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에서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높게 뜬 공을 향해 외야수와 내야수가 달려들지만 그 누구도 공을 잡지 못하고 놓친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못할 어정쩡한 위치, 소위 '사각지대(死角地帶)'에 공이 떨어진 것이다.
코로나 19, 군 복무 중인 아들의 휴가, 찌는 더위, 확실치 않은 계획,... 일상을 탈출해 보려 휴가를 냈지만 사각지대의 늪에 빠져 여름휴가가 어정쩡하게 하루 이틀 시나브로 지나가고 있다. 오늘도 오전이 스멀스멀 다 지나가려 한다.
출퇴근 길에 차창 밖으로 쳐다보며 지나던 산, 집에서 멀지 않지만 미답인 안양 비봉산을 올라보기로 했다. 안양 종합운동장 옆 비산동으로 차를 몰았다.
재개발을 앞둔 동네 멀쩡한 단독주택들과 빌라들이 인적 없이 텅 비었고 주인 없는 집 감나무에서 매미들만 한가롭게 노래를 하고 있다.
"숲 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파란 저 하늘이 더 파래지고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
과수밭 열매가 절로 익는다"
- 이태선 詞 박재훈 曲 <매미> 1절-
철거를 앞두고 텅 빈 주택가(좌)와 그 옆 아파트촌
유령마을처럼 텅 빈 골목 비탈길을 올랐다. 산자락 가장자리를 따라 휘도는 관악산 둘레길에서 능선 줄기 쪽으로 올라서자 망자들의 쉼터다. 무성한 풀숲에 덮인 무덤들 위로 내려쬐는 팔월 태양의 열기가 용광로처럼 후끈하다.
묘역 위쪽 성긴 숲 그늘로 들어서서 능선으로 향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무더위도 누그러뜨릴 기세로 맹렬하다. 능선 마루 한켠에 천막 아래 상석이 놓인 산제당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있다. 운곡, 매곡, 임곡 세 마을이 200년째 음력 10월 2일에 산제를 올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 뒤쪽에 벽과 천장을 두꺼운 검은 천막으로 두른 노아의 방주처럼 장방형 모양의 배드민턴 장이 있어 안을 힐끔 들여다봤다. 회원 명단이 빼곡히 적힌 백 보드가 걸린 천막 안에는 인적은 없고 관리인 한 분이 더위에 지친 표정으로 낯선 산객의 인기척에 얼굴을 내민다.
산허리 둘레길을 걷는 사람은 간간이 보이지만 산정으로 향하는 산객은 드물다. 봉긋 솟은 비봉산 산정 아래 가파른 골을 가로지르는 길에 바람이 살랑대며 산객에게 호의를 베푼다. 막바지 가파른 비탈을 올라 정상에 섰다. 하늘과 또렷한 경계를 긋고 있는 주변의 삼성산과 관악산의 준수한 능선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비봉산에는 지장사, 백운사, 망해암, 삼성사 등 여러 사찰이 깃들어 있다. 비봉산 서쪽 자락의 망해암을 거쳐 들머리 쪽으로의 원점회귀 코스를 염두에 두었다. '일산일사(一山一寺)'의 산행 모토를 달성하는 것은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우주선 발사대처럼 봉우리 정상부를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안양 항공무선표지소 쪽을 향해 안부로 내려간 후 다시 능선을 타고 올라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곳엔 바람도 솔솔 불어 낮잠이라도 한숨 자면 좋겠다 싶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비봉산을 마주 보고 앉으니 그 좌측 뒤편에 삼성산과 관악산이 듬직하게 자리하고 오른쪽으론 안양 시가지와 그 너머로 모락산, 백운산, 광교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뭉게구름을 머리에 인 관악산은 근육질 팔봉능선의 암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항공무선표지소가 자리한 비봉산 서쪽 봉우리까지 아스팔트 길이 놓여 몇몇 라이더들과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소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햇빛을 피하고 있다. 생소한 이름의 '항공무선표지소'는 비행기가 정해진 길을 따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비행하도록 안내하는 하늘길의 등대인 셈이다.
