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개학과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세상에서 조금씩 제 존재감을 지우기 시작할 무렵에 우리 학교로 오셨다. 단정한 파란색 블라우스와 하얀색 롱스커트를 나풀거리며 앞문으로 들어오신 선생님의 얼굴은 긴장과 기대로 한껏 상기된 채였다. 새로 온 윤리 선생님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다음,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씩 부르며 길게 눈을 맞추었다. 너희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해 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시선에 몇 명은 부담스러워했고, 몇 명은 좋아했으며, 나머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순간을 내 기억 속에다가 첫 번째 설렘으로 기록했다. 연한 갈색빛을 띠는 두 개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내 얼굴을 찬찬히 훑을 때는 꼭 사진작가의 피사체가 된 기분이었다. 분홍빛 립스틱을 바른 얇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내 이름을 읊조릴 때는 꼭 나를 위해 쓰인 시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황홀했던 첫 만남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 그때부터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선생님에게서 풍겨 나오는 장미꽃 향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전에 계셨던 윤리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분이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방학 중에 퇴직하셔야만 했다. 아이들과 친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척을 지지도 않은 채 미적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루한 수업만 이어 갔던 그의 부재는 반 아이들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하필 점심시간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수업이라 조는 애들이 많았는데, 모범생들도 그 시간에는 포기하고 엎드려 자버리는 분위기였다. 새로운 선생님은 당연하게 자리잡힌, 그러니까 우리의 암묵적인 낮잠 시간을 바꾸고 싶어 했다. 변혁은 현재 상태에 적응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는 자들의 반감을 사기 쉬운 주장이다. 식곤증을 언제나 윤리 시간에 해결했던 아이들은 2학기에도 동일하게 점심시간 뒤 윤리 과목 수업이 잡힌 걸 보고 약하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새 선생님이 그걸 용납하지 않으니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싫어했다.
“새로 온 윤리 존나 귀찮아. 전에 있던 쌤이 훨씬 낫지. 자든지 말든지 내버려두던 게 제일 편하다고.”
반에서 가장 불량한 아이들 몇 명은 점심시간에 하교 이후를 위한 화장을 미리 하면서 또는 학생에게서 풍기면 안 되는 매캐한 담배 냄새를 묻힌 채 들어오면서 종종 선생님 욕을 했다. 귀찮다는 말이 주를 이뤘고, 거기에 동조하는 의견도 많았다. 그 사이에 끼지는 못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바람에 흘러 흘러 욕을 듣게 된 애들 중에도 남몰래 반감을 품은 애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저 선생님이 부정적인 여론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접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누구나 처음이 있고, 무언가를 시작할 땐 원래 많은 욕심이 드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학생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지 않고 수업을 듣는 건 당연한 건데. 선생님은 당연한 의무를 주장하는 거였고, 쟤네가 말을 듣지 않는 불량아들인 거잖아. 이 얘기를 듣지 못한 선생님을 대신해서 억울한 심정이 몰려왔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멍청하진 않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용감한 거지, 그게.
나는 결국 겁쟁이라서 아무 말도 얹지 못한 거겠지.
그런 주제에 감히 선생님을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며 떠들어도 되는 걸까.
사실 친구나 담임 선생님, 하다못해 부모님에게도 내가 윤리 선생님의 열성적인 팬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볼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대체 그 귀찮은 신입 교사의 어디가 좋은 거냐고 물어본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선생님 근처에 있을 때마다 장미꽃 향기가 나.’
