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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Jan 22. 2024

책은 그의 고향, 나의 자유

내가 품은 가능성.

 독일의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어느덧 중반은 훌쩍 넘어, 5부중 4부에 도달했다. 4부는 1958년에서 1973년까지로 라이히라이츠키가 독일로 가서 거기서 문학비평가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시점인 것 같다. 독일에서 문학비평가로서의 삶이 4,5부로 나뉜 것은, 추측으로는 그가 초반에 시작할 무렵과 나중에 명성을 좀 쌓고나서의 시점을 구분하기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이제 첫번째 글을 읽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첫번째 글에서는 그가 작은 가방 하나 들고, 마치 짧은 여행가듯 폴란드를 떠나 독일에 도착해, 당장 돈도 없어서 먹고 살 일을 구하는 과정이 나온다. 폴란드는 자유가 억압된 나라였고, 그의 가족의 독일로의 이민이 허락되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라이히라니츠키 가족은 지인 모두에게 이민을 비밀로 하고, 떠날때도 작은 짐을 제외한 모든 살림살이는 그대로 놔둔채 떠났다고 한다. 그가 독일에서 폴란드로 추방당할때도 작은 가방에 독일어 책을 들었었고, 폴란드에서 독일로 도망치듯 떠날때도 마찬가지로 작은 가방에, 이번에는 그가 쓴 비평글들도 함께였지만, 독일어 책을 들고 떠났다고  한다. 이부분을 읽고, 그는 물론 사실을 전한 것이지만, 너무도 상징적이어서 놀랍다. 마치 무인도에 세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는가라는 질문의 답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가져갈지 생각해보게 되기는 하였다. 읽지 못했던 독일어 책을 가져가고 싶을까, 아니면 책 말고 다른 것을 가져가고 싶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사실 지금의 나의 삶으로 보면 가장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은 핸드폰일테지만 말이다. 가장 소중한 것으로 주저없이 무언가를 선택한 그가 부럽고, 그것으로 책을 고를 수 있었던 것이 더욱 부럽다.


이번 4부의 첫 글에서는 그가 일을 구하는 과정과 더불어 독일시민권을 취득하는 과정이 나온다. 3개월의 학생비자로 독일에 입국한 것이었기에 장기적으로 머무르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폴란드에서 핍박받는 지식인으로서 망명신청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려면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 폭로해야했기에 그 방법은 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는 어린시절 독일에 가족과 이민했었고, 폴란드로는 강제로 추방당했었던 것이기에 그 사실을 알리면서 독일에 시민권 신청을 하니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독일의 지인들은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그에게 애도를 표하며 그의 가족이 비자를 받게된 것을 기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부분은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는데, 아마 독일인들의 생각에서는 라이히라니츠키 가족이 폴란드라는 고국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를 택한다는 의미로서 애도를 표한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라이히라니츠키 가족이 그동안 얼마나 자유없는 억압된 삶에서 살았는지, 독일인들에겐 당연한, 제약없이 다른 나라를 오고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쁨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의 상황과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 '자유'에 대한 갈망과 그것이 주어졌을 때의 기쁨이 조금 이해가 간다. 나는 지금 누가 나를 감금한 것도 아니고, 결혼하고 엄마가 된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이만 나는 나의 집에 감금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딘가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다는 생각을 잊은지 오래다. 어린 아이들이라는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들이 있기에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이지만, 어찌됐든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다보니, 마치 서커스단에 속해서 어릴때부터 자유를 구속받고 나중에는 탈출할 힘이 있어도 무력하게 그곳에서 속박되어 사는 코끼리처럼, 나는 자유가 낯설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된 이후에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더 젊을 때도 늘 무언가에 구속되어 살았던 것 같은 답답함이 기억이 난다. 나는 무엇에 구속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제약하는 나의 마음이었다.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난 안될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이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나를 내 안에 구속하고 가둬놓았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책은 그런 나에게 자신이 걸어간 길을 보여주며 부족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리고 늘 상황은 거의 최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게 '괜찮다'고 '좀 더 자신에게 너그러워 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와 비교해서 나의 상황이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그뒤에도 반역자로 찍혀 하고싶은 일조차 마음대로 못하며 근근히 살아가야했지만, 결국 그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자신이 그리 원하던 독일문학비평가가 됐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이 나에게 있는가. 다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이지만, 그것도 그가 한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기'.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어찌보면 아주 단순한 활동이지만,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없이, 성과를 내야한다는 생각없이 하는 이러한 단순한 활동이 나를 지탱해준다.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는 귄터 그라스와의 대화를 언급하며 자신은 고국이라고 여기는 나라가 없음을 밝혔다. 독일은 자신을 추방했고, 자신의 부모와 형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한 나라이며, 폴란드는 그게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그를 독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고, 전쟁 이후에는 정비된 체계로 국민들의 삶을 평화롭게 보장해주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가적 민족정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가 택한 마음의 고향은 '문학'이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도 책에서 나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몸은 삶에 묶여 있지만, 나의 정신은 책 속에서 자유를 누릴 것이다.


4부 첫 편 글의 말미에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셀 토시아 부부는 지인은 물론 9살짜리 그들의 아들에게도 독일로 이민을 갈거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들은 먼저 떠난 아빠를 나중에 만나서 왜 자신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며 원망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자신에게 이야기해줬어도 비밀을 지켰을 거라면서, 미리 얘기해줬더라면 자신이 읽고 있던 '쿼바디스' 책을 챙겨올 수 있었을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날 당장 그는 아들에게 그 책을 사준다. 이 대목을 읽고, 또 하나의 나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며칠전부터 나의 첫째인 일곱살 딸아이는 전에 산 영어 전집에 딸려온 영어 파닉스 워크북을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고 혼자서 뭘 하길래 나의 관심이 닿지 않다가 어제에서야 세이펜을 꺼내줄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아이를 앉혀서 영어라던가 독일어, 하다못해 한글이라도 가르쳐주지는 않고 있지만, 나는 그 아이가 잘 해나갈 것을 안다. 내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 뒤로 부쩍, 첫째 아이도 그러한 책에의 몰입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의 나와 다르다. 이전의 홀홀단신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던, 고독하던, 그리고 내 안에 갇혀 있던 나와 말이다. 내 안에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나는 나의 아이들도 그런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길러낼 수 있다. 다가올 날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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