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허동천, 맑은 하늘에 잠긴 곳

강화도 마니산

by 꿈꾸는 시시포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 날이다. 밭 갈고 들나물 캔다는 시기이지만 코로나 19 사태로 사람들 마음에 봄은 아직 멀어 보인다. 영종대교를 건너면서 길을 잘 못 들어 김포시를 온전히 관통한 후에 대곶면 대명항 옆 초지대교로 들어섰다.

초지대교 너머 정족산이 보인다. 다리 끝에 방균복을 입은 사람들이 입도하는 차량 탑승자 발열체크를 하고 있어 다리 위 차량의 줄이 길다. 다리 좌우 물 빠진 갯벌에 크고 작은 고깃배들이 비스듬히 누워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강화도로 들어서니 도로는 헐렁하고 풍치는 산뜻하다.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원래 많은 섬들로 흩어져 있었는데 고려 때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700여 년 전부터 간척사업으로 영토를 넓히고 일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처음 여행했을 때 바다를 메워 거미줄처럼 겹겹이 운하를 만들어 건설한 도시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고려 고종 때 강화도 제포와 외포를 막아 좌 둔전, 이포와 초포를 막아 우둔전을 각각 만들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고 한다. 우리의 간척 역사도 네덜란드 못지않게 꽤나 오래된 셈이다.

정족산과 마니산 사이 너른 들판을 지나 화도 마니산 입구에 도착해서 차를 세우고 택시로 함허동천으로 향했다. 토박이 기사님은 강화도엔 아직 코로나 19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말이면 강화도를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청정지역이지만 마스크를 끼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신실해 보인다.

강풍 주의보가 내렸던 어제와는 달리 바람은 기세가 꺾여 풀이 죽었다. 영종도를 출발할 때 흐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역시나 마스크를 낀 함허동천 입구 안내소의 늙수그레한 매표원은 지금까지 열 명 정도가 입산했다고 귀띔한다. 세 갈래 주요 산행 코스 가운데 계곡을 따라 난 길로 향한다. 계곡 너럭바위 위에 승려 함허가 새겼다는 '함허동천'을 꼭 보려던 참이었다.

오른쪽 기슭 평편한 터에 거북 기단 위에 세운 '단검마니숭모(檀儉摩尼崇慕)'비로 걸음을 옮긴다. 비석 측면에는 대종교 기본경전으로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어놓은 '천부경'이 새겨져 있다. 뒷면엔 단기 4324년 개천절에 세웠다는 내용과 시주자 300여 명의 이름이 빼곡하다.

등산로가 계곡을 비껴 나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 비탈진 계곡 너럭바위 위에 ‘涵虛洞天’ 네 글자가 또렷하다. 가로 세로 각각 한 자쯤 되는 전서체 글씨가 흐르는 계곡물과 일체인 듯 유려하다.

세종 때의 승려 기화가 1426년 인근 정수사를 중수하고 수도한 이곳은 그의 당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능선 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대학시절 붓글씨 동아리에서 화양구곡으로 단합회를 갔었다, 계곡 바위 벽에 새겨진 '非禮不動' 글자 탁본을 뜨고 물놀이하던 그 여름날이 아련하다. 그 글자는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글씨를 골수 사대주의자 송시열이 새긴 것이라 한다.

예(禮)는 고사하고 변칙과 궤변, 억지와 몰염치가 난무하는 세상에 '비례물동'이란 경구는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非禮勿視, -聽,-言, -動'이라는 공자 가르침 대로라면 필시 눈 뜬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가 되어야 할 판이다. 온갖 장르의 예술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붓글씨는 예(藝)라기보다 도(道)'라고 하던 동아리 선배의 말이 새삼스럽다.

산기슭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바위들 틈틈이 참나무들이 비집고 들어서 있다. 새들의 노래는 들리지 않고 딱따구리가 썩은 나무줄기를 두드리는 소리만 부산하다. 나무 가지를 헤치고 스틱으로 경사를 지탱하며 길 없는 산기슭 사면을 가로지르고 능선을 넘어서며 정수사로 향했다. 함허동천 계곡 쪽과 정수사 쪽은 각기 산행 코스가 다르지만 두 쪽 다 놓치고 싶지 않고 또 일산일사(一山一寺)를 실행하려 몸이 고생을 한 셈이다.

곳곳에 자빠진 참나무들이 널브러져 썩고 있다. 잘린 밑동은 전염을 차단하려 비닐로 봉인되어 있다. 세상엔 코로나 19가 극성인데 이곳 숲은 '참나무시들음병'이 만연하고 있나 보다.

길 없는 기슭을 헤쳐 정수사 뒤쪽으로 내려서서 좌측 능선 마루의 함허 대사 부도탑을 둘러본다. 노송 한 그루가 호위하듯 부도탑 옆에 자리하고 있다. 정수사는 신라 선덕왕 때인 639년에 회정 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좌우로 오백나한전과 관음전, 뒤로 삼성각을 거느린 어깨 높이 화강석 축대 위의 단아한 대웅보전은 툇마루가 딸려 있어 여느 사찰과 달리 특이해 보인다.