이런 변태처럼 보이기 딱 좋은 이유 말고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좋은 향기라는 걸 이토록 갈망하던 사람이었나? 전혀 몰랐다. 언제나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냄새에만 반응하며 미간을 좁히기에 바빴다. 좋은 체취를 지닌 타인이라고는 기억 속에 단 한 명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짜증이 날 만큼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타인을 떠올리라고 하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장 고등학교 안에서 담배 냄새, 특히 체육 시간 이후 막강하게 퍼지는 땀 냄새, 흘린 땀과 자주 씻지 않아 지저분한 피부가 함께 내뿜는 악취란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다가 잠깐 윤리 시간에만 우리 교실에 들어오는 것처럼 언제나 은은하게 장미꽃 향기를 풍기셨다. 선생님, 하고 불렀을 때 으응? 대답하며 내 쪽을 돌아보실 때 머리카락이 휘날리면, 선생님의 그 아릿한 장미꽃 향기가 순식간에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워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갈 것 같은 걸 꾸욱 참으며 나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질문했다. 칸트가 주장하는 선의지가 잘 이해가 안 가서요…. 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행동을 한 건지, 남이 어떻게 알죠? 그러면 선생님은 칠판을 빼곡하게 채운 판서를 지우다 말고 친절하게 웃으며 설명해 주셨다.
“결국 우리 스스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느냐에 달린 거겠지. 일종의 의무감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예를 들면, 지하철에 탔는데 임산부석이 있어. 그리고 임산부가 탔어. 그러면 우리는 대부분 임산부석에 앉지 않고 양보를 하잖아? 그것처럼 그게 당연히 옳고 선한 일이기 때문에 한다고 보면 돼. 누군가한테 증명해야 한다…. 그런 관점보다는 그냥 자기의 행동을 돌아보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어, 선생님은. 유민이 칸트에 관심이 많은가 봐? 저번에도 칸트로 질문했잖아.”
당연히 옳고 선한 일. 그게 무엇일까. 누가 그걸 정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철학적인 대화를 이어가기엔 쉬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그리고 선생님도 나 같은 애송이랑 그런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싶진 않으실 테다. 나는 그저 쑥스러운 마음에 귀를 붉히면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어려워서 그런 거 같아요….”
“어려울 거 없어. 윤리 과목에서는 진짜 쉽게 풀어져서 나오는 건데? 칸트에 관심이 있으면 ‘실천이성비판’ 한 번 읽어봐. 청소년이 읽기 쉽게 설명해 주는 버전이 있거든? 아마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있을 거야. 그거 재밌어.”
“네에….”
내가 그 책을 진짜 읽으려나? 아마 읽을 것이다. 선생님이 추천해 준 거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읽지 않을 거 같기도 했다. 내가 진짜 관심 있는 건 칸트 따위가 아니라 윤리 선생님이었으니까.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내게 손을 흔들면서 교실을 나갔다. 다음 시간에 보자, 유민아. 그 말이 한참 동안 내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치 각인처럼, 심장 위에 타투를 한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남았다. 선생님의 부드럽고 단단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은 앞서 말했듯이 내가 그 분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던 순간이니까.
“야, 뭐해. 빨리 자리 가서 앉아. 곧 수학 오겠다.”
교탁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애 하나가 날 툭툭 치며 알려주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현실로 돌아왔다. 수학 선생님은 언제나 수업 시작 삼 분 뒤에 도착하시는 분이었다. 나의 선생님은 언제나 수업 시간을 완벽하게 지키는데. 늦게 도착하는 일도 없고, 늦게 끝내는 일도 없이 정확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사람은 누구나 사정이 생기기 마련인데. 자리로 돌아가 앉으면서 나는 불현듯 교탁 앞에 안은 그 애를 시기했다. 나도 저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선생님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 정갈한 설명을 이어 가주실 텐데.
