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엄마는 바닷가 마을에서 언니를 낳았다. 매섭게 부는 바닷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 짜디짠 바닷물에 얼굴을 파묻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와 보니 자길 데리고 왔던 엄마는 온데간데없고 자기가 벗어두고 간 샌들만이 썰물에 따라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단다. 어린 시절의 나는 태어나서 바다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언니가 해주는 바다 이야기가 좋았다. 생각만큼 물이 차갑지는 않고 해수욕장이 아닌 이상 물놀이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많이 없으며 자기는 여름보단 겨울에 바다를 보러 가는 게 더 좋다는 말. 그 수많은 말을 들으며 모아진 두 다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담긴 마음이란 다양한 몸짓을 활용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언니의 손을 잡고 싶다는 바람.
대부분이 큰 불화 없이, 혹은 있더라도 원만하게 합의를 보며 잘 지냈지만, 그중에서도 나와 언니는 유별났다. 우리는 모두가 잠든 시간이면 몰래 보육원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랑 핫바를 사 먹기도 했고, 공원에 가서 무작정 산책을 하기도 했고, 남이 버리고 간 축구공을 주워 규칙도 모르는 축구를 하자고 공만 뻥뻥 차며 뛰기도 했다. 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언니는 흙과 핏물로 얼룩진 무릎을 자신의 옷소매로 감싸 지혈해 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날 일으켜 수돗가에 데려가 더러운 흙을 씻어주었다. 언니의 더러워진 소매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어둡고 튀지 않는 옷을 좋아했던 나와 달리 언니는 밝고 화려한 옷을 좋아했다. 여러 색이 뒤섞인 티셔츠에 분홍색 바지를 입고 검은색 별이 박힌 운동화를 자주 신던 언니. 그는 원장님 몰래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대부분 옷을 사는 데에 썼다. 난 나중에 패션 디자이너 할 거야. 예쁜 옷 만들어서 내가 입기도 하고, 너한테도 입혀주고. 모두가 자는 시간, 두 사람만이 딱 붙어 앉아서 나누던 꿈. 하고 싶은 게 없던 나는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언니의 눈이 참 빛난다고 생각했다. 그 눈동자가 품고 있는 건, 당찬 희망, 순수한 꿈, 애정을 품은 열정.
그건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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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책보다 드라마였고, 앉아서 쉬는 것보다는 나가서 노는 걸 좋아했다. 나는 완전히 반대였는데, 처음 보육원에 왔을 때부터 난 실내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다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 책만 읽는 나를 가장 먼저 신경 써준 건 언니였다.
“책이 그렇게 재밌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던 밝은 사람. 나는 당황하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지루하기만 하고 읽어도 무슨 재미인지 모르겠던데, 차라리 저녁에 하는 드라마가 더 재밌어. 요즘 애들이랑 맨날 그 드라마 얘기만 해. 너도 같이 보면 좋을 텐데. 시끄러운 걸 싫어했던 나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소리가 뻥뻥 터지는 걸 안 좋아했다. 단호히 거절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어차피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는 듯, 언니는 방금까지 뛰어놀아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내 옆에 앉았다. 고개를 숙여 내가 읽던 페이지 위에 얼굴을 들이민다.
가까이서 맡은 언니의 냄새는 봄꽃을 닮았다. 온통 땀범벅인데, 다른 애들이 풍기던 지린내가 나지 않았다. 체향이라는 건 그 사람의 내면을 따라가는 걸까.
“조그만 애가 동화책도 아니고, 되게 어려운 거 읽네?”
그때 내가 읽고 있던 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었다. 동화책 졸업할 나이는 이미 훌쩍 지났는데, 다른 애들보다 발육이 늦은 탓에 원래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인 모양이다. 나는 그걸 굳이 설명하고 싶진 않아서, 새침하게 고개를 언니에서 책으로 돌렸다.
“별로 안 어려워요. 재밌는데.”
