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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Nov 04. 2024

어느 한 애송이의 번아웃을 다스리는 방법


일단 나는 ‘번아웃’이라는 말을 정말 꺼려한다. 개인적으로 듣는 것도, 입에 담는 것조차 피한다. 그 단어는 내가 완전히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내 한계를 조절하지 못한 애송이 같은 느낌을 준다. 또 다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하나하나 말해보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 이 정도로 나는 번아웃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번아웃, 그게 뭔데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굳이 내가 ‘번아웃’이라고 이름 붙이진 않았지만, 누구나 봐도 일에 지쳐 있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사실, 번아웃 외에 그 상황을 설명할 다른 단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아마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일 거다.


최근에는 주변에 일이 정말 많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과감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편이라, 한 번이라도 생각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래서 그런지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끝이 없다. 아직은 젊고, 젊은 이의 패기가 부스터를 단 것처럼 느껴져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서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노를 내려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성이 감천이면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이번 주는 내가 일하는 기관의 오프라인 수업이 없다. 일종의 방학 같은 시간이다. 많지 않은 수업인데도 일주일을 쉰다고 하니 한껏 긴장하고 있던 몸이 늘어졌다. 게다가 일상에서는 전혀 안 하던 것들까지 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보상 심리가 들었다. 월요일부터 이런저런 외출 계획을 세우다가도 시간이 좀 지나니 흥미가 사라졌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기차를 탔다. 바로 지금.


번아웃의 영역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일부러 집을 나왔다. 도시락으로는 참치 주먹밥까지 준비했다. 룩셈부르크에 인접한 독일 소도시 트리어로 향한다. 기차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가 바로 글을 쓰는 일이라는 걸 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번아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사실, 요 며칠 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 서있다가 다행히 지금은 조금 기분이 나아진 거 같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묻는다면 뾰족하게 할 말은 없으나 구구절절 길게 설명한 일화는 하나 있다.


어제, 전 세계 한국어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 체류 경험 공모전이 마감됐다. 한 달이란 기간이 주어졌지만, 나는 공고를 약 일주일 전에야 발견했고, 우리 반 학생들에게 내용을 공유했다. 모른다면 몰랐을 일이다. 하지만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 중 한 명이라도 이 공모전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맡은 반 중 토픽 4급 정도 되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체류 경험이 있다.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건 몸소 한국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관심조차도 재능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학생들이 자극받고 흥미로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내 예상대로 공모전 내용을 전하자마자 두 명의 학생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각자 글을 썼고, 그 사이 나는 일주일 동안 세 번의 첨삭을 했다. 첨삭하면서 문법과 적확한 표현들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공모전 마감을 이틀 앞두고, 나는 학생들에게 접수 링크를 공유했지만, 그날도 그 다음날도 링크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후 가장 후회된 부분이 바로 여기인데, 학생들이 문제를 알리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해봤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감일이 되어 학생들이 제출했겠거니 하고 확인했으나, 그놈의 시차에 걸려 결과적으로 공모전 링크는 작동했지만 이미 접수가 닫혀버렸다.


그날 아침에 진짜 혼자 욕이 튀어나왔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리며 ‘오늘은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겠다’던 계획이 무색하게, 앉자마자 노트북을 당기다 그 잔을 쳐서 커피를 엎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학생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학생들은 오히려 자신들 때문에 내가 시간을 많이 쓰게 되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중 한 학생이 나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됐네요”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아무 것도 아닌 건 없다!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떠올렸다. 주최측에 이메일을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했다.


학생들에게는 메일을 보냈으니 일단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학생들은 그마저도 하지 말라며 더는 내 시간을 쓰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너무도 착한,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가는 학생들에게 임의로 상장을 만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공모전 접수가 안 된다면 그들의 노력을 칭찬하는 상장을 직접 만들어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저장을 누르고 나서 허무함이 몰려왔다. 학생들의 한국어 학습 여정에 기쁨을 더해주겠다고 했던 일로 인해 오히려 사기가 꺾여버렸을까봐 염려스러웠다.


오늘 아침, 주최측에서 연락이 왔다. 접수 문제를 참작해줬다. 학생들이 다른 방법으로 공모전 접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그 학생은 “기적 같아요”라며 기뻐했다. 주최측에 여러번 감사를 표했고, 학생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여러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침내 공모전 제출을 무사히 마쳤다. 참가 항목에 “우리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는 걸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알려준 건 나였고, 해낸 건 학생들이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도 우리였고, 그 노력을 품어준 건 주최측이었다. 전복될 뻔한 감정의 돛단배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노를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은 것 같아서, 나만 행복한 것도, 학생들만 행복한 것도 아닌, 이 일에 자발적으로 연루된 모든 이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서.


내가 좋아하는 고전 중 하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단순히 책 제목이 좋아서인데, 그 거창한 제목을 가끔 곱씹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도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 나는 이러한 경험으로 산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이런 경험으로.



한계를 직시하는 일



한국어 선생님으로 지내면서, 그 짧고도 긴 시간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때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더 잘해내고 싶은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을까 고민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과 그 마음을 받아준 주최측 덕분에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 한계를 넘는 일이 의미 없진 않았구나, 조금 더 노력하고 기다리면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는 작은 확신이 생겼다.


모든 일이 그렇다. 어떤 일을 계속 해내려면, 내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한계를 어떻게 확장할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게 내 한계가 더 멀어지면,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균형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은 한국어 선생님이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모젤 강가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책을 읽고,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집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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