답도 없는 짝사랑에 빠진 기분이다. 난 그제야 이 감정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은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의 조건이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첫 번째, 젊어야 한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물론 그런 경우를 유독 좋아하는 부류가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은근히 분포되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학생들과 세대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특히 초임일수록 확률이 높다. 그들은 정말로 학생들과의 나이 차이가 언니, 오빠, 형, 누나 수준으로 적게 나기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 외모가 준수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은 외모지상주의, 탐미주의를 당연한 이치로 생각한다. 나 역시 선생님의 수려한 외모가 없었다면 오직 장미꽃 향기 하나만으로 지독한 짝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테니까. 특히 잘생긴 남자 선생님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좋다. 그들은 간식이나 손수 만든 장식품, 편지 등의 선물도 많이 받고 특히 학년이 끝나 떨어지거나 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는 여학생들의 눈물까지 뽑아 간다. 그 애들은 거의 다 성인이 되고 나서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선생님이 얼마나 아저씨였던 건지를 깨닫고 환상에서 빠져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은 다신 없을 사랑을 느낀다. 젊고 예쁜 여자 선생님도 남학생들이 많이들 좋아했지만, 걔네는 무언가를 주는 것보다 받는 일에 익숙한 건지 엄청난 선물 조공이나 아련한 애정 표현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한다는 감정을 앞세워 성희롱 등을 시도했다가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경우도 적잖았다. 모든 남학생이 그렇게 군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이슈가 없이 순수한 마음이 주를 이루었다는 걸 비교해 보면 참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 선생님이 수업이 지루하고 깐깐하다는 평가 때문에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다지 좋지 못한 편이라는 게 사실 감사했다. 걔네가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을 욕하는 건 화가 났지만, 그 욕이 지저분한 성희롱으로 변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모욕도 관심이다. 나는 그들이 평생 나의 선생님에게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욕도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게 왜 나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쳐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넌 왜 윤리 공부만 해?”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앞머리에 말고 있던 헤어롤을 풀면서 대뜸 물어왔다.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윤리 교과서와 필기 노트를 보고서는 갑자기. 난 맥락 없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의무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두 눈만 끔뻑거렸다. 자기가 물어봤는데 답하지 않자, 기분이 상한 건지 갑자기 썩어 가는 표정을 지으면서 날 노려보다가 위아래로 훑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선생님을 좋아해서, 다른 과목은 몰라도 윤리는 꼭 만점 받고 싶거든. 이렇게 대답해야 하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윤리 좋아해서.”
윤리 과목과 윤리 선생님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 건지 모를 답을 꺼낸 뒤 아예 시선을 노트 위로 고정했다.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벌써 세 번째 쓰고 있는 내용을 적어 갔다.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표시하라고 했던 문단에 밝은색 형광펜을 긋고, 그걸 계속 써 내려갔다. 나는 원래 암기력이 안 좋아서 언제나 외우는 과목은 이런 식으로 깜지를 써야 그나마 외워졌다. 보통은 손목도 많이 아프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포기하는데, 윤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께 매번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가 질문으로 귀찮게 해놓고 정작 시험은 못 보는 아이러니한 학생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내는 우수한 아이로 보이고 싶었다. 칭찬받고 싶었다. 선생님은 분명히 내게 아주 잘했다며 예쁜 미소를 보여주실 테니까. 얼마나 자애로울까. 나는 상상만으로 벌써 선생님의 장미꽃 향기를 흠뻑 들이키며 기쁨에 찬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추상적이지만 그를 위한 열정 하나는 강렬할 때 인간은 예상치도 못한 의욕을 뿜어낸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에서야 완전히 이해했다. 문과식 암기 과목이 싫어서 대학교는 무조건 이공계열을 선택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요즘에는 선생님 때문에 진로까지 바꿔버리고 싶었다. 내가 만약에 윤리교육과나, 아니면 철학과 등을 가겠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까?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까? 당황하시려나, 아니면 좋아하시려나. 자기 때문이라고, 선생님 때문에 윤리가 좋아져서 그걸로 밥벌이하며 살고 싶어졌다고 말하면 확실하게, 백 퍼센트 좋아하시지 않을까? 근데 선생님은 수업 때 보면 은근히 냉철하신 경향이 있어서 잠깐의 흥미로 네 앞날을 함부로 정하려고 하지 말라며 충고를 해주실 거 같기도 했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래 놓고 정작 학년이 바뀌며 선생님과 떨어지고, 현실 입시에 피할 수도 없을 만큼 가까워지면 다 상관없이 내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과 전공을 고를 테니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무기력이었다. 하다못해 내 미래에 대해서도 이런 무기력을 품게 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학년이 지나고 선생님과 멀어지면 이 마음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애들은 보통 멀어지고 나면 곧장 그 선생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던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선생님의 부드러워 보이는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가서 그분을 고작 ‘그땐 그랬지’ 수준의 추억 회상 정도로만 남겨 놓을 수 있을까? 확신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그만큼 이 사랑은 부피가 너무 컸다. 존재감이 눈부셔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선생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 쪽이 슬그머니 아려왔다. 첫사랑인 걸까.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선 안 되는 사랑을 하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내 감정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윤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이 마음은 어디에도 분출되지 못하고 그저 속에 눌러 담기기만 했다.