이곳 안양을 비롯해서 양주, 강원(평창), 송탄, 예천, 무안, 포항, 대구, 부산, 제주 등 국내에 총 10곳이 있는데, 방위와 거리 정보를 제공하고 관제탑과 항공기 사이 교신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봉우리 뒤쪽을 막아선 항공무선표지소 우측으로 끊긴 듯 나타나는 희미한 길을 휘돌아 망해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바위 전시장처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켜켜이 쌓인 능선을 내려서며 망해암 측면으로 들어섰다.
655년 원효가 창건한 망해암의 장독대
신라 문무왕 때인 655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망해암은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신경준의 <가람고(伽藍考)>에도 기록된 유서 깊은 사찰이라고 한다.
삼성각 옆 소나무 아래 너른 장독대에 가지런히 줄지어선 장독들이 눈길을 끈다. 삼성각 불단 앞에 누가 올린 공양미인지 '철원오대쌀' 한 포대가 놓여 있다.
용화전에는 세종 때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곡물을 싣고 오던 여러 척의 배를 풍랑에서 구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석조미륵불이 자리한다. 미륵불 앞에는 '순천만 쌀' 한 포대가 놓였고 몇 줄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은은히 향이 타오르고 있다.
천불전 지장전 맞은편 '망해암(望海庵)'이란 편액이 걸린 종무소에서 젊은 보살 한 분이 인기척에 얼굴을 내밀며 합장한다. 바다가 보일 리 없겠지만 바다같이 넓고 평온한 평정심을 찾고자 하는 발원이나 능선 위로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를 표현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 산길을 버리고 보덕사 쪽으로 난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자 이정표가 '관악산 둘레길'이라고 알려준다. 팔순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양손으로 스틱을 짚으며 망해암 쪽으로 잔걸음을 바삐 옮긴다.
닫힌 절처럼 인적이 없는 보덕사 경내 대웅전 앞마당에서 비둘기가 낯선 발소리에 놀라 급하게 날갯짓한다. 콘크리트 앞마당에 서니 봉긋 젖무덤 같은 비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장사, 불암사, 삼장사를 차례로 지나 산자락에 안긴 마을로 내려섰다. 슈퍼에서 배즙 주스 음료 한 캔을 마셨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고 여전하다.
둘레길의 할머니 / 산자락 텃밭과 아파트촌 / 철거될 주택가
원점 회귀를 위해 골과 골 사이를 길게 가르마하는 산줄기를 넘으려 안양동초교와 성산교회 사이로 난 길로 들어섰다. 산기슭은 비석도 없는 무명의 무덤들과 밭이 어우러져 발과 눈이 어지럽고, 그 아래쪽 고층 아파트를 올리는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고막을 때린다.
발밑이 푹푹 꺼지는 아카시아 숲 능선을 넘어서서 양궁장 가장자리로 난 둘레길을 거쳐 차를 세워둔 산행 들머리 골목으로 내려섰다. 텅 빈 주택가 텃밭엔 쟁반처럼 큰 토란 잎이 빼곡하고 빈 집 공터에는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주인처럼 어설렁거린다.
햇볕에 검게 탄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텅 빈 골목 저쪽 끝으로 사라져 간다. 숲은 산자락 가장자리까지 그늘을 드리웠고 골목 가로수에서는 매미들의 합창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숲 속의 매미가 노래를 하면 찬 이슬 아침마다 흠뻑 내리고 가을이 저만큼 다가온다죠 가을이 저만큼 다가온다죠" - 동요 <매미> 2절 -
빈집 정원의 감나무 대추나무에 달린 열매들은 씨알이 제법 굵다. 재개발을 앞둔 적막한 동네에도 동요 가사처럼 가을이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다.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