“왜 존댓말 써? 편하게 말해. 언니 동생 하자.”
“… 나 몇 살인지 알아요?”
“그건 모르는데, 어쨌든 나보다 어리잖아.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다고 원장님이 그랬어.”
보육원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다 클 때까지 입양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언젠가 다가올 퇴소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니까. 근데 언니는 딱히 퇴소에 대한 걱정도, 불안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속이 곪아가는 걸 택한 건지. 나는 눈동자만 굴려 언니를 흘겼는데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언니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래서, 너 몇 살인데?”
“… 열두 살이요.”
“나는 열다섯 살.”
친하게 지내자, 꼬맹아. 그러면서 투박한 손길로 내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게 언니를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던 모양이다. 홀로 구석에 앉아 고독한 시간의 흐름이나 새고 있어야 했던 나를 햇빛이 비추는 곳으로 데려와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나는 어두운 구석에 홀로 앉아서는, 책 속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몰입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것처럼 굴었다. 사실 그건 절반 정도 연기를 한 거였다. 나도 햇빛을 동경했으니까. 햇살처럼 웃을 줄 아는 언니 같은 사람도, 동경하고 원했으니까.
언니는 보육원에서 인기가 많았다. 따르는 동생들도 많았고, 얼마 없는 동갑내기들도 언니와 고민을 나누는 걸 좋아했다. 나 여드름 또 났어, 이거 어떡하지?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는데 걔는 인기가 너무 많아. 요즘 살이 너무 쪘어. 나도 교복 치마 밑으로 가느다란 종아리가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언니는 마치 해결사처럼 맞춤 방안을 제시해 줬다. 조금만 더 익혔다가 짜면 되겠네. 걔가 인기 많은 게 뭐 어때서? 그만큼 좋은 애라는 거니까 믿고 들이대 봐. 우리 나이 때는 살 좀 쪄도 돼, 그거 다 키로 간댔어. 혼자서 무거운 바위처럼 끌어안고 있던 응어리도 언니에게 얘기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단 듯 사르르 풀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언니도 내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털어놓기를 바란 것 같았다. 언제나 묘한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날 보던 언니를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털어놓을 만한 고민이나 진심이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저 참고 누르는 게 익숙해진 건데.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 나갈 용기가 부족해서 친한 학교 친구가 없는 것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는 것도, 원장님이 귀여운 구석이 없는 나에게만 유난히 더 차가운 태도로 대하는 것도. 다 서러웠고, 날 힘들게 하던 것들인데, 당시의 나는 전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였다. 그런 나를 알아본 건지, 언니는 자기 전에 내 옆에 누워서 눈을 똘망똘망 뜬 채 물었다. 오늘은 하고 싶은 얘기 없어? 이거 얘기 안 하면 꿈에 나올 것 같은 그런 거. 내가 다 들어 줄게. 처음 몇 번은 진짜로 없다고 거절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언니가 이러다 나한테 질려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억지로 쥐어 짜냈다. 정확히는 쥐어 짜낸 척을 했다. 사실 말하고 싶었던 거면서. 나는 참 솔직하지 못한 아이였다. 언니는 언제나 내게 순수한 진심을 보여주었는데.
오늘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교과서 본문을 읽어 보라고 시켰는데, 다른 생각을 하느라 진도를 놓쳐서 어디를 읽어야 하는 건지 몰랐어. 그래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집중 안 한다고 날 혼냈어. 그때 너무 부끄러웠어. 영어 시간이 또 다가오는 게 두려워, 안 왔으면 좋겠어. 차라리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야.