*
중간고사 시간표가 나왔다. 윤리는 맨 마지막 날 두 번째 시간에 응시하는 걸로 정해졌다. 학생들의 긴장감이 대부분 풀어질 만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중간고사 전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님은 꼭 문제를 꼼꼼하게 읽어 보고 잘 풀어야 한다면서 신신당부하셨다. 대부분의 학생은 그 말을 귀찮아하며 흘려들었고, 나랑 원래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던 몇몇 아이들만 귀담아들었다. 윤리 과목에서 상위권 점수를 받는 건 일단 따 놓은 당상인 듯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시험보다 끝나면 뭐 하고 놀지에 신경이 집중된 틈을 타 높은 점수를 받아야 했다. 아니, 기왕이면 만점을 받았으면 좋겠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공부에 열정을 가지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별로 없어서, 내가 공부한 양이 과연 만점을 받아도 충분한 수준인지 몰랐다. 가늠하기 어려운 예상 점수를 둥실둥실 떠올리다가 이내 그럴 시간에 문단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낫겠다 싶어서 시선을 내렸다. 형광펜으로 그어진 글자들 밑에는 샤프펜슬로 그은 밑줄이 덧대어졌다. 입으로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책을 계속해서 읽은 탓이다. 암기 과목은 회독이 중요하다고들 하던데, 이렇게 하는 거 맞겠지. 난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도, 어째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자꾸만 의심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외우고 내용을 숙지하는 방법은 다른 법이다. 하지만 나는 평균을, 보통을, 대부분을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하는 건지. 물론 이걸 물어볼 만한 적당한 인간이 없어서 홀로 고민하며 윤리 교과서만 종이를 뚫어버릴 기세로 읽었다. 그냥 선생님에게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지 여쭤볼까, 싶다가도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애로 남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들어 포기했다. 괜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가.
윤리 붙잡고 이럴 시간에 주요 과목인 국영수를 더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훈수를 두고 가던 친구 한 명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솔직히 안 흔들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지금 인생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중이었으니까, 아마도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면서 모두가 정해주는 편한 길을 가지 않고 묵묵하게, 순수 본인이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고작 국영수 대신 윤리 공부를 하는 나에게 붙이기엔 거창한 문장일 수 있겠지만, 성적 하나하나에 목숨이 달린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이보다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국영수 공부할 시간을 줄여서 비중도 크지 않은 탐구 과목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문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것도 순애라고 할 수 있을까? 오직 선생님을 향한 내 사랑 하나 때문에 그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요소에 흠뻑 빠졌으니 말이다.
*
“유민이는…. 정시 생각 중이라고 했나?”
“네.”
“너도 알겠지만, 올해는 재수생이 많이 들어올 거라, 현역은 수시가 더 유리할 거야.”
“아, 그렇죠.”
“그래도 마음 바꿀 생각은 안 들어? 정시가 편해? 넌 내신도 괜찮은 편인데, 수시 한 번 도전하지, 왜. 어차피 여섯 개나 있잖아.”
“제가…. 세특 같은 건 관리를 잘 못해서요. 자신이 없어요.”
“어디 보자……. 그렇긴 한데, 남은 시간 동안 잘 준비하면 그래도 가능성이 없진 않아. 국영수 성적만 조금 더 올리면 괜찮을 텐데? 너 이과 갈 거면 지금 등급도 안정권인 좋은 대학들 많아.”
“저 근데 문과로 갈 거라서요.”
