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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25. 2024

두통과 테오

동생이 있으니까 괜찮아. 


어쩌다 이렇게, 오늘의 나

오늘의 나는 어쩌다 오늘의 내가 됐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 나는 지난 1년 간의 일기를 1년 후의 시점으로 써보기로 했다.그렇게 나는 과거의 나와 오늘 만나면서 곧 달라질 또 어쩌다의 나를 그려볼 수 있을 테다.


• 모든 글들은 찍은 사진들을 바탕으로 한다.

• 사진이 없을 경우 블로그, 메모, 모닝페이지 등 모든 것을 뒤져 정보를 찾아낸다.

• 그 무엇도 없을 경우, 전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거나 1년 후 오늘 시점의 글을 쓴다.


2024년 10월 25일 금요일 @룩셈부르크 


어제 심한 두통에 죽을 뻔했다. 오바 몇 스푼 보태서 진짜 죽을 뻔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극심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로망이 한국에서 먹었던 치즈 돈까스를 그리워하는 기색이라 정신없이 돼지고기를 칼등으로 두드리고 유튜브에서 영상들을 찾아가며 제일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머리속에 넣고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기름을 잔뜩 부어 튀길 때도, 색이 먹음직스럽게 바뀌어가는 게 맘에 들어 홀로 웃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기름에서 주먹만 한 치즈돈까스 덩어리 세 개를 꺼내 키친타올 위에 올려놓고 인덕션을 끄자마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여기서도 오바 좀 보태면 쓰러졌다고 할 수 있겠다. 혹시 요리 때문인가? 충분히 환기를 안 시켰나? 생각하다가 공복 시간이 참으로 길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이 몸으로 돈까스를 맛깔나게 튀겨놨는데, 식기 전에 빨리 와서 치즈가 쭉 늘어날 때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그가 퇴근할 때까지 간신히 버텼다. 열이 펄펄 끓었다. 목을 조금이라도 가눌 수가 없고 이마와 눈까지 뜨끈한 게, 고통을 멈추기 위해 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는 누군가의 두통에 대한 처절한 후기가 떠올랐다. 아, 하필 진통제도 없었다. 그 많던 약 중에 진통제 한 알이 없었다. 약간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일부러 그 와중에 프랑스어 유튜브를 틀어놓고 들었다.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가, 총리였던 정치인이 자살한 사건에 대해 말한다. 미테랑 대통령인가? 이렇게 인가? 하면 안 되고 팩트 체크를 해야 하는데, 평소 같으면 하겠지만 오늘은 영 그럴 컨디션이 아니라서 그냥 앞으로 나갔다. 나는 그 총리의 사연을 들으면서,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정치계에서 강력한 성과를 냈고 결국 그로 인해 자살하게 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렸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였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인상 좋은 할아버지 같은 대통령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부모님 덕에 나도 덩달아 호감을 가진 정도였다. 어느 날 아침에, 자고 있던 나를 깨워서 엄마가 말을 건넸다. 학교 가야지, 일어나야지, 공부해야지, 밥 먹어야지 등등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어. 뛰어내렸대.” 이렇게 말했다. 세포 구석구석까지 서늘함을 느꼈다. 정치색을 떠나 어떤 사람의 죽음이, 매체를 가득 뒤덮은 죽음과 그에 대한 뜨거운 논쟁과 원색적인 폄훼와 비난과 맹목적인 추종과 인간적 도리 등이 뒤덮인 시끄럽고 고단한 그 반응들을 바라보며 나는 연신 “어떻게 사람이 똑같은 사람한테 저렇게, 어쩜 이게 가능하니,” 하며 불안해하는 엄마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나 생각했다.


내 파트너 로망이 퇴근하고 와서는 처음에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지, 그저 좀비처럼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웃어 넘겼는데 내가 진짜 아프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눈도 못 뜨고 말하자 약 상자를 한참 뒤지다가, 분명 내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또 안 듣고, 약을 사오겠다며 나갔다. 직장인들도 퇴근해서 집에 오는 시간이니 당연히 이곳의 많은 가게들도 때를 맞춰 문을 닫은 터라 집 근처의 약국에 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맸다고, 샀다고, 곧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돈까스가 다 식었는데, 빨리 와서 먹으라고 말하면서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하던 엄마에게 그만 좀 재촉하라고 소리 지르던 착한 척하는 마음과 다르게 괴팍한 본성이 튀어나오던 시절들을 겹쳐봤다. 파트너가 한아름 약을 사왔다. 약을 먹고 더 누워서 쉬었다. 그리고 좀 상태가 좋아졌다. 토할 것처럼 속이 안 좋고 몸이 아프더니, 절대 돈까스를 못 먹는다고 하던 내가, 기름 냄새 맡기도 싫다던 내가 머리가 식고 나자 식욕이 돌아 돈까스는 물론 밥도 고봉밥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기관 한국어 단체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약빨이 잘 들어서일까, 원래 9시, 정말 늦어도 11시면 자던 내가 새벽 3시에 간신히 눈을 붙였다. 머릿속이 어찌나 깨끗하고 명랑한지, 진정시키느라 결국 수면제를 먹어버렸다. 이런 때도 있다. 종종, 잠과 사투를 벌이고 몸과 사이가 나빠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럼 그 피해가 고스란히 다음 날의 내게 온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무조건 1시간이라도 더 자려고 애를 써보고, 그 선잠 때문에 오히려 더 피곤해진 몸으로 일어나 좋아하는 책과 룩셈부르크에서 크리스마스 때 마신다는 특별한… 그 우유를 마셨다. 일을 바쁘게 해치우고, 사실 이 외에 해야 할 것이 좀 더 있긴 한데도 글을 써야만 어제의 피로를 온몸으로 겪어낼 오늘의 내가 조금 덜 힘들 것 같아서, 숨통을 틔워주려고 글을 쓴다. 그러니까 숨이 쉬어진다.





