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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24. 2024

트람을 타고 1년 전으로.

그러다 너 미움 받아. 


어쩌다 이렇게, 오늘의 나

오늘의 나는 어쩌다 오늘의 내가 됐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 나는 지난 1년 간의 일기를 1년 후의 시점으로 써보기로 했다.그렇게 나는 과거의 나와 오늘 만나면서 곧 달라질 또 어쩌다의 나를 그려볼 수 있을 테다.


• 모든 글들은 찍은 사진들을 바탕으로 한다.

• 사진이 없을 경우 블로그, 메모, 모닝페이지 등 모든 것을 뒤져 정보를 찾아낸다.

• 그 무엇도 없을 경우, 전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거나 1년 후 오늘 시점의 글을 쓴다.






2024년 10월 24일, 목요일 @룩셈부르크 




트램을 타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갈 곳을 가다가 어젯밤의 대화가 내리 꽂혔다. 어제 나는 자기 전에 5월에 살았던 런던 집을 그리워했다. 유일한 취미였던 집 앞 슈퍼에서 장보기가 떠올랐다. Coop, Tesco, Waitrose 등등.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런던의 그곳이라고 일깨워주는 매대의 상품들. 우리 집 2층에 살고 있던 집주인 아저씨 부부가 떠오르게 하는 크림커스터드를 만나면, 우리가 비를 쫄딱 맞으며 파리에서 런던까지 6개의 트렁크를 힘들게 옮겨 처음 집에 도착하던 날 밤, 그들이 주방 위에 작은 편지와 함께 두었던 그 크림커스터드 비스킷이 떠올라 이사 온 날이 생각나고, 그들의 인심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먹고 싶어도 굳이 애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 비스킷을 떠올리면 나는 가슴이 쓰라리다.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에, 내가 그때의 내가 아니라는 것에,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아련함을 강화시킬 뿐인 생각들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 서글픈 마음을 껴안으려는 시도가 어찌나 내 오늘의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으로 나는 과거를 더 미친듯이 헤집으며 회상해서 흩어지는 기억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고, 또 어쨌거나 희석되어버린 추억을 지금만이 가능한 시점으로 재해석해서 상상만으로도 황홀경을 느끼는 일을 지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아침에 그냥 트램에서. 공증인을 만나고, 카드 결제가 되는 줄 알고 카드만 갖고 갔다가 현금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 트램 안에서 말이다. 귀찮아서 내일로 미루고 커피 한 잔 하겠다고 서점으로 들어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의 내가 과거를, 정확히 1년 전의 오늘을 회상해보겠다고 그러고 있다.





2023년 10월 24일, 화요일. @파리 @암스테르담 



공교롭다. 참으로 공교로운 시기다. 1년 전에 나는 파리에서 엄마와 이모와 이모부와 있었다. 우리 이모와 이모부는 처음 프랑스에 오는 거였다. 엄마는 아마 세 번째였을 것이다. 


이 날은 우리가 22일과 23일에, 프랑스 남부 보르도, 그러니까 내 파트너인 로망네 가족이 있는 집에 갔다가 파리로 올라와서 잔 날이다.


