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고 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니그람 Jan 24. 2024

악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복수

우리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를 읽고

*스포일러 존재함.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덮고 이 책이 소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에 빠졌다. 입체적인 구성과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틱한 이 이야기를 나는 작가가 고심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철저히 조사한 끝에 조직해낸 소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실제로 작가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묘한 끌림의 표지의 여인은 책에도 수없이 등장한, 만나는 이들 모두 재능을 의심치 않았고, 나중에 뛰어난 작가가 될거라고 믿었으나 20대 초반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노에미 라비노비치'라는 사실도 책을 다 읽고 알게 되었다.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성해낸 이야기라고 해도, 책속의 이야기는 유대인 가족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로 충분히 나를 흔들어놓을 법 했다. 하지만, 정말 그 '노에미'가, '미리얌'이 실재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책속의 낱낱의 일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이, 책속의 지명, 등장인물들, 언급되었던 책, 연도 등 모든 것이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이 나의 폐부를 찌른다.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러하다. 2003년의 어느 날, 책의 화자인 '안'의 엄마 '렐리아'는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엽서를 받는다. 오래 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엽서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들은 렐리아의 조부모와 삼촌, 이모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에브라임, 엠마, 노에미, 자크'


발신인이 없이, 이미 세상을 떠난 렐리아의 엄마이자 에브라임과 엠마의 딸이며 가족중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미리얌 앞으로 온 엽서는 가족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지만, 누가 보낸 것인지 알 길이 없기에 그뒤로도 한동안 그 엽서는 잊힌다.


십년의 시간이 흐르고, 책의 화자이자 저자인 '안'은 임신을 하면서 엄마인 렐리아에게 그동안 궁금했으나 듣지 못했던 선대를 살아간 그녀의 가족의 이야기에 대해 묻는다. 책은 그렇게 엄마가 딸에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그 엽서를 보낸 것인지, 그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으로 구성된 이 책은 뛰어난 스릴러처럼 한번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다.


"러시아 소설이 다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엇갈린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된단다."


1부의 첫문장을 보면, 이 책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것 말고 많은 풍부한 것에 대해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는 러시아에서 시작된다. 라비노비치 가문은 러시아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다. 책의 초반을 읽다보면 '유대인' 가정이 어떠했는지, 어떤 문화를 갖고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를 너무도 잘 알 수 있다. 몇 천 년 전 유대민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의 이야기를 여전히 유월절 저녁에 읊고 있는 유대인들. 그들의 아픈 역사는 '어느 한때 그랬던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0세기에 들어서도 유대인 혐오 감정은 계속되고,  혐오로 인한 비극은 세대를 거쳐서 조부모 대에서도, 부모 대에서도, 자식들에게서도 일어나게 된다. 책의 초반에 놀랐던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홀로코스트가 나치에 의해 촉발된 그 시대만의 정치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나였다. 반유대주의는 비단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있었던 말하자면 흔한 정서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것에 대한 의문은 책을 읽고도 풀리지 않았기에 관련책을 좀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튼 엽서에 적힌 사람 중 에브라임의 부모는 유대인에게 점점 험학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신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갈거라며 자식들에게도 러시아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조언한다. 당시는 1920년대 무렵이다. 밝힌대로 에브라임의 부모는 러시아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고, 자식들은 뿔뿔히 흩어지지만 부모의 말대로 안전한 나라를 택하지 않았다. 에브라임과 엠마 부부는 팔레스타인에 머물렀었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생활이 아니기에 에브라임의 동생이 있던 프랑스로 이주한다. '미리얌, 노에미, 자크' 세명의 아이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에브라임, 엠마 부부는 그렇게 프랑스에서 2차 세계대전을 맞게되고,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다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가족중에 유일하게 큰딸인 미리얌은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게 되고 비극을 피할 수 있게 되는데, 그녀가 차 트렁크에 숨어서 검문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주하는 상황을 보면, 여기서도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게되는지는 순전히 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미리얌은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딸인 렐리아를 낳고, 렐리아가 다시 안을 낳으면서, 렐리아가 엄마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조사하고, 그것을 안과 공유하며 안이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만으로도 손을 놓을 수 없게 하지만, 책의 감동과 흡입력은 내용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책에 빠져들 수 밖에 없게 하는 구성, 앞서 말했듯이 인간사의 여러면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통찰, 번역문이지만,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의 아름다움 등이 그 어떤 책보다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여느 훌륭한 소설이라면 모두 갖고 있, 바로 그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다. 말하자면, 나치에 의해 희생된 가족이야기라는 특수성과, 가족사 혹은 인간사라는 보평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작가는 특수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무엇보다 아름답게 이끌어낸다. 책에서 내게 가장 와닿은 부분은 화자 '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인 '미리얌'과 '빈센트'의 엇나간 사랑이야기이다. 미리얌에게 결혼은, 결국 그것이, 그리고 남편의 가족이 그녀를 죽음의 위협속에서 구해내긴 했지만, 아름답고도 충동적인 남자에게 이끌려서 어떨결에 하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를 살리는데에는 적극적이었던 빈센트는, 막상 위험이 가라앉자 마음이 더 없이 멀어진다.


