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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그람 Dec 17. 2023

프로 포기러였던 나, 인생의 강적을 만나다 2

우리가 포기하지 않은 한가지

(1편에서 이어짐)

https://brunch.co.kr/@lanigram/7


종로3가 지하철 역 앞에서 그 남자를 처음 만나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는 그가 좀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특이함이었다. 그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게 '힛펌프' 얘기를 했다. 그것은 집을 난방하는 어떤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 같았다. 결혼 후 지금까지도 종종 하고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게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외에도 과학에 대한 얘기 내가 모르는 다른 기술에 대한 얘기를 끝없이 늘어놓았다. 그렇다. 그는 공돌이였던 것이다. 철저한 문과였던 나는 이제껏 영화나 음악,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어도 절반이상 모르는 얘기를 하는 공돌이는 처음이었다. 그외에도 그는 미국에서 유학을 했으며, 아이큐가 148이라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그냥 하는 허세는 아니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을 찾으면서 바란 조건 딱 두가지였는데, 바로 외모와 머리였다. 그는 그렇게 그 두가지 조건 내가 바란 것 이상으로 충족했다. 사실 결혼생활에서는,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는 외모가 밥 먹여주지도 않고, 좋은 머리가 내게 위안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허영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훗날 나의 이러한 선택은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된다.


 그가 외모가 출중하고 머리가 좋다는 것 이외에,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는 의외로 나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엄청 낭만적이고 그런 것은 할 줄 몰라도, 그는 나를 참 좋아했고, 그것은 여자에게 잘 들이대는 남자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에게 신뢰가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왜? 부족함 없어보이는 그가 왜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와의 첫 만남 이후, 연일 이어지던 긴 통화 끝에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그가 이혼남이라는 것이었다. 그말을 듣고보니 이해가 되었다. 실망감보다는 안도감이었다.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뭐하러 좋아하겠는가. 이혼이 죄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받고 힘들어했을 그가 나같은 사람을 택한다는 것은 납득이 될만했다.


한번 결혼을 해서인지, 그가 원하는 것은 결혼보다 가정이었다.  그는 나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다. 그러한 그의 바람은 나의 것과 일치했고, 그랬기에 일의 전개는 상당히 빨랐다. 만난지 한달만에 나는 임신을 한다. 바라던 바였지만 부모님께 알리는 것은 좀 걱정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하는 일이면 뭐든 반대는 안하는 분이어서 알겠다고 했지만, "축하해줘야하는 거니?"라는 애매한 말을 했다. 엄마가 아빠에게는 남편이 이혼한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해서 꽁꽁 숨기다가 결국 드러나는 바람에, 아빠에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엄마의 말을 듣지않고 바로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빠도 이해하셨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빠는 그리 오래 화를 내시진 않았다. 어쨌든 나는 임신을 했기에 일은 빨리 진행이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남편이 딱히 결혼식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집은 달랐다.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뿐이었고, 부모님은 그 자식을 식도 안올리고 가정을 꾸리게 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반대없이 따랐다. 결혼식을 하든 안하든 내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겉으로 좀 더 정상적으로 보이는게 나쁘지 않았다.


결혼식을 하면 큰돈이 깨진다고 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실제로 해보니 저렴하게도 가능하다. 부모님이 알아봐주신 예식장을 200만원이 안되는 금액으로 계약을 했다. 사진촬영과 드레스, 메이크업 등 식장에서 주선하는 곳으로 해결했고 큰돈이 들지 않았다. 하객들 식비가 있었지만, 알다시피 그 돈은 나중에 들어온 축의금으로 내고도 남을 돈이다.


꼭 그래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부모님은 배가 불러오기 전에 식을 치르기를 바랐다. 임신한게 죄인가? 부모님의 극성이 못마땅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엄마가 절에서 받아온 날짜 중에 예식장에서 가능한 날로 하루 빨리 날짜를 잡다보니 정해진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결혼식 날짜를 보고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10년만에 연락한 친구들, 지인들은 내 결혼소식에,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날 시간을 내서 기꺼이 참석해주었다. 대부분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생각해보면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여튼 그렇게 나는 무사히 결혼식을 치른다.


결혼식 외에 신혼준비에도 거의 돈을 들이지 않았다. 난 돈이 없기에 집장만도 하지 않았다. 내가 살던 보증금 500에 월세 35만원짜리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원룸이기에 살림을 들일 곳도 없지만 살돈도 없었다. 당연한 귀결로 신혼여행도 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알게된 것인데, 나도 땡전한푼 없었지만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부동산 투자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잘못된 투자로 다 잃었고, 목재사업을 하려고 기계도 많이 구입했지만 그일도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을 하나 둘 알아갈 무렵 내게 불길함이 엄습했지만, 애써 나는 당장에 닥친 것에 집중하며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데 신경썼다.


