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선산 비봉산 산행

by 꿈꾸는 시시포스

이른 아침 아파트 앞 바람이 서늘하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더니 처서가 코앞이니 그럴 만도 하다.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입추가 지났으니 온갖 곡식과 과일들도 부지런히 여물어 갈 것이다. 끝날 줄 모르고 기세를 떨치는 세상 모든 것들도 언젠가는 노쇠해지고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화무십일홍이 꽃에 국한된 얘기일까.

선산 비봉산으로 원행을 하기로 했다. 승객 열 명을 태운 성남발 부산행 고속버스가 출발했다. 폭염이 물러나고 날이 맑아 미색 구름이 피어오른 하늘은 높고 고속도로변 산천은 멀리까지 또렷하게 눈 앞으로 다가온다.


두 시간쯤 지나서 수선산과 복우산 자락이 만나는 능선 아래 상주터널을 빠져나오니 선산휴게소다. 느긋하면서도 한편 조바심이 인다. 휴게소 아래 지방도로 내려서서 잡아 탄 택시가 10여 분만에 읍내 선산객사(善山客舍)에 닿았다.

선산객사(위)와 선산읍사무소(아래)

동국여지승람에 세종의 치세인 1492년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단층 객사 모습이 아름답다. 그 옆 번듯한 시청 출장소 건물 입구 양 옆에 서있는 두 그루 생기가 넘치는 느티나무 고목이 늠름하다.


봉황의 형상을 닮았다는 비봉산과 형제봉, 산행 기점은 봉황의 이마에 해당하는 비봉산 아래 자리한 충혼탑 입구다.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해발 122미터 비봉산 기슭에 우뚝 솟은 충혼탑이 선산읍과 그 앞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과 멀리 금오산을 한눈에 굽어보고 있다.


충혼탑 계단 중간쯤 오른편의 항일 독립유공자 13인 공적비를 둘러보고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임도처럼 넓고 평탄한 흙길이 사박사박 기분 좋게 밟히고 맨손에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 나온 주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충혼탑에서 바라본 금오산과 독립유공자 공적비

산길 따라 간간이 서 있는 목판에 적힌 시, 려말 성리학자 야은 길재, 1907년 13도 창의군을 규합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 항일 의병장 허위, 사육신의 한 분인 단계 하위지, 문신으로 관동록(關東錄) 등 문필집을 남긴 이우 등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의 시를 음미하며 쉬엄쉬엄 걸음을 옮긴다.

시냇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히 사니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이 절로 나네
찾는 이는 없고 산새 소리만 들리니
대나무 언덕에 평상 놓고 책을 보네
- 야은 길재의 <한거(閑居)> -

손들이 떠나가고 바람 자고 달이 지니
술독을 다시 열고 시구절을 읊어보네
아마도 산속 즐거움은 이뿐인가 하노라
- 