2023년 10.25 수요일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에서 두 번째 날이었다. 아침부터 반 고흐 미술관에 갔다. 엄마가 반 고흐를 정말 좋아해서 꼭 보여줘야 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갔는데 반 고흐를 안 봤다면 조금 할 말이 없어지니까, 전날 기차에서 급하게 티켓 취소표를 잡아 예매했다.


나 역시 반 고흐를 좋아했다. 반 고흐가 죽은 날짜가 내가 태어난 날짜일 거다. 그래서 나는 나 홀로 내적 친밀감을, 남다를 거란 유대감을 나 홀로 간직해왔다.


엄마가 나란히 있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사진을 보면서, 나와 내 동생이라고 했다. 이 얘기는 참으로 오래전부터 우리 집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던 얘기다. 내가 시작한 건지, 엄마가 시작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20살 때, 대학생 때, 패션 디자인을 하겠다고 하다 영화과로 가서는 갑자기 금속 공예과로 갔을 때, 25살에 대학원을 수료하고 나서 작업실을 열고 개인전을 하거나 다양한 전시 활동을 하며 묵묵히 지원해주나 늘 못마땅해했던 아빠와 또 그 뒤에 숨은 엄마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는 부모님이 예술을 모른다고 불평했다. 예술은 물론 숭고하나 그 숭고함이 내게 가족이 갖는 의미보다는 덜해서, 가족들이 나의 현실에 걱정을 놓지 못하는 걸 보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도 좋으니까 계속 하긴 했는데 그럴 때마다 집에서 큰소리는 계속 났고, 동생은 눈치를 봤다.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 “공부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고흐와 테오의 이야기를 하면서, 고흐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지금 기억될 수 있는데는 동생 테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의 재정적 지원이, 또 테오와 테오 아내의 행보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며 동생이 꽤 어렸을 때부터 세뇌 아닌 세뇌를 시켰다. 동생은 장난스럽게 받아치긴 했지만 나름 스트레스가 됐었는지 대학 신입생일 때는 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울었다고, 엄마가 내게 전했었다. 근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래도 동생은 내가 전시를 하는 동안, 크리스마스 때 오프라인 핸드메이드 마켓 등에 참여를 하면 항상 같이 했다. 전시 디스플레이도 보조하고 같이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가고, 나 대신에 손님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하고, 가끔 헛소리와 개그를 하며 웃기기도 하고. 동생은 야무져서, 나보다 거의 10살이 어린데, 나는 오버를 잘 하니까 오버 2살 더 보태서 10살로 치고, 앞가림을 잘 한다. 돈 관리도 잘 한다. 그래서 수중에 돈이 있으면 몽땅 써버리는 나를 대신해 내가 프랑스에 온 처음 1년은 거의 매달 동생에게 생활비를 받아썼다. 내 돈인데, 동생에게 맡겨서, 내가 한 달간 얼마를 썼는지를 증명해내면 동생이 다음 달 생활비를 조절해서 줬다.


엄마는 반 고흐 미술관을 참으로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던 그림인 아몬드 나무 앞에서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림 보는 걸 좋아하는 건 내가 엄마를 닮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박물관 1층의 카페에 갔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데, 나는 그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가 맛없어서 된통 후회를 해놓고 올해 9월에 갔을 때도 똑같은 메뉴를 시켰다. 엄마는 이 카페에서 보낸 시간을 좋아했다. 박물관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이모도, 이모부도 음료를 하나씩 마셨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기념품 샵에 들러 사고 싶은 것들을 사왔다. 물론 우리 엄마가 제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제일 많이 사왔다. 그렇게 많이 샀으면서 올해 반 고흐 미술관에 갔을 때도 또 그렇게 뭘 많이 샀다. 여행지에서 돈 쓰는 재미가 엄마를 끊임없는 여행의 길로 부르는 것 같다.


비가 왔다. 지겹게도 비가 왔다. 비가 오는데도 걸었다. 풍경이 예쁘다고 해서 걸었다. 이모가 수술을 하면 걷기 힘드니까 지금 많이 걷고 싶다고 했다. 이모는 절뚝거리면서도 걸었다. 그런 이모 곁을 자전거가 살인적인 속도로 지나갈 때, 나는 욕을 했다. 그렇게 걸어 시내에 갔다. 시내에서 관광객들이 간다는 곳들은 다 갔다. 기념품 샵들도 돌고 치즈 가게도 갔다. 이모부는 숙소에 갔다. 엄마랑 이모랑 스트룹 와플을 먹으러 갔다. 엄마는 입에 초코를 묻히면서 먹었다. 이모가 엄마 입을 닦아줬다. 


나도 내 동생 테오가 생각났다. 엄마한테 가장 고마운 것, 살면서 가장 고마운 건 나를 낳아준 것보다 내 동생을 낳아준 거다. 한국판 테오, 우리 집 테오를 떠올리며 밤늦게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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