그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30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며 시댁에서 근근히 살아오던 그는, 결혼과 함께 서울에서 그 두배의 월급을 주는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은 그에게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직을 하고 반년쯤 뒤에,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딱 한달이 되었을 때, 그는 일을 그만 둔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가 운도 좋았다는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 그는 간간히 번역일 등을 하면서 생활비가 필요할 때 돈을 마련해주었다. 일도 없을 때면 어디선가 한달 생활비만큼의 꽁돈이 들어왔다. 이를테면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퇴직금을 준다던가 하는 것으로 말이다.


정해진 직장은 없어서 늘 근근히 살아야했지만 그는 성실했다. 일을 그만둔 뒤에는 어떻게든 생활비를 마련했다. 번역을 하지 않을 때는,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쿠팡의 택배알바를 했고, 이츠를 뛰었다. 그가 성실히만 살았더라면 우리에게 경제적인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저지르기를 잘했으며, 그 배포는 상당히 컸다. 나보다 상당히 큰 돈을 만져보았던 그는 저지르는 데 들어가는 돈의 규모도 컸다. 아이가 태어나고 반년쯤 지나서 그는, 그때 많이 꽂혀있던 전기차를 중고로 천만원 정도에 샀다. 그가 좀 더 철두철미했더라면 그때 돈은 좀 썼을 뿐, 전기차가 그리 우리에게 짐이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산 차는 완충에 5-6시간이 걸리고, 그래봐야 100키로 남짓 갈 수 있는 구형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쓸 수는 있었을텐데, 배달일로 피로하던 그는 졸음운전으로 접촉사고를 내게 되고, 오랜 시간이 걸려 그가 겨우겨우 혼자서 수리를 했던 그 차는 결국 정기적으로 받는 자동차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한다.


그가 머리가 좋다는 것은 가끔 비상한 잔머리로 우회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그때 탈만은 했던 전기차를 수리하지는 않고, 차라리 벌금을 택한다. 벌금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수리비보다는 적을 거라는 이유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벌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벌금은 40만원이 나왔으나, 그의 말로는 벌금은 아무리 높아져봐야 은행이자정도로밖에 불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4년이 지난 지금 벌금은 아직도 40만원대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같은 사람이라면 돈을 적게 낼지를 떠나서 벌금이 나온다는 찜찜함에 차를 수리해서 다시 자동차검사를 받으러 갔겠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이문제에서 차를 고치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차는 굴러가지만, 100키로밖에 가지 못하는 차를 주력으로 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차는 시댁 근처 어딘가에 쳐박혀 있고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잊혀져간다.


여튼 큰 돈 들여서 샀던 전기차가 애물단지가 되었는데, 다음에 있을 일들은 전기차문제는 애교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장작사업을 한다고 500만원 가량 하는 장작기계를 구입한다. 중국에서 기계를 수입했는데, 그런 것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엄밀히 사업을 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잘은 사용하던 장작기계는 무슨 이유인지 불타버리고, 같은 기계를 한 번 더 구입한다. 그 기계를 쓰다가 손가락 하나가 아작나는 바람에 수술을 받고, 손가락을 절단할 위기에서 다행히 잘 아물어서 손가락을 살릴 수 있었던 일도 있었다.


장작기계 이후에는 중국에서 좀 더 비싼 숯기계를 수입한다. 남편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을 몰랐더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됐다. 장작기계로도 숯기계로도 하려던 일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은 사전에 준비를 그리 철저하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성실했다. 늘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다주었다. 첫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남편은 직장과 지역을 참으로 많이도 옮겨다녔다. 첫직장을 그만두고 얼마 뒤에 친구의 소개로 직장을 잡은 곳이 충북 음성이었다. 아기를 데리고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은 집을 겨우겨우 정리하고 음성으로 내려간다. 남편은 돈벌이의 압박에 시달렸다. 생활비 이외에도 전에 구입했던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도 꽤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동산이라고 함은, 돌아가신 아버님께 물려받은 산의 바로 옆에 붙어있던 산이었다. 다시말하면 수익이 나오지 않는 부동산이었다. 여튼 돈이 더 필요했던 남편은 투잡을 한다. 음성에서 직장을 다니며 틈만나면 서울에서 쿠팡알바를 뛰었다. 잘 곳이 없어서 노숙자처럼 차에서 먹고자고 했다한다. 그러니 당연히 직장에서는 피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하던 중간에 집에 와서 자기도 하고, 직장에서 졸기도 하던 그는, 일한지 얼마 되지않아 직장에서 짤리게 된다.


