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 해변 옆으로는 스노쿨링 장비를 대여해주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5000원 남짓한 비용을 내면 하루 종일 빌릴 수 있는데, 매일 같이 스노쿨링을 할 계획이라면 여행 전 장비를 직접 챙겨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수영장에서 사용하는 작은 수경을 갖고 왔다가 시야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업체에서 스노쿨링 장비를 빌렸다. 오리발까지 덩달아 빌렸는데 오리발이 오히려 물속에서 버둥대는데 한몫하길래 해변가에 던져두고 맨발로 수영했더니 그게 훨씬 나았다.
가까운 해변 몇몇 포인트는 스노쿨링을 하기 아주 좋다. 오전 중 해가 아직 남쪽에 떠 있을 때는 적당히 물이 차올라 아주 가까운 바다에서도 열대어들을 볼 수 있다. 해변가의 스노쿨링은 아쿠아리움을 방문한 느낌이다. 마치 커다란 어항 안에 바다생물들이 나와 함께 담겨있는 듯하다. 이끼가 끼어있는 산호와 바위 사이로 형형색색 줄무늬가 눈에 쏙 들어오는 어여쁜 물고기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푸른 물속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물고기를 숨어서 지켜보다 그들을 훼방 놓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쫓기기도 한다. 짓궂게 장난을 치며 가까이 다가갔다가 정면으로 부닥쳐오는 열대어의 당돌함에 되려 깜짝 놀라서 도망치기도 한다. 바다 속으로 햇살이 비치면 물고기들은 한껏 더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 환한 햇살이 물속에서도 흐릿함없이 눈에 차오르고, 모든 생물들은 마치 조명을 받은 것처럼 춤을 춘다. 비록 얕을지언정‘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어느 날은 욕심을 부려 스노쿨링을 하러 먼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보았다. 사실 스노쿨링 보트 투어는 길리 여행의 필수 코스인데 해변가에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필요성을 못 느끼던 중 다른 여행자의 강력 추천을 받아 투어 일정을 잡았다. 오전에는 다수인원, 오후에는 소수 인원으로 구성하여 투어를 떠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오전 투어를 선택하였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약 40명에 달하는 인원이 같은 배를 타고 출항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신혼여행을 온 외국인 커플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함께 투어를 떠난 배가 일곱 척 가까이 되어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스노쿨링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물고기 구경인지 해마처럼 수직으로 떠다니는 사람들 구경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던 관광객들만 기억에 남았다.
스노쿨링 투어 장소였던 길리 메노섬 바다에는 사람형상을 한 웅장한 돌조각이 바닷속에 감춰져 있다. 옛사람들이 그곳에 직접 만들어 세워둔 것인지 아니면 운반 도중 어떤 이유에서가라앉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꽤나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돌조각상들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서 있기에 매우 신비롭게 느껴진다. 꼭 <모아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을까. 깊은 바다의 푸른빛과 회색 돌조각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정은 처음에는 신비였지만 이내 공포로 바뀌었다. 햇살은 여전히 비치고, 주변에는 물고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나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은 조각상을 보러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데, 나는 첫 잠수 이후 더 이상 얼굴을 바다 안에 들이밀지 못했다. 물이 무섭고 수영을 못해서가 아니었다. 잿빛 유물과 검푸른 바다색.. 그것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학창시절 지리 시간, 일본 앞바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너무 깊고 깊어서 정말 세계에서 최고로 깊은 골짜기가 바닷속에 잠겨있다고 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곳... 그때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마리아나 해구에 빠지면? 아니면 누군가가 해저 탐사를 하러 마리아나 해구에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면? 진심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괴물이나 귀신이 나오는 괴담보다 더 공포스러운 이야기였다. 그 순간 느꼈던 오싹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이야기란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되었다. 가끔 달력에 걸린 풍경 사진이 검푸른 바다를 담고 있으면 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멍이 든 것 같은 푸른색은 나에게 너무나도 무서운 색깔이었다.
해변가에서 에머랄드 바다를 누리며 즐겁게 스노쿨링을 했기에 투어에서 만난 이 짙푸른 바다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물속에 갑자기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배를 타고 먼 곳까지 나온 수고를 생각하면 물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속 수면 위로 고개를 띄우고 발만 동동거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어깨가 떨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보트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내가 타고 온 보트를 찾기가 힘들었다. 바다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줄어들고 모두 배 위로 올라가는데 나 혼자 방향을 찾지 못해 계속 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배는 기적을 울리며 다음 장소로 떠나려고까지 했다. 나는 아직 배도 못찾고 바다에 남아있는데! 우리 배가 나를 버리고 가버릴까 두려워 일단 가장 가까운 보트에 죽자사자 올라타서 나를 00보트로 데려다 달라고 선원에게 사정을 했다. 매몰찬 선원은 몇 번 호루라기를 불고 신호를 보내더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보트를 가리키며 ‘너의 배이니 찾아가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기진맥진,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바다를 홀로 가로질러 내가 타고 온 보트에 겨우 도착했다.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출발 지연의 탓을 나에게 돌리며 나를 향해 다들 왜 이렇게 늦었냐는 눈빛을 쏘아주었다.
이후 아이르섬 터틀포인트에서 다시 한번 스노쿨링을 했지만 거북이만 조금 신기할 뿐 즐거움은 이미 가신 뒤였다. 중간에 내려준 휴식 장소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일정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일광욕을 한 것이 그나마 위로였다. 물 속 공포를 따가운 햇살이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수족관을 좋아하는 터라 스쿠버다이빙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이번 스노쿨링 투어를 통해 확실히 알았다. 나 같이 간이 작은 사람은 함부로 스쿠버다이빙을 했다간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아무리 바다가 신비롭고 멋져 보인다고 뭐든 무작정 덤벼서는 절대로 안된다. 바다는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어느 경우든지 안전이 최우선이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물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지더라도 반드시 멈추고 돌아와야 한다. 자연 앞에 인간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물론 나는 겸손을 넘어서 완전 새가슴인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