22일에 우리는 로망네 아빠네 집에 갔다. 그때 엄마와 이모와 이모부에게 로망 아버지는 남부 니스 전통 요리들을 맛보게 하고 싶어 했다. 로망 아빠는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프랑스 남자들 중 제일 프랑스인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최우선에 둔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첫자리에 둔다. 그에게는 와인이 중요하다. 와인 창고에, 4개가 넘는 선반에 와인이 꽉 들어차 있다. 그 옆에 2개 정도의 커다란 와인 냉장고 같은 곳에도 빽빽하다. 그 와인을 취하기 위해서 마시지 않는다. 맛을 보기 위해 마신다. 그는 내게 와인을 가르쳤다. 어떻게 흔들고, 어떻게 향을 맡고, 그런 소믈리에 학원에서 할 법한 그런 식의 접근법이 아니었다. 내게 와인을 따라주고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먼저 와인을 마시고 내가 따라 마실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어떤지 묻는다. 뭐가 뭔지 모르니까 나는 그저 와인이라고 하거나 맛있다고 하거나 달다고 한다. 그럼 로망 아빠는 “ah ouais? 아 그래?” 하고 웃는다. 되게 넉넉한 웃음을 느리고 오래 짓는다. 그 포인트에서 나는 그가 프랑스인 같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꽃, 오크통, 숯 등의 단어를 나열한다. 단어 나열의 순서가 중요하다. 그 순서대로 느꼈다는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와인을 마시면서 그 맛이 나는지, 아니면 내가 느끼는 맛이 그 단어에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또 다른 와인을 그렇게 받아서 마신다. 내가 그렇게 로망네 아빠와 와인을 통해 재미있는 소통을 하는 것을 우리 엄마가 바라본다. 엄마는 “아버지가 참 주당이시네. 너네 아빠는 소주밖에 몰라서 둘이 대화가 안 통할 듯”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소리 내어 킥킥 웃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게, 그 순간 우리 아빠가 와인 맛도 모르는 한국 아저씨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서, 한국인들이 마시는 소주는 보통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는 말에 놀라던 로망 아버지의 표정을 봤던 기억이 떠올라서, 소주가 뭐 어때서 하는 마음과 동시에 우리 아빠도 와인 이렇게 쉽게 많이 살 수 있는 곳에 있으면 무슨 향, 무슨 맛 등등 충분히 말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이러저러한 복잡한 마음에 엄마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코스로 밥을 먹는다. 천천히 길게 먹는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프랑스 문화를 사랑하고 배우고 발견하고 싶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좋은 자리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지극히 한국적인 우리 한국인 가족에게는 너무도 긴 식사 자리가, 또 맛있지만 낯선 음식이, 또 언어 장벽으로 가려져 있는 이 테이블이 편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가족들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경험한 로망네 가족 식사 자리에서는 대체로 음식이 나올 때 따로 누군가가 서브해주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가져가는 거다. 근데 내가 아는 우리 가족들은 보통 손님이 오면 더욱이 그가 편히 먹지 못할까 봐 그릇을 가져가 한껏 음식을 덜어주고 “부족하면 더 먹어라, 많으면 남겨라” 하고 말한다. 그걸 로망이 알고 있어서 자기네 가족들의 그릇은 건들지 않고 우리 가족들에게는 “이거 먹고 싶어요?” 하고 물으며 그릇에 음식을 덜어줬다. 그 모습에 로망의 엄마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로망 아빠도 그런 그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다행히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먹는 것 같았다. 특히 이모부가 걱정됐는데, 한국 남자 어른은 체면을 생각하곤 하니, 원하는 만큼 못 드실까 봐 미리 더 많이 챙겨드리고 싶었다.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다고 할 때, 그렇구나 하며 안도했다. 지금도 선명한 이모의 표정을 떠올린다. 이모가 배부르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모, 그만 먹어”라고 했다. 근데 이모는 “그래도 주신 건데 다 먹어야지”라고 해서 나는 “로망이 준 거니까 안 먹어도 돼. 남겨”라고 했다. 이모는 “요리하신 분의 성의가 있지” 하면서 끝까지 다 먹었다.


이모랑 그 전날 나는 얘기를 나눴었다. 이모가 말 중간중간 “너 그러면 미움받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에서 우리 이모가 얼마나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을까 상상하며 힘겹게 시집살이를 했다는 얘기도 떠올렸다. 배불러서 남기거나 부족해서 더 먹거나 뭘 해도 “미움”을 주곤 했던 (물론 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내 남편의 부모더라도 내 부모는 아닌 그들에게 뭘 해도 미움은 받겠지만 “덜” 받기 위해 자기를 얼마나 눌렀을까, 속상한 마음을 원래 그런 거라며 어른들을 공경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달랬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 말에 오기가 나서 이모한테 “그럼 나도 미움 줄 거야”라고 했더니 이모는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모한테, 우리 엄마의 언니니까, 같은 여자니까, 먼저 뭘 겪고 살아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미움을 주지 않고 이모한테 갈 미움마저 내가 다 먹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엄마한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르도에 대한 기억, 특히 프랑스 파트너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만나는 이 자리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소중하고 또 복잡해, 이 정도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차다. 하지만 아직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또 끄집어낼 수 있겠지.