관음전 앞마당에 올라서니 300년 수령 느티나무 뒤로 드넓은 갯벌이 햇살 아래 눈부시다. 대웅보전의 목탁소리는 작고 흐릿하지만 어린 마음을 경계하라는 듯 묵직하게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까치와 까마귀 한 무리가 놀음인지 다툼인지 서로 어우러져 까악 까악 깍깍 소란스럽게 소리치며 나뭇가지 아래위로 날개를 퍼덕인다.

능선으로 가는 계곡 길은 바위가 쏟아져 내린 너덜길이다. 전국 제1의 생기처(生氣處)라는 말마따나 바위들이 위압적이고 길은 가파르지만 발걸음은 그리 힘겹지 않게 느껴진다. 능선 마루에서 함허동천 코스와 만나며 마니산 정상까지 곧게 능선길이 뻗어 있다.

뒤를 돌아보니 너른 갯벌과 멀리 물러난 바다 너머로 신도 시도 장봉도가 호위하듯 빙 둘러 서있다. 왼쪽으로 고려의 별궁이 있던 흥왕리, 오른쪽으로 정족산과 길상산 너머로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눈에 들어오고, 앞쪽으론 천제단까지 이어지는 암릉이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대며 이어진다.

마니산은 본래 강화도와 떨어진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는데, 1706년 숙종 때 양쪽 포구를 둑으로 연결하고 간척하여 강화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마니산 동쪽과 북쪽으로 서로 뚝 떨어져 앉은 정족산, 길상산, 진강산 사이의 너른 들판이 원래 갯벌이었다니 경이롭다.

끝이 없을 듯 오르내리는 능선은 정수사 위 능선 마루의 "참성단 1.6km"라 적힌 이정표에 의구심이 들게 한다. 전후좌우로 펼쳐진 황홀한 풍치에 넋을 빼앗기며 연신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다 보니 참성단에 미치지도 못해 정오가 훌쩍 지났다.

좌측 마니산에 안긴 흥왕리에는 몽골에 대항키 위해 강화도로 왕도를 옮긴 강도 시기(1232~1270)인 1259년에 건립된 별궁 터 흔적이 남아 있단다. 정묘호란 때 인조의 피난, 숙종의 진·보·돈대·포대 축조, 병인·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등 강화는 섬 전체가 외세 침략에 저항한 역사의 현장이다.

좁은 암릉 좌측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곳곳에 안전 목책이 쳐져있고 우측 능선 아래쪽으로 우회하는 계단길이 놓여 있다. 7,8미터 길이 목제 칠선녀교를 건너고, 1717년 숙종 때 강화유수 최석항이 바위에 새긴 '참성단 중수비'를 지나고, '마니교'라 적힌 계단을 오르면 정상이 지척이다.

마니산 정상에 올라서니 일박이일 워크숍을 온 일단의 단체 산객이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摩尼山 해발 472.1m'라 적힌 나무기둥 옆 바위를 독차지한 부부는 인증숏을 남기려는 다른 산객은 안중에도 없는 듯 먹기에 열중이다.

시원한 남서풍을 맞으며 광활히 열린 사방을 한참 동안 둘러보고 발을 옮긴다. 백두와 한라의 중간에 위치한 이곳에 4000여 년 전 단군이 쌓았다는 참성단, 그 성전 둘레 철망 울타리는 출입문이 잠겨 있다. 안내판은 "국조 단군께서 기원전 2283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던 성스러운 곳"이라 설명한다.

화도 쪽에서 참성단으로 난 긴 '삼칠이 계단' 막바지를 올라서는 산객들은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힘겨워한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올라오는 가족들도 적지 않다. 뒤돌아 서서 참성단을 흘깃흘깃 올려다보며 앞쪽으로 다가오는 석모도를 보며 능선을 내려간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끝없이 이어진 계단길을 따라 참성단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그쪽 코스를 피해서 '단군로'라 이름 붙은 코스로 택했다.


계단길과는 달리 아늑하고 너른 흙길에 발이 한결 편하다. 웅녀가 마늘과 쑥을 먹고 삼칠일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린다면 에스라인 몸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어쭙잖은 생각이 들며 '웅녀 계단'을 내려섰다.

관광안내소로 나서기 전 계곡 옆에 '그림 있는 쉼터'에 들렀다. 차와 음료를 파는 작은 쉼터 안 벽과 기둥에 인두로 그린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좁은 책상에 앉아 가로로 자른 나무를 캔버스 삼아 인두로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작가에게 엄지를 한 번 치켜세워 드렸다.

천제단 모형과 신단수 조형물 등이 있는 개천 마당과 천부인 광장 등을 둘러보았다.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온 환웅, 사람 되기를 원했던 곰의 인내, 단군의 개국 이념 '홍익인간',.. 이런 얘기들이 전설이 아니라 사실처럼 와 닿는다. 얘기에 담긴 뜻이 고결하고 숭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개발의 난도질을 피해 신단수가 우거진 인간에게 이로운 곳으로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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