“네가? 왜? 너 완전 이과 아니야?”
담임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멋쩍은 듯 머리카락이나 쓸어 넘겼다. 암기 과목에는 자신이 없다고 앞서 말했듯이, 난 차라리 온갖 공식과 계산이 들어간 과목이 편했다. 수학이나 화학, 생명과학 같은 것들. 그것들도 물론 기본적으로 암기해야 하는 정보들이 있었지만, 통으로 모든 걸 외워야 할 필요는 상대적으로 없었으니까. 요즘 세상은 문이과 통합 시대라지만 내부에서는 암묵적으로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생각했다. 나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담임 선생님까지 알 만큼 확신의 이과생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왜 그런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 아니면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던 건가?”
“그냥…. 요즘 철학과 가고 싶어져서요.”
“철학과?”
“네. 아니면 윤리교육과라던가….”
“너 윤리 선생님 때문에 아주 거기에 푹 빠졌구나?”
어떻게 알았지. 윤리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어디 가서 말한 적도 없고,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담임 선생님을 바라보자, 그는 방금 자신이 한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윤리 선생님이 우리 반 수업 끝나고 올 때마다 네 칭찬을 그렇게 하셔. 윤리 다들 지루하다고 잘 안 듣는데, 네가 제일 열심히 한다고. 질문도 맨날 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태도도 아주 좋다고. 선생님이 그래서 어깨 좀 올라갔잖아, 네 덕분에.”
“아…….”
“근데 나는 그거 그냥 네가 선생님 좋아해서 잠깐 그러고 말 줄 알았는데, 아예 진로까지 바꿔버릴 만큼 빠진 거야? 선생님 좋아하다보니 윤리도 좋아졌어?”
그건 아닌데. 사실 아직도 윤리라는 과목 자체가 주는 매력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암기에 취약하니까.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서 같은 주제로 여러 번 떠들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면 이전에 나왔던 사상가들이 또 등장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가 너무 많았다. 내가 이걸 전부 숙지할 수 있을까. 겁도 났고, 자신도 없었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괜한 도전에 몸을 던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뒤에서 윤리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니. 나에 대한 기대감과 긍정적인 마음을 이만큼 품고 계시는 걸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내 담임 선생님에게 전달까지 했다니.
“…… 네, 맞아요. 저 윤리 재밌는 거 같아요.”
이건 불가항력과도 같은 거였다. 열여덟 살 인생에 가장 큰 허리케인이 불어닥쳤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을 삼 개월 앞두고 갑자기 진로를 크게 바꿔버린 특이한 아이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괜찮다고, 너 같은 케이스는 종종 있다며 잘할 수 있을 거라 응원해 주셨다. 대신 철학과의 경우, 학교 수준이 높을수록 전과나 로스쿨을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등급컷이 그만큼 높으니, 공부를 절대적으로 많이 해야 한다고 하셨다. 문과를 갈 거라면, 모순된 말이지만 수학이 제일 중요하지. 다들 국어, 영어, 탐구는 이미 잘하거든. 그러니까 문과를 가겠지. 그래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 점수를 높게 받아야 네가 유리해. 근데 넌 어차피 이과 머리니까 수학 잘할 수 있잖아? 네 장점을 잘 이용해 먹어. 꼭 후세의 아이들에게 사냥법을 알려주는 족장 같은 조언들 속에서 연신 고개만 끄덕이다가 교무실을 나왔다.
손에는 중간고사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아이들의 반 등수와 전교 등수가 적힌 종이를 인쇄해서 하나씩 직접 오린 다음, 번호 순서대로 호명해 상담을 진행했다. 그 얇고 기다란 종이를 두 손으로 펼쳐 다시 들여다보았다.