고민 같은 거 없다고 했던 게 무색하게 나는 술술 잘도 떠들었다. 언니는 내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들어주었다. 그때쯤의 나는 자주 언니의 눈을 떠올렸다. 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종례 전 교실 청소를 할 때도, 보육원에 돌아와 읽다 만 책을 펼칠 때도. 짙게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상상했다. 보통의 사람보다 색소가 옅어 갈색빛을 띠는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그려보았다. 그 눈이 오롯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때는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것도 새로운 고민이라며 언니에게 상담했다.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다 보면 심장이 빨리 뛰어서 가슴께가 아프다고.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다고, 특히 갈색빛의 두 눈을.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내 말을 들은 언니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내 뺨을 쓰다듬기만 했다.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더 이상 언니에게 이런 종류의 고민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능적인 자각이 심장에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칭칭 쇠사슬에 감겨 있는 거 같은데 그런다고 해서 생명이 꺼지는 건 아니라, 언니를 볼 때마다 아프게 뛰는 건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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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자기가 죽는다면 부디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잿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자유로이 날아가고 싶다면서. 나는 그게 진심인 줄 몰랐다. 설령 반 정도는 진심으로 채워져 있어도 나머지 반은 현재의 우울감이 언니를 잡아먹고 있어서, 무심결에 나온 자살 사고 정도라고 생각했다. 언니를 내가 왜 태워. 우리 다음 달에 같이 제주도 여행 가기로 했잖아. 그때 언니의 눈은 어땠지. 힘없이 웃으며
“응, 그랬지….”
라고 대답하던 언니의 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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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휘날리는 하얀 잿가루는 언니가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던 부피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언니의 출생을 목도했을 바닷가로 갔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한적한 공간은 얼핏 서늘하기까지 해서 내 기분을 더 추락시켰다.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버린 언니의 마지막은 오롯이 내가 독점하고 싶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라 생전 맺고 지낸 인연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당연히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언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과장된 몸짓과 소리로 오열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허공을 부유하며 그토록 원하던 자유의 바다를 만끽하는 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를 떠나며 맛보는 자유의 맛은 어때. 혀가 아릴 만큼 달았으면 좋겠다. 그 넓은 마음에 나를 위한 공간마저도 남기지 말고, 단 1평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언니의 행복과 해방으로만 가득 채우기를, 그렇게 세상의 모든 걸 털어내고 날아가기를 바란다. 언니의 육체는 비로소 평안을 얻었으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의 계획을 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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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아파트의 복도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감지한 조명이 자동으로 켜졌다. 어두웠던 공간이 일순 눈부실 정도로 밝아져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위를 덮은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쓴 다음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발을 내디뎠다. 등 뒤로 낡은 엘리베이터가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문을 닫았다. 지금 시간은 오후 아홉 시 오십 이 분. 최근 일주일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앞으로 구 분 삼십 초 뒤에 저 엘리베이터는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갈 거다. 그리고 살짝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한 명을 태우고 내가 서 있는 층으로 올라올 것이다. 나는 처음 이 아파트에 왔을 때부터 봐 두었던 자리로 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비상계단의 문 뒤에 서서 왼쪽 눈만 빼꼼 내민 채 복도를 살폈다.
내가 예측한 시간이 되자 엘리베이터는 일 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느린 속도로 사 층까지 올라온다. 나는 숨소리까지 죽이며 완전히 기척을 지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온다.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지나쳐 간 남자는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선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남자의 옆에 선다. 정확히는 옆집 현관 앞이다. 여기만 도어락 대신 열쇠 구멍이 있어서 세입자인 척 연기하기에 용이했다. 열쇠를 찾는 척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는 취기 탓에 몇 번이고 손이 미끄러져서 아직도 집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나는 하마터면 큰 한숨을 내쉴 뻔했다. 저런 새끼가 어떻게 언니 같은 여자를 만난 거지. 이가 부득 갈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몸은 돌리지 않고 후드 아래에서 눈동자만 굴려 옆을 훔쳐보았다.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별안간 귓가에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저기요.”
“…….”
“왜 자꾸 보세요?”