음성에 있던 직장에 짤리던 그는 다시 서울로 가서 쿠팡일을 한다. 이번엔 쿠팡기사로 정규직으로 들어간것이다. 나는 다시 서울로 가야했다. 그 무렵은 내가 둘째를 낳은지 얼마 안되어서 였다.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한다. 여태까지 월세집을 전전하던 우리는 신혼부부전세임대라는 제도를 알게되고, 없는 돈으로 서울에서 13편짜리 투룸에 전세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 둘과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서 사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이런저런 것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5층이라는 것과 집이 좀 좁다는 것 말고는 불만이 없었다. 우리에겐 편안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쿠팡에서 남편은 역시 열심히 일했다. 월급도 잘 나오고, 그 전까지와는 달리 주5일이었으며 복지도 꽤 괜찮았다. 무엇보다 남편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그전까지 곧잘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지역에서 일을 했었기에 남편을 매일 볼 수 있는게 드문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잠시, 좋은 복지제도를 이용해 남편은 육아휴직을 받게 되는데, 보라는 애는 안보고 남편은 또 다른 지역으로 가 다른 일을 시작한다.


이쯤되니 나는, 이사람은 나와 같이 사는게 싫은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옮겨다닐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여기저기 남편을 따라다니던 나는 분노가 차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중간중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화는 아이들에게 향했고 별것도 아닌 일에 나의 화는 샤우팅으로 터져나오곤 했다. 산후우울증같기도 했지만 그건 좀 달랐다. 그건 분노였다. 나는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그 상황에서 도저히 도망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되는 것도 아내가 되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그저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에게로 돌아가겠는가. 어린 아이들을 어디에 맡기고 내가 생활비를 벌어올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 뿐이었다. 남편은 강적이었다. 나를 아마추어로 만드는 프로 포기러였고, 늘 어딘가로 쉽게 도망을 가던 나던 나를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덫으로,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고, 그것을 견디게 만들었다. 남편이 수없이 포기하고 실패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그런 남편과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어쩔수 없이 나는 견뎠다. 이를 갈고 버텼다. 아이들이 크고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근근히 살아가던 우리의 상황은 차츰 나아진다. 아이들은 조금씩 커가고, 남편은 그만두지 않고 정붙이고 해낼 일을 찾게 되는데, 바로 노가다다. 여기서도 남편의 비상함이 발휘된다. 처음엔 일용직으로 일하던 남편은 일을 잘해서 전문으로 장비를 설치하는 팀에 들어간다. 열심히 일했지만, 팀장이 잠적하면서 한달치 월급을 떼이게 되고, 남편은 같이 돈을 떼인 사람들을 모아서 팀장일을 맡아서 하게 된다. 그리고 곧 사업자를 만들어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일은 많았지만 마냥 잘 풀리지는 않았다. 후불로 돈을 받기에 초반 한두달에는 고용한 사람들의 일당 등으로 몇 천이라는 큰 돈이 필요했다. 매형에게 돈을 꾸어 겨우 일을 할 수 있었던 남편은, 얼마 뒤에 또 일한 돈을 못받는 일이 생긴다. 처음에 일용직으로서는 몇 백이었지만,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을 하게 됐을 때 그 돈은 몇천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 상황을 잘 견뎠고, 그 뒤로 돈을 떼먹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남편은 직장을 옮기는 대신 지역을 옮겨가며 일을 한다. 그것도 집에서 한두시간 걸리는 정도가 아니라 전국구다. 집은 경기북부인 그는 서울, 충북, 경북, 심지어 울릉도에서도 일한다. 일을 원하는 곳에서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보니 한 달에 집에 오는 일은 한두번 정도이다. 잘 못 만나다보니 싸울일도 없고 우리 사이는 더 애틋해지는 것 같다. 결혼 초반에는 육아와 집안일에도 무심하고 공감능력도 떨어지는 그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늘 성실했고 내게 가정을 돌보고 엄마가 되는 것 이외에는 바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에 대한 마음이 늘 한결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원래도 잘 안꾸미던 나였지만 더욱더 자기관리와는 먼 삶을 살았다. 임신을 할때면 70키로 넘게 살이 쪘고, 나는 거울을 보기 싫을 정도로 내모습이 싫어질 때도 많았지만, 남편은 어느 때나 한결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언제까지나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게 나를 붙잡았던 가장 단단한 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남편도 나도 잘 그만두는 프로 포기러였다. 그런 우리가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남들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출발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가지를 해냈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별로 이룬 것도 없고, 겉으로 보기엔 초라하지만, 우리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앞으로 세상속으로 나아가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음의 증거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때로는 우리처럼 도전하면서 또 실패하면서, 포기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그런게 인생인 것을. 그리고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내가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아님을. 나도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앞으로 내 인생의 빈 페이지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게 될까.


어느덧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 우리의 6년의 견딤을 기념하는 날. 언젠가 우리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날, 남편과 못해본 신혼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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