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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15. 2024

아이의 첫 사교육을 고민하며.

내가 책을 삶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이유.

나의 첫째 아이는 올해로 7살이 되었다. 내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 들어갈 날이 1년 밖에 남지 않았기에 올해는 최소한 한글이라도 떼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전까지 교재 몇권을 사다가 아이와 학습을 시도해봤는데, 완전히 백지상태인, 그리고 학습 습관이 전혀 안되어 있는 아이를 학원 강사였던 내가 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듯 지도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의 시도는 성과없이 끝났고, 나는 아직 딱히 급한 생각은 들지 않아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남편이 "00이 학습지라도 시켜보는건 어때?"라고 물었다. 남편은 이전에 자신은 학교 들어갈 때 한글을 모르고 입학을 했었고, 그로인해 느꼈던 수치심은 무엇보다도 큰 공부의 동기가 되어서 아주 빠른시간에 스스로 한글을 터득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한 바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공부에 대해서는 시키지 말자는 쪽이었던 남편이다. 그러던 남편이 학습지를 얘기하니 나는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라는 것은 다른 건 아니고, 첫째 아이는 문자에 관심이 많고 시키면 잘 따라올 거라는 것이다. 나는 학습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남편의 의견도 존중하기에 아이가 좋아한다면 시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한글을 떼줄 수 있을지 확신이 안서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학습지 몇 곳에 연락을 해서 상담을 받아보았다.



막상 통화를 해보니 그간 우려하던 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두군데 전화해서 상담을 받았는데, 두군데 다 패드를 이용한 학습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들어보면 납득할만한 것이었다. 패드를 이용해 학습을 하면 모든 학습의 과정이 선생님과 공유되어 선생님은 학생의 학습을 일거수일투족 관찰하고 관리할 수 있고, 또한 음성지원이 되기에 영어와 같은 언어학습의 경우 다각적인 학습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드를 터치해서 다루며 학습을 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이를 사용하지 않는 학습은 친환경적이기까지 하다. 상담해주신 분의 "이제 종이책은 전혀 필요하지 않아요."라는 말은 종이책을 통한 학습이 익숙한 나의 세대를 먼 구석기시대 인간쯤으로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한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패드를 통한 학습을 특히 나의 첫째아이는 너무도 좋아할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관심을 독차지할 것이고, 매일 패드를 붙들고 지낼 것이 눈에 선하다.



패드를 통한 교육의 거부감은 비단 미디어중독에 대한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사랑하며 크도록 하고 싶다. 더 나아가 책을 통해서 폭넓게 토론을 하고,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나아가도록 하고 싶다. 내가 교육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책, 토론, 글쓰기. 그런데 패드와 같은 기기를 통해 시각적인 미디어에 익숙해진다면 책과 가까워질 기회를 앗아갈 뿐아니라 아이들은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깊은 사고와는 다른 쪽으로 발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뇌의 발달면에서 본다면 발달이 아니라 퇴화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물론 전문가는 아니지만, 책에 집중하는 나의 사고와 핸드폰 영상에 집중하는 나의 사고를 비교해서 경험적으로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현재 초등학교에서는 1인당 패드 하나씩 쥐어주고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패드를 통한 시각적인 교육이 과연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나는 우려스럽다. 도시에서의 교육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과 멀다는 것이 내가 괴산으로 가고자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시골로 간다면 미디어에서 조금은 거리를 둔 삶을 좀 더 연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말이다. 사실 패드를 구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시골학교는 학생수가 적기 때문에 적은 예산을 들여 미디어기기를 구비해놓을 수 있고, 또 도시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최신기기를 구비해놓으려고 신경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렇지는 않기를 바랄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아이들에게 우려스러운 상황이 펼쳐진다면 차선책을 생각해야될지도 모를일이지만 그것은 차후에 생각해볼 것이다.



내가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책에 집착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사고력을 확장하고 문해력을 기르고자 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공부를 더욱더 잘하게'하기 위해서 강조되는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다른 이유로 아이들에게 책을 아이들의 삶의 중심에 놓이게 하고 싶은데, 바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방황하게 될 때, 책이 그 길을 찾는데 도움을 줄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지만, 소위 서울 강남에서 하는 것처럼, 남보다 앞서서, 남보다 많이 뭔가를 가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시골에서 태어나 사교육 없이 대학에 진학해서 무사히 교육을 마쳤기에 만약 공부의 목적이 좋은 대학에 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는 무관심이었는지, 나에 대한 믿음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간섭을 싫어해서였는지, 나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기에 나는 비교적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부모의 무관심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초중고 12년의 교육을 받으며, 그저 나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한다고 들었기에, 별다른 의문없이 내게 요구되는 공부를 하였다. 첫 수능은 만족스럽지 않아 재수를 했는데, 운좋게도 내가 이전에 생각해보지도 못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골에서 사교육없이 그리고 공부에 대한 큰 스트레스 없이 입시를 치른 것 치고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교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다양한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탐색하고,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그것은 또다른 경험으로 연결시켜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대학에 가기위해 공부를 하라고 해서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원없이 대학교 생활을 즐겼지만,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해서 월급을 많이주는 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할지,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 그런것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취미로 하던 사진을 쫓아보기도 하고, 사진을 하다가 유학을 가야하나 싶어서 독일어를 배워 독일 땅을 밟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먼 이국땅을 밟으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더욱 알수가 없어졌다. 결국 돈을 벌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단순한 삶을 위해 귀국하였고, 당시 당장 내가 시작할 수 있었던 학원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학원강사를 하면서도 나는 늘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되었고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삶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 대학교 졸업장이 무슨 의미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는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도 나처럼 방황하는 인간이었고, 그는 월급 잘 나오는 편한 일을, 그 일을 왜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며, 첫째 아이 출산 한달만에 그만둔 사람이다. 그뒤로 그는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가 결국 지금은 소위 '노가다'일을 하고 있다.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이 좋다며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 나와 남편의 사례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하고, 좋은 대학을 강조해봐야, 차라리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딱히 더 나은 결과에 도달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민하는 시간없이 좋은 대학만 강조한다면 우리들처럼 아이들도 긴 시간 방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내가 교육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교육을 하면 아이들이 방황할 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나는 그 해결책으로 책을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고민하는 인간이다. 아직도 내게 삶은 공허하고, 아이들이 없다면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를 고통스럽게 붙들고 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것은 평생을 골몰해야 풀릴까 말까한 철학적 차원의 질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내게 인생의 중요한 물음이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학교 교육을 받고, 학교를 다니며 막연한 언젠가로 생각했던  성인으로서의 나를 직접 살아오면서 느낀 경험을 통해서 나의 아이들에게는 나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좀 덜 방황하도록, 혹은 방황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중의 하나가 앞서 말했듯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책을 통해서 답을 찾아왔듯이 말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같이 느껴질수도 있겠다. 많은 시간 책에 의지했지만 나는 아직도 내 물음의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책과 가깝게 길러진다고 해도 내가 물었던 물음의 답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책을 고집하는 이유를 나는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나는 어린시절에는 책과 충분히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다. 만약 아주 어린시절부터 책과 가깝게 지내며 고민하고 토론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삶을 산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좀 다를거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내가 책을 통해서 '우리는 왜 사는가' 하는 거대한 절학적인 질문의 답을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그렇게 방황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으로 책의 의의는 충분할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커다란 철학적 화두에 몰두하느라 막상 학습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아마도 당분간 결정을 유보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어떤가, 아직 시간은 1년이나 남아있는데. 천천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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