취해서 발음도 배배 꼬인 주제에 말 속에 담긴 의도는 꽤 날카로웠다. 뭘 쳐보고 있냐는 거겠지. 순간 당황한 나는 숨을 들이켠 다음 꾹 참았다. 차마 내쉴 수 없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것도 멈추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려보고 있던 남자의 손이 어느덧 멈추었다. 보란 듯이 도어락에서 멀어져 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왜 갑자기 예리한 척이야, 그냥 하던 대로 멍청하게, 눈치 없이 비밀번호나 대놓고 치고 들어가지. 난 겨눌 수 없는 비난을 속으로 삼키며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 너무 취하신 거 같아서.”
“예? 아, 뭐….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한잔했거든요.”
거짓말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직원들과 식당 옆 호프집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소주잔을 기울였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남자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더니 쓸데없이 말을 붙여온다. 목소리로 낯선 이의 정체가 여자라는 걸 알았으니, 그는 태도에서 모든 의심과 경계를 제거했다. 나는 토기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옆집 사세요? 여기 비어 있던 지 꽤 됐는데.”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그러시구나. 여기 아파트 낡아서 젊은 여성분들은 잘 안 오시는데. 반갑네요.”
내가 너랑 알던 사이도 아닌데 대체 뭐가 반가운 거지. 대화가 길어질수록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을 느꼈다. 결국 못이 박힌 듯 멈춰 서 있던 발바닥을 떼어 내고 곧장 옆으로 돌아 빠른 걸음으로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등 뒤에서 ‘저기요!’ 하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거기에 대꾸할 의무는 내게 없었다. 누군가는 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판단했을 땐 그랬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무작정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제야 아까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어깨와 가슴팍을 들썩이며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남자가 서 있을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들어가고 없는 건지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누구의 인영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와 나의 성별이 반대였다면 그는 위협감을 느꼈을까. 나에게 감히 말을 걸지도 못하고 급하게 본인의 집으로 들어갔을까. 그러고는 휴대폰을 켜 위급한 상황에 필요한 숫자 세 개를 눌렀을까. 그러면 나는 문밖에 서서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다가 현관문이 부서지게 두드렸을까. 그랬다면 나의 계획도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현실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귀찮은 생각을 애써 떨쳐내고 주머니 안에서 엉킨 이어폰을 꺼내 살살 풀었다. 양쪽 귀에 하나씩 끼워 넣고 예전에 선물 받은 MP3로 음악 파일 하나를 재생했다. 신식 기능이 탑재된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주변 소음은 전부 차단되고, 오직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한 여자의 목소리만이 내 귀를 가득 채운다.
- 너 진짜 귀엽다. 너만큼 귀여운 애는 본 적이 없어. 너랑 있어야 마음이 편해. 우리 평생 이렇게 같이 살자.
짧은 몇 마디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될수록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미약한 원망도 이 틈을 타 새어 나온다. 평생 같이 살자며. 나만 진심이었나. 나만 그 말을 듣고 진정으로 기뻐했나. 정작 언니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고된 현실을 외면하고자 선택한 알코올이라는 도피처에 절여져 내뱉은 한낱 거짓에 불과했나. 언니는, 자신의 고된 현실이었던 저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나. 내가 아니라 저 남자와 진심이 담긴 평생을 약속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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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책을 펼쳐 읽고 있는 내게 언니는 종종 농담으로 재미없다고 했지만, 내심 종이를 빼곡하게 채운 글자들의 재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언니는 몇 번이고 몰래 내 책을 가져가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많이 읽던 건 소설인데 두 명의 주인공이 자유를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였다. 언제나 좁은 보육원 방 안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어 했던 언니에게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그때부터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나를 따라 보육원 서고에 꽂힌 책을 한 권씩 고르기 시작했다. 나란히 앉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언니의 헤어핀으로 고정한 채 각자의 책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으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무엇이든 새로이 도전하는 걸 좋아하던 언니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글자들을 직접 써 보고 싶어 했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를 마무리할 때 일기를 쓰곤 했는데 다른 사람은 안 되지만 언니 한 명에게는 일기를 자주 보여주었다. 글을 써 보고 싶다던 언니는 내게 앞으로 자신의 일기도 보여주겠다며 원장님에게 부탁해 새 공책을 한 권 샀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샤프로 한 글자, 한 글자 본인의 일상을 적어 내려갔다. 보육원에서 인기가 많은 언니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 하지는 않았다. 학교도 달라서 아침에 같이 보육원을 나서고 난 이후에는 돌아오기 전까지 언니가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언니와 일기를 교환하기 시작한 후로는 내가 모르는 언니의 일상을 훔쳐볼 수 있어서 좋았다.
