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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Dec 17. 2023

프로 포기러였던 나, 인생의 강적을 만나다 1

포기와 실패를 반복하던 내가 남편을 만나기까지

내가 어떻게 남편을 만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나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영화에서와 같은 달달한 사랑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힘을 합쳐 열심히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낸 모범적인 부부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 특이하게 만나 조금 특이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려고 한다. 


나는 그만두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원대한 이상에 비해 의지가 약한 사람이 쉽게 그만두는데, 그게 바로 나다. 나의 꿈은 참으로 원대했고, 그에 걸맞게 실행력도 있었으나, 안되겠다 싶은 순간 포기도 빨랐다. 그래서 내 삶엔 완벽한 실패 없이 적당한 포기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졸업을 하고 고전번역원에 다니며 계속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간 취미로 해오던 사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게 된다. 문화센터에서 지도해주셨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사진대학원에 들어가고, 사진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을 시작했다. 


스튜디오 일을 시작할무렵 내 머릿속의 나는 멋진 패션사진가였다. 사진 잡지에서도 가장 나를 매료시킨 것이 패션사진이었다. 옷에도, 꾸미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내가 패션사진이라니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내겐 그랬다. 인체와 옷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너무도 좋았다. 


나는 사진을 열심히는 찍었지만, 내가 예술가가 아니라는 것은 늘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사진을 잘 찍어본 적이 없었다. 사진 찍는 것이 좋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진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저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는 깨닫게 됐다, 사진을 하려면, 열심히 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을 잘 찍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좋아하기라도 했어야 했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을 1년정도 다니던 무렵 그만두었고,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내가 정신을 차렸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사진에 대한 미련은 끝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닌 이론적인 공부를 더 해볼까 싶었던 것이다. 내 꿈은 더 원대해지고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사진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맡은 것은 비교적 열심히 해내는 나는 1년동안 열심히 독일어를 배웠다. 사실 나의 독일유학에 대한 계획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막연했다. 사진을 배울 것인지 예술사를 배울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다. 목표는 그저 독일에 가는 것이었다. 


내 나이는 20대 후반이었고, 일찍 취업해 몇년간 직장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순식간에 거의 대부분 결혼을 했다. 나는 이야기거리가 없었다. 직장도 남자친구도 없었으며,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2011년 11월 1일 독일 땅을 밟았다. 


독일에서 당장의 당면과제는 대학교 입학을 위한 어학점수를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1년간 공부를 해왔기에 그건 내게 그리 어려운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평소 혼자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왔던 나인데, 정말 외국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경험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그때까지 한번도 혼자 여행을 해보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명확해진다. 나는 혼자인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나는 그 상황을 생각보다 빨리 타계했다. 독일에 가자마자, 사진 동호회에서 알게된 독일 유학준비생과 만날 수 있게된다. 의외로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다. 또 다시 나의 빠른 실행력이 발동된다.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까워지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사귀게 된다. 외롭던 유학생 두 명이 만나 가까워지는 일은 그리 생각하기 어려운 전개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독일어 성적을 걱정하기만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인지, 그간 알바를 해서 모은 200유로 가량 되는 돈을 학원이라도 다니라고 그에게 주었다. 예민하던 그에게 돈과 함께 나의 못마땅함까지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그뒤로 우리의 관계는 끝이었다. 


연애가 끝나던 시기와 맞물려 독일에서 내게 다른 것들도 포기와 실패로 돌아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식당에서는 한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좁은 주방에서 남자직원들과 엉덩이가 스쳐지나가며 일하는 환경이 나는 못마땅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신청한 시험준비수업 또한 몇번 나가고 그만두었다. 난청이라 사람들의 말을 잘 못알아듣겠다는게 내가 내세운 이유였지만, 사실 나는 주눅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말을 너무 잘 했던 것이다. 교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나를 너무 못마땅해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교사와 공부를 계속할 용기는 내게 없었다. 수업을 포기하고 나는 혼자 시험준비를 해서 결국 대학에 입학할 성적을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이미 내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커져갔다. 


한국으로 돌올 결심을 하는 것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7개월을 체류기간을 끝으로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유학을 내걸지 말고 그냥 여행으로 독일에 갔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원을 좀 다닌 것 말고는 지방의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당일 여행을 다녔으니까 말이다.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 학교에 입학해야한다는 부담 등이 나를 짓눌러서 독일의 생활이 전혀 즐겁지 않게 기억되었다. 부모에게 손을 벌려 외국까지 갔던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 젊은 날, 목적없이 그냥 즐겼어도 되지 않았을까? 유학생각을 하며 철없이 보내나, 여행으로 철없이 보내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을텐데 말이다. 


