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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31. 2020

양구, 미석(美石)과 시래기

고달픔을 구수함으로 화폭에 담다

이른 아침 안개가 많이 낀 경춘고속도로를 달렸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을 하는 아들을 보러 가는 날이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갈아타며 두 시간 여 만에 양구에 도착했다.


우리 국토의 정중앙 경위선이 교차하는 양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특히 귀에 익은 '펀치볼(Punch Bowl)'은 해안면의 지형이 화채 그릇를 닮았다고 해서 한국전쟁 때 외국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최북단 접경지이다 보니 사단 훈련소를 비롯해서 군부대가 많다. 지금이야 교통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그나마 양구보다는 나으리."라는 말처럼 두메 중의 두메산골이었다.


특별한 산물도 없는 척박한 지역이지만 그나마 시래기가 유명하다. 이곳 시래기는 가을에 수확한 무청을 두 달 정도 분지 지형의 찬 바람에 내놓아 얼었다 녹았다 자연 건조시켜 질기지 않고 식감이 부드럽다고 한다.


읍내 어느 아파트 장독대 옆 정자 처마에 시래기가 널려 있다. 또 아파트는 벽면 마다 미석(美石) 박수근(1914~1965) 화백의 그림을 한 편씩 담고 있다. 그중 <동행>, <길>, <아이 업은 여인> 등은 모두 1964년에 그린 작품들이다.


미석의 그림엔 광주리를 머리에 이거나 바닥에 내려놓고 앉아 과일이나 채소를 팔거나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들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양구에서 태어나서 6.25가 끝난 후 여느 월남 피란민들처럼 가족들과 정착한 서울 창신동,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좌판을 펴고 힘겨운 삶을 살아간 주변 이웃들의 모습을 즐겨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석의 그림에는 깊은 질감, 투박한 터치, 희미한 윤곽 등 그의 고향 특산 시래기처럼 구수하고 순박한 맛이 배어 있다.


박수근 미술관은 양구 읍내 사명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 아래 자리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피아노 세레나데의 연못을 헤엄치듯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본다.


미술관 뒤 얕은 능선 위, 포천에 묻혔던 예술가는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영면하고 있다. 가난했지만 늘 이웃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던 연민과 위로의 마음으로 찾는 이들에게 미소를 던지면서.


나는 내심 '양구에 왔으니 국이나 무침 등 무엇이건 시래기로 만든 음식을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이었지만, 한 달만에 아들을 만난 모정은 시레기로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수료식 후 양구 읍내 펜션에서 가족과 함께 한나절을 보낸 아들을 부대로 데려다 주었다.


한낮 양구의 가을은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으로 거듭난 아들과 작별하고 돌아서는 다른 가족들의 마음도 아쉬움으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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