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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28. 2020

가을이 지나는 도봉산

만추의 도봉산 산행

낯선 길이나 가도 그만 가지 않아도 그만인 길을 나서기는 주저주저 되지만 막상 한 번 나서면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기를 기대하며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주말 오랜만에 나서는 산행 길은 녹록지 않고 더구나 범상치 않은 기품과 위세 있어 보이는 산과 마주할 때면 작고 초라한 '나'와 마주하기 일쑤다.

멀지도 않고 그리 가깝지도 않은 거리, 그래서 가까이하지 않아도 그다지 마음 불편하지 않고 다가가기엔 쉽지 않던 그 '산', 가을이 한창 지나가고 있을 도봉이 문득 마음에 와 닿았다.

회룡 망월 사패 송추 자운봉 포대능선 오봉.. 그리고 크고 작은 많은 사찰들을 품은 도봉은 범접하기 쉽지 않은 기품과 함께 두루 포용하는 가슴 넓고 속도 탁 트인 큰 산이다. 그래서 도봉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친구들과 약속된 망월사역에서 만나서 길 건너 신한대학 교정 호랑이 상 앞에서 포즈를 한 번 취했다. 덕천사 대원사 원각사를 차례로 스쳐지나고 계곡을 끼고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은 원효사에 들러 잠시 숨을 골랐다.

원효사에서 도봉의 주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해 녹록지 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지만 중간중간 붉게 물든 단풍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어느덧 포대능선에 올라섰다.

송추계곡 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은 연신 옷깃을 여미게 한다. 포대능선을 반쯤 지난 해골바위 부근에서 능선 아래에 있는 망월사를 거쳐 지나는 길을 택하여 칼바람을 피하고 사찰 구경도 하기로 했다.

망월사에서 바라본 자운봉 쪽 모습

망월사 無爲堂에는 1885년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한 청국 원세개가 쓴 '望月寺' 현판이 걸려 있다. '광서 신묘년 중추'라는 글귀로 보아 1891년 가을에 쓴 것이리라.

아마 그도 이맘때 가을쯤 이마 위 저 멀리 우뚝 솟은 도봉의 준봉들과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 망월사에 들렀을 것이다. 한창 무르익었을 도봉의 가을 풍광에 감탄하며 하루쯤 묵다가 때마침 휘영청 떠오른 달빛에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붓을 집어 들었을 도 모른다.

여의하면 이곳 산사에서 한나절쯤 머물면서 찬 공기를 가르며 부서지듯 내리비추는 햇살 아래 시시각각 변해가는 도봉의 만추 풍경에 푹 취해보고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다독이고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포대능선으로 올라서니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등 도봉의 주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대가 산객을 기다리고 있다.

Y계곡을 힘겹게 오르는 등산객들

단풍으로 물든 산줄기가 저 아래쪽 산자락에서 하늘로 치달아 오를 듯 산정으로 달려오다가 도도한 기세로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를 만나 멈추어 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자운봉으로 발길을 옮기려니 도끼로 내리친 듯 능선이 갑자기 뚝 끊기며 수십 길 깊이로 좁게 패인 Y계곡이 나타나 앞길을 막아섰다.

직강하 했다가 다시 수직에 가까운 경사의 암벽을 오르내려야 하는 Y계곡, 산객들은 감히 길을 재촉하거나 조급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밧줄과 안전 철책에 의지하며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서로 손을 내밀거나 발을 받쳐주면서 험한 계곡을 천천히 힘겹게 건넌다.

자운봉은 거대한 바윗돌이 층층이 쌓여 거인처럼 웅자한 자태로 앉아 있다. 산객에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고 맞은편 신선대에서 그 위용을 감상하게 허락할 뿐이다.

도봉 주능선으로 내려오면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오봉이 숨바꼭질하듯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있다.

쇠 귀를 닮았다는 우이암을 우회하여 보문능선으로 내려가는 길은 힘든 코스가 없고 산책로처럼 평탄하다. 동행한 친구 M의 고모가 한때 머물렀다는 능원사를 비롯하여 굽이마다 크고 작은 사찰들을 포근히 품고 있다.


도봉 유원지 쪽 날머리에는 산행을 마무리하기 아쉬운지 노란 은행과 붉은 단풍을 배경으로 산객들이 끼리끼리 모여 카메라에 추억을 담고 있다.

도봉역까지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 촘촘히 늘어선 식당에는 꽁치구이 어묵 부침개 등의 달콤한 유혹에 눈과 코를 굴복당한 산객들로 빈자리가 드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번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창 가을이 지나고 있는 도봉을 찾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동부간선도로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섰고 태양은 서녘으로 붉은 노을의 바다를 펼치며 천천히 내려앉고 있다.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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