대인들을 숨겨줄 의향이 있다는 자신의 형에게 소개시켜준다. 가난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곳의 볼렉부부는 라이히라니츠키 부부를 숨겨주기로 한다. 그 상황을 들여다보면, 왜 당시에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을 숨겨주는 것이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언제 독일인이 들이닥쳐 유대인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그들을 총으로 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전쟁 중이었기에 자유롭게 경제활동이 불가능하던 당시에 독일인 인증을 받은 이들에게만 주어졌던 식량보급이 없이 살아야 했던 그들을 일상적으로 위협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그는 그때 이렇게 회상한다.



배고픔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고,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지속적인 굴욕감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볼렉의 집에서 숨어지내면서, 담배를 말아서 판매를 돕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일은 별로 큰 돈이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들은 굶주렸다. 굶주림에 지친 볼렉부부는  라이히라니츠키 부부를 포기하고 싶어하는 날도 있었다. 볼렉이 이 부부를 내보내려고 하면, 그의 부인이 그를 설득하고, 그의 부인이 그들을 내보내려고 하면 볼렉이 그의 부인을 설득하면서 그들은 겨우 그 집에서 계속 숨어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치 천일야화처럼, 라이히라니츠키가 매일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볼렉의 부인은 그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청하고 그날부터 라이히라이츠키는 자신이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재미있고 간략하게 변형해서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재밌어한 볼렉부부는 그들에게 빵이나 당근 같은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가 그의 삶을 연명할 수 있게 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 집에서 작가부부는 1년을 넘게 숨어지낸 것 같다. 종전에 가까워지고, 그들의 집근처에서 독일군과 러시아군이 대치하는 상황을 목격하기도 한다. 숨어지낸 기간동안 늘 독일인이 문을 두드리며 "여기 유대인이 숨어있나?"라고 물을 것을 두려워하던 그들은, 어느 날 러시아군이 문을 두드리며 "여기 독일인이 숨어있나?"라고 묻는 것에 놀라며 독일의 패배가 가까웠음을 직감한다.


그렇게 기적과도 같이 죽음의 시기를 견뎌낸 작가는 그 일을 회상하며, 어떻게 그 볼렉부부가 그들 자신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두 유대인을 숨겨줄 수 있었을지 자문한다.



우리는 볼렉과 그의 부인에게 우리가 전쟁이 끝나면, 우리가 이 집에서 살아남는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물질적인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 가족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그들의 딸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려고 뛰어든 그들의 위험에 적절히 보답하는 것이 말이다. 아니다, 볼렉과 그의 아내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야기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커다란, 이미 진부해진 단어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동정, 선의, 인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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