3등/24등
내가 받기에는 과분한 등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은 전교 등수라고 해봤자 얼마 없는 이과 학생들 사이에서 내는 성적이라 크게 높은 건 아니었지만, 반에서 3등을 했다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이번 중간고사 난이도는 전반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무엇 하나 쉬운 과목이 없어서, 문제지를 받고 시험을 시작한 지 정확히 3분이 지나면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끝나고 맨 뒷자리 학생이 답안지를 걷어갈 때마다 애들은 자기 근처에 앉은 친구에게 어려움을 토로하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엎드려서 울기도 하고, 홀로 입술을 짓씹은 채 분을 삭이기도 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윤리 시험을 준비했다.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윤리였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단체로 터뜨리던 선생님을 향한 원망이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담임 선생님 대신 종례를 해주러 온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원망을 토해낼 때는 내가 다 화가 났다. 너희가 공부도 안 했으면서 왜 선생님께 신경질이야. 나라고 해서 어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과목들에 비해서는 할 만했다. 내가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윤리는 모든 문제가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언급해 준 부분들에서 나왔다. 즉, 수업만 제대로 들었으면 충분히 해볼 만한 난이도였다는 거다. 자기들이 선생님을 무시해 놓고 왜 복수라도 당한 것처럼 저렇게 열을 내지? 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여주고는 다음 시험에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말만 남기셨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속이 넓을 수 있을까. 나였다면 너희가 멍청한 걸 왜 내 탓을 하냐고 한마디라도 했을 텐데.
윤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게 아마도 등수에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이건 평균을 내서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거니까. 윤리를 파고 파다 더 이상 할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다른 과목 공부도 쉬지 않고 했던 덕분이었다. 그것도 선생님이 자습 시간에 내게 다가와서 너무 윤리만 하지 말고 다른 과목도 봐야 한다고 언질을 준 덕분이었다. 안 그랬으면 내 평균 점수도 처참했을 것이다. 성적표를 보다가 이내 손안에서 구겨 버리고는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런 건 지금의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진정으로 받고 싶은 건 따로 있으니까.
“어, 유민아.”
내가 딱 5반 앞을 지나가던 그때였다. 앞문을 열고 나오던 선생님은 나와 마주치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옅은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곧장 걸음을 멈추고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아리송한 감각에 휩싸인 채 그분을 바라보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던 선생님은 손을 뻗어 내 팔뚝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셨다.
“마침 잘 만났다. 선생님이 유민이 너한테 줄 게 있거든.”
“저한테요?”
“응. 우리 윤리 전교 1등한테 당연히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지.”
선생님에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니. 나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심장이 요동치는 걸 고스란히 느끼며 그분을 따라 몸을 돌렸다. 방금 나온 교무실에 다시 들어가 함께 선생님의 자리로 갔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듯했다. 어떡하지. 당장이라도 심장 대신 다른 말을 토해버릴 것 같아. 티 나지 않게 거친 숨을 깊이 마셨다가 도로 내쉬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한 선생님은 서랍을 열고 예쁘게 포장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이거. 핸드 소프야. 나도 평소에 쓰는 건데, 이게 향기가 엄청 좋아. 장미꽃 향이 나거든.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냥 고마운 마음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손 열심히 씻고 윤리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장난스러운 말투와 함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는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라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었다.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가만히 핸드 소프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선생님의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내가 괜히 줬나? 부담되게?”
“아, 아니에요. 저, 저 그냥 너무, 좋아서…. 생각도 못 했어요.”
“그 정도야? 마음에 들면 다행이네. 다른 애들한테는 선생님이 준 거 비밀이다?”
비밀을 속삭이는 말에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내게 얼른 들어가 보라며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셨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느린 발걸음으로 교무실을 나섰다. 등 뒤로 닫히는 나무문에 잠깐 기대어 선 채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가슴이 뜨거웠다.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에다가 선생님에게 받은 핸드 소프를 툭, 올렸다.
선생님에게서 항상 나던 그 장미꽃 향기는, 향수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 핸드 소프가 자아내던 거였구나. 그리고 지금 나는 선생님의 향기를 선물 받았다.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만든 그 향기가 내 손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을 가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열린 복도 창문을 타고 쌀쌀한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건 바깥의 냄새가 아닌, 선생님의 아름다운 장미꽃 향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