- 점심시간에 친구와 급식을 다 먹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트랙 옆에서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축구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친구의 머리를 때렸다. 공은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땅으로 추락했고, 친구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공을 찬 걸로 추정되는 남자애가 달려오더니 성의 없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툭 던지고 공을 주워 가려고 했다. 나는 걔를 붙잡고 제대로 사과하라고 화를 냈다. 그러자 그 애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냐며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전혀 무섭지 않은 척 그 애를 노려 보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서워서 떨고 싶었다. 그러나 기가 죽은 걸 티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다른 남자애들이 말려서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걔네가 멀어지고 나서 보니 친구의 관자놀이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걸 보니 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날 말리는 친구에 의해 그냥 운동장을 일찍 떠나는 걸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는 항상 속에 있는 걸 참지 말고 터뜨리라고 했는데 정작 나는 오늘 그러지 못했네. 뭔가 모순적이면서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의 일기는 사실 그 자체를 기록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항상 나에게 쓰는 편지로 끝났다. 글을 쓰는 도중 내 생각이 났을까, 꼭 나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적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나한테 보여줘야 하니까? 언니가 나를 의식하며 펜을 움직였을 거라고 추측하다 보면 가슴이 시렸다가 확 수축해서 쪼그라들었다. 내가 언니를 생각하는 것만큼 언니도 나를 생각할까.한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할까. 얼마나 깊이 해줄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모든 사고의 중점이 언니에게 쏠려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로 물감이 번지듯 언니는 나의 머릿속에 퍼져 나갔다. 자기 전, 기대하는 얼굴로 각자의 일기를 상대방에게 건네주고, 침묵 속에서 자신이 모르던 상대의 이야기를 글로 접하며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일기를 교환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언니는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대신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내가 유일했다.
- 오늘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어. 내가 아는 건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흘 동안 문제를 최대한 열심히 풀었어. 기술가정은 수업도 제대로 안 들어서 정말 기억이 안 났는데 평소에 너가 알려줬던 상식들로 겨우 풀었다니까. 넌 나보다 똑똑해서 아마 네 덕에 정답 몇 개는 더 맞췄겠지. 반 애들 몇 명은 시험 하나가 끝날 때마다 제일 공부 잘하는 애한테 가서 답을 맞혀 보더라고. 나랑 내 친구들은 겨우 한 시간을 보냈다는 거에 기뻐하면서 오늘 급식 뭔지나 얘기했는데, 뭔가 웃기지. 같은 공간 안에 있는데도 취하는 태도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말이야. 너는 답을 맞혀 보러 삼삼오오 모이는 쪽일까? 아니면 나와 같은 쪽일까? 뭔가 너는 둘 다 아닐 거 같아. 혼자 조용히 다음 시험 과목을 준비하고 있을 거 같아. 내가 너와 같이 학교를 다녀본 적은 없지만, 보육원에서 봤던 너는 그런 이미지야. 나쁜 뜻은 아니고, 그냥 어딘가 어른스럽고 조용하고, 그런 게 너를 이루는 분위기인 것 같아. 너와 함께 있으면 종일 들떠서 피곤하던 나도 조금씩 나른해지면서 안정을 찾곤 해. 너는 자주 활기찬 내 에너지가 지닌 힘에 대해 칭찬해 주었지만,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차분함의 힘이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러면 너는 또 아니라고 하겠지? 그럼 우리 둘 다 대단한 걸로 하자.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이토록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를 너에게 보내는 이 일기장 위에서는 나사가 풀린 것처럼 하게 돼. 그것도 너의 힘이야. 날 완전히 편안하게 만들어주잖아.
