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T가 쓴 과제를 요약하면서
카페에 생활기록부를 쓰러 왔다. 고등학교 생기부에서 가장 중요한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고교학점제가 학교에 들어오면서, 이제 모든 교과목의 생기부를 학기 단위로 작성해야 한다. 기한은 8월 말까지. 여름방학에 대부분 작성했지만 마무리 작업이 좀 남아있었다.
예전에 비해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 내 머리가 둔해진 것도 있지만, 작업을 하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현타'때문이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들 중 스스로 작성한 것을 도저히 찾아볼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려하게 작성된 글. 도저히 학생들이 참고할 수 없는 참고서적. GPT로 돌려서 1초만에 끌어낸 글이 분명한 이것들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끝없이 돌아보게 된다.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줄여서 '교세특')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고등학교 생기부의 성격과 문제를 모두 집약해서 보여주는 분야다. 교사는 모든 학생들의 교세특을 작성하도록 강제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활동한 내용을 요약해서 쓰라는 것이다. 내가 수업한 학생은 대략 180명 정도다. 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무얼 했는지, 일일이 파악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니, 나에게는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의 수행평가 내용을 가지고 교세특을 쓴다. 그래서 수행평가는 학생들에게 이중의 부담인 것이 사실이다. 성적에 들어가는 동시에 기록의 근거가 되니까.
그런데, 그 부담도 이제 아주 일부 학생들의 일이다. GPT가 1초만에 수행평가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GPT의 산출물(글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다.)을 보며 '강제된' 교세특을 써 내려가고 있자니 끝없이 현타가 반복된다. 교세특이 대입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기에 마음은 더 복잡하다. 이렇게 학생들이 1초 만에 교세특 기록을 얻어도 되는걸까. GPT이전에는 그래도 학생들이 수행평가를 '수행'하기라도 했다. 그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수행의 과정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제는 '산출물은 있되, 수행은 없는'시대가 됐다. 그런데 나는 그 빈껍데기의 수행을, 의미 있는 무언가로 탈바꿈시켜서 강제로 기록하는 중이다.
'생기부 마사지'라는 말이 있다. 학생들의 활동을 좀더 그럴듯 하게, 잘 된 것으로 포장하는 작업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사지'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허구에 다시 허구를 입히는, 말하자면 '메타 허구'랄까?
GPT가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이제 생활기록부라는 제도의 존재 의미를 다시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아직 정책 당국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생각도 없는 것같지만, 현장은 생기부의 무용함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조금씩 퍼지는 중이다.
시대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