"위험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의 유일한 배경이었다. 빈센트는 그걸 좋아했다. 그에겐 그게 필요했다. 반대로 미리얌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농촌에서 맞이하게 된 단순하고 조용한 새 일상이 좋았다." (432쪽)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미리얌은, 살아있는 그를 볼 때마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보듯 바라보아야 했다." (432쪽)


"웃으며 즐거운 저녁을 보낸 뒤,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마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침대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함께 매일매일을 보내도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433쬭)


"그날 밤, 미리얌은 자신이 쓸모없는 육신을 짊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얌은 그녀에게 아무런 욕망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수수께끼의 남자를 세상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 아름답고 슬픈 남자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때론 아이처럼 순진하지만 번득이는 눈을 가진 남편이었다. 서로를 이어주는 반지 하나 만큼의 가냘프고 연약한 친밀함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그는 하루 종일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삶과 죽음을 맹세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었다."(435쪽)


이런 사랑을 알고 있기에 나는 이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미리얌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빈센트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자이자 손녀인 '안'은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할머니인 미리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빈센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할머니를 통해 파악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만난적도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에 대한 부분은 그를 똑 닮았다고 여겨지는 작가의 어머니를 통해서 추론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도 책에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대부분이 그녀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수많은 질문과 빈칸은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답은 책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뿐 아니라 책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관청의 공적인 기록, 날짜 같은 것에서도 도움을 받았지만, 살아간 집에 남긴 흔적, 사진, 살아남은 이웃들, 지인들의 이야기가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던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이 평생 겪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 그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교집합이 다른 이의 이야기의 퍼즐을 풀어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다. 너무도 많이 들어서 상투적이 되어버린 그 속담처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속에서 또하나의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자식에게 조상에 대해서 잘 알려주지 않으려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저자의 가족사에서와는 물론 다른 이유때문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나의 부모님 또한 내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거의 이야기해주지 않으신다. 분명히 그분들 세대는 일제시대며, 한국전쟁을 거쳐오셨을텐데,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과거는 그들의 머릿속에만 있다. 책속에서 화자인 '안'은 끊임없이 엄마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엄마의 고통을 들추어낸다. 화자의 엄마가 왜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려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고통과 더불어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참혹한 일의 피해자였던 것이 수치스러워할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수치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나의 부모님도 과거를 부끄러워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엮어 내야한다. 끊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연결시켜야한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에서 교집합을 찾아내어 비어있는 퍼즐을 채워야한다. 최근의 '파친고'의 이민진과 같은 한국 혹은 한국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퍼즐을 맞추려는 노력이 보여서 좋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위해 대단한 작가여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들은 것,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채워나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는 어떤 가족을 살해하고, 그들의 삶을 말살했다. 그것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구성해내는 것만큼 아름답고 강력한 복수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치는 유대인의 존재를 없애려고 했지만, 수많은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그들의 삶 자체로서 이야기를 남겼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책이 된 것이다. 듣는 것 만으로도 수많은 이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나치', 그에 반해 이 작가의 책은 읽음으로해서 그러한 악은 더이상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깨닫고 느끼고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책이 주는 무한한 감동이다. 책을 읽고 그것이 불러오는 마음의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행동하게 만들 것이다. 악에 대항하는 것은 또다른 악이 아니라, 그 정 반대의 것임을, 예술로서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가치임을 하나의 고귀한 문학작품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책은 그의 고향, 나의 자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