나는 나 자신보다 남을 추켜세워 주는 게 익숙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 날 낮추고 대신 언니를 높이 평가했을 때, 가끔은 언니가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럴 만도 한데, 항상 부담스럽다는 티는 조금도 내지 않고 오히려 함께 나를 칭찬해 주는 언니의 화법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 좋았다. 보육원에 있는 그 누구도 나를 언니만큼 잘 알지도, 좋게 봐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시간이 갈수록 흘러간 시간만큼 소중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도, 행동 하나도, 언니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는 그녀가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기에 나는 대단한 사람이 나와 가장 가깝다는 사실에 희열감마저 느꼈다. 본인 스스로 글자와는 가깝지 않다고 했던 언니가 나로 인해 습관처럼 서로를 향한 편지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써 내려간다는 게 얼마나 기뻤던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언니가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다. 나는 언니가 다녔던 중학교에 그대로 진학할 예정이었기에 교복을 물려받았다. 언니는 나보다 키가 십 센티는 더 넘게 커서, 그의 교복은 너무 컸다. 하지만 천 곳곳에 묻어 있는 언니의 향기가 은은하니 코끝에 퍼지는 게 좋아서, 새 교복을 사 주겠다는 원장님의 말을 끝까지 거부했다. 언니는 새로 맞춘 고등학교 교복을 내 앞에서 입어 보며 어떤지 물었다. 나는 언니가 거적때기를 입고 있어도 예쁘고 멋지다고 할 텐데, 하물며 반듯한 교복을 입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두 개의 엄지를 치켜세우며 예쁘다고 하자 언니는 볼을 붉히며 고맙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칭찬에는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유독 내가 할 때는 부끄러워하던 언니의 모습은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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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니 엄한 것들을 달고 다닌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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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조용한 축에 속한 아이였는데, 딱 한 번 보육원에서 말썽을 부린 적이 있다. 그 애가 내 햄릿 책에다가 녹은 초콜릿을 묻히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의 첫 연결점을 함부로 망친 게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몰려오는 분노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을 땐 이미 내가 그 애의 머리를 잔뜩 헝클이고 뺨을 사정없이 할퀸 후였다. 원장님에게 종아리가 빨개지도록 혼이 났다. 왜 쟤는 안 혼내지. 원인 제공은 저쪽이 한 건데. 선생님들이나 다른 애들도 말은 없지만 눈빛으로 나를 탓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딱 한 사람만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승현이가 먼저 얘 책에 초콜릿 묻히고 튀었어요. 그러게 남의 책을 왜 건드려? 맞을 짓 했지, 뭐. 선생님 한 분이 언니를 나무랐지만 언니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그날 밤은 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넌 그 나이 애들답지 않게 눈물이 없는 편인데, 오죽 서러우면 이러겠니. 괜찮아. 걔가 잘못한 거야. 나도 알았다. 화가 난다고, 내 물건이 망가졌다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때려선 안 된다는 걸. 하지만 한 명 정도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귀찮을 법한 아이의 투정을 친절한 언니는 기꺼이 받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믿었다. 언니는 지금도, 나를 이해해 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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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잃고 깨어난 남자가 서서히 눈을 떴다. 진득하게 묻은 핏물 때문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는 거칠게 호흡하지만, 입을 막은 테이프 때문에 숨결이 그대로 돌아왔다. 코와 입가 부분이 습해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두 손과 발이 묶인 자세로는 쉽지 않다. 겨우 옆으로 돌아누운 그가 꽉 막힌 비명이라도 연신 내질렀더니 방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안 가 여자 한 명이 나타났다. 문지방을 넘고 성큼 다가오는 그의 발에 남자가 질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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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가 꼭 밟힌 지렁이를 닮았다. 징그러워, 끔찍해, 혐오스러워, 흉측하고.