독일에서 돌아온 나는 취직을 계획했다. 당시 나의 자존감은 쪼그라들고 큰 욕심이 없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에, 고향집에서 가능한 직장을 얻어서 출퇴근하며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엄마의 바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내가 다른 지역에 살기를 바랐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나와 같이 살기가 싫다는 것인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멋있게 살으라는 것인지 말이다. 어쨌든 나는 엄마의 바람을 따라서 집을 떠난다. 집에서 멀리, 아주 멀리, 제주도로. 


또 다른 도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계속 무언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 인생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꺼리고 막연한 것을 쫓아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었다. 목적도 없고, 주인도 없는 내 인생은 정처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제주도에서는 돈을 벌어야했기에 시작했던 일이 베이비 스튜디오 일이었다. 이전에 일했던 곳들과는 달리 그곳은 일이 많았다. 월급도 120만원으로 전에 비해 두배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한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수시로 내 손목을 잡고 성추행을 하는 사장 때문에 계속 일할 수 없었다. 그간 일했던 돈을 받는 것도 술자리에 나오면 준다고 해서 원치않는 자리에 억지로 나가서 겨우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못했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내 자존감은 더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 생면부지의 이 땅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이 좋아 승마장의 일을 해볼까 찾아가보았는데,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한달에 두 번을 쉰다는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하고 나왔다. 그러다 생각해낸 일이 학원강사였다. 한문학과를 나오고 경험도 없는 나를 써줄지 알 수 없었지만 시도는 해봐야했다. 운좋게 새로 개원한 학원이라 학생들도 거의 없었던 원장은, 내가 뭐가 좋아보였는지 나를 채용했다. 사람을 홀려서 학생들이 불어나게 할 재능같은 것은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원장도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는 120만원을 받으며 주6일을 열심히 일했고, 그 생활에 큰 불만은 없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졸업이후 거의 다 깨먹어서 새로 공부해야했지만, 그것도 나름 재밌었다. 


이제껏 포기와 실패를 반복하던 내가 강사일을 하면서 목표한 것은 그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름 버틴다고 버텼는데, 2년이 지나자 섬생활이 차츰 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제주도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다른 학원에 취직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주 6일이었지만 월급은 훨씬 많았다. 그곳에서도 목표는 버티기였다. 원장은 나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를, 다른 여강사들은 못 마땅해했다. 은근히 나를 따돌리고, 대놓고 싫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따돌림의 주동자는 결국 얼마 못가서 짤리게 되는데, 문제는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도 짤렸다는 것이다. 학생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나는 다른 학원에 들어갔다. 월급은 다시 절반이 됐고, 주 3일만 일하게 됐다. 나는 겨우겨우 삶을 연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목표가 없었다. 미래도 없었고, 일도 즐겁지 않았다. 문득 나는 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살아야할까?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없는 내 삶의 논리적인 결론은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나는 죽고싶지 않았다. 한번도 제대로 꽃피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내 인생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 생각해내야 했다. 내가 그나마도 의미있는 존재가 될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죽기전에 반드시 하고싶은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때 떠오른 것이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무가치해보이는 나라는 존재가, 그래도 나의 아이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때 나의 나이는 35살이었다. 


문제는, 나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엄마가 되기 위해 아빠가 될 사람부터 찾아야했다. 그래서 역시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주변에 소개팅을 해줄만한 지인들을 찾아보았다. 평소 친구들과 연락을 잘 안하던 나는, 친구들에게 갑자기 소개팅을 부탁하기도 애매했다.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같이 일하는 학원 동료와 원장 뿐이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핸드폰을 열고 만남을 주선하는 앱을 설치하고 여러가지 프로필을 올렸다. 몇 가지가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틴더 뿐이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앱을 통한 만남은 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벼운 만남일뿐 결혼할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난 열린 마음으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다. 그러던 와중, 결혼을 하고자 하는 내 강렬한 의지가 신에게까지 닿았는지, 정말 신이 내린 것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틴더로 알게된 남성을 종로3가 지하철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설렘반 걱정반으로 계단을 올라오는데, 잘 생기고 키가 훤칠한 남자가 잘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처럼 조명은 그를 향해 집중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슬로우모션은 잔상을 남기며 그의 모습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곳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뿐이었고, 프로필 사진으로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바로 나를 기다린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저렇게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나를 만나려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정확히는 그의 외모에 첫눈에 반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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