24일, 그러니까 23일 밤에 파리로 돌아와서 하루 자고 24일 오전에 우리는 파리 시내를 살짝 돌아봤다. 이미 내 가족들이 파리에 온 지 거의 1주일이 되는 시점이긴 했기에, 그 말은 우리가 파리를 충분히 돌아봤다는 건데 파리는 워낙 보면 볼수록 볼 게 많은 곳이라 혹시라도 놓친 ‘전형적인’ 관광지가 있을까 싶어 돌아다녔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플로르와 카페 레 두 마고 앞에서 사진도 한 번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파리 북역으로 가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비가 왔고 추웠다. 기차에서 내려 우리는 곧장 호텔에 체크인을 했고 일본 라멘집에 가서 라멘을 먹었다. 따뜻했다. 이모가 추우니까 몸을 덥힐 수 있는 걸 먹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이모의 혈색이 한결 좋아진 것 같았다. 엄마도 배불리 먹었다.


날씨가 안 좋으니 뭘 해도 축축 처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파리에서 보르도로 갔다가, 그것도 아주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식사 자리를 3일간 여러 번 겪었기에 다들 좀 지쳐 있었다. 나는 나대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큼이나 조금씩 힘듦도 느껴져 지쳐 있었다.


호텔에 가서 쉬다가 엄마와 크게 싸웠다. 소리 지르고 싸우고 내가 울었다.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고 엄마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을 텐데, 원래 모녀는 그렇다. 엄마는 떨어져서 사는 딸에게 바라는 게 있었을 것이고, 내가 보여줬으면 하는 모습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이모와 이모부까지 왔으니, 내가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는 나대로 한다고 해도, 엄마가 그리는 모습이 있었을 거다.


앞의 맥락이 분명 있었지만, 고통스러워서 지금 글을 쓰면서도 심장이 뛰어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바로 떠오르는 건 “엄마는 비싼 돈 들여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마운 줄 모른다”고 했다는 것이고, 나는 “누가 오랬냐”고 응수했다. 엄마가 서운하다고 울었다. 나는 한다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부족한지, 늘 100에서 1이 부족하면 1에 집중하는 엄마. 우리 엄마는 저랬지, 내가 그래서 항상 엄마 옆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작아졌지, 하는 생각에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어했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쫓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엄마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도 싫었다. 그렇게 분노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외출해 시내를 구경했다.


암스테르담은 올해도 또 다녀왔다. 3년 사이에 1년에 한 번씩 갔던 곳이다. 유럽에서 내가 가장 자주 여행하러 가는 곳이 암스테르담이다. 매번 비가 오고 건물들이 기울어져 있고, 도심에 강이 흐르고 부딪히면 비명횡사할 것처럼 자전거들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런 곳에서 이모도, 엄마도, 피곤해서 호텔에서 쉬던 이모부를 제외하고, 그리고 나도 뭐 하나라도 더 봐보겠다고 걷고 또 걸었다. 비를 맞으면서, 줄 서서 남들이 사 먹던 감자튀김을 사 먹고,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겠다고 마트에 들러 우유를 사와서 마셨다.


아픈 기억마저도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그냥 내가 살아온 궤적의 한 점이 되어버려서, 그게 또 사라질까 봐 그 점을 그려낸 사람들은 결국 내 곁을 떠날 테니까, 그 점이라도 잘 간직해보려고 노력한다.


엄마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1년 사이에 이모는 아프던 무릎을 결국 수술했고, 일하는 걸 좋아하는 이모부는 그 연세에도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1년 후에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큰 쇼핑몰 안 서점, 그 안의 카페에서 이 글을 쓰며 옛 사진을 보며 글을 쓴다. 사실 정말 1년 만에 처음 보는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그냥 슬퍼져서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글을 쓰면서 다 적고 나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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