“당신이 진짜 우리 언니랑 연애를 했다고?”
믿기지 않는단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건 고인을 향한 모독이나 다름없다. 나는 치미는 화를 간신히 눌러 담으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왜 하필.”
왜 하필 우리 언니였어. 왜 그래야만 했어.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짓을 해야만 했어. 언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칼을 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남자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게 굴었다. 짜증 나…. 원초적인 감정만이 남아 머리를 지배했다. 죽여버리고 싶어. 복수해 주고 싶어. 이 남자가 빼앗아 간 건 죄 없는 언니의 목숨 하나가 아니었다. 내 가슴 속 깊이 품었던 희망, 눈을 감고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그려보았던 언니와의 미래, 작고 소중한 일상, 미소, 내 모든 것을 빼앗겼다. 언니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걸어가며 보기로 약속한 세상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봄에 석촌호수는 분홍색 벚꽃들로 가득 차 아름답고, 여름에 제주 바다는 햇빛을 반사하면서 더욱 빛이 나고, 가을에 덕수궁은 알록달록한 단풍들로 화사하고, 겨울에 명동 백화점 앞에 가면 화려한 크리스마스 전광판을 띄워주는데.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좋은 건 절대 혼자만 하지 않고, 우연히 길을 걷다가 좋은 걸 봤으면 다음에 무조건 서로를 데려가 주자고 했는데.
나는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남자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공포에 질려 희번덕거리는 걸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언니를 마구잡이로 취하고 농락하며 비웃는 내내 멀쩡히 뜨고 있었을 저 눈동자. 감히 언니의 신뢰를 가져가 놓고 그걸 모두와 공유하며 웃느라 확 접혔을 눈꺼풀. 언니를 만졌을 손과 맞닿았을 배와 가슴팍, 언니의 손길이 닿았을 어깨와 팔목, 날개뼈, 목덜미, 얼굴.
“영상 지웠어?”
내 물음에 남자는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로 그의 튀어나온 배를 걷어찼다. 잠시 콜록대던 그가 이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터넷에 올라간 이상 지우고 또 지워도 좀비처럼 기어 나올 것이다. 찾을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둡고 더러운 곳에서 수많은 인간이 언니를 희롱하며 즐거워하겠지. 최초 유포자는 이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였지. 기절해 있는 동안 휴대폰을 조사했는데 꼴에 친구들에게만 공유하고 다른 사이트에는 올린 흔적이 없거든. 근데 왜 영상 지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갤러리에서 지웠다고? 영상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내가 지웠는데.
거짓말이다.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반성 또는 후회, 이런 건 역시 그와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바닥에 누운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지만, 테이프에 막혀서 들리지 않았다. 사실 조금 망설였다. 언니가 원하지 않는 방식의 복수일까 봐.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근본적인 소원은 들어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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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개천 위로 피에 절인 식칼 하나가 떨어진다. 풍덩, 소리와 함께 빠진 식칼을 그대로 물줄기를 따라 흘러간다. 붉은 흐름을 가만히 눈으로 따라갔다. 경찰들은 시신에서 피해자의 안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눈동자 두 개를 손바닥 안에서 구슬처럼 이리저리 굴렸다. 모든 추악함을 담고 있던 최초의 증거를 힘을 주어 으깨버렸다. 비로소 징벌이 완성된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징벌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세상을 원합니다. 부디 그 새끼가 편하게 살지 않도록 해주세요. 고통 속에서 죽게 해주세요. 그에게 저보다 더한 시련을 안겨 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오직 징벌입니다. 그뿐입니다.
처절하던 언니의 유언장을 되새기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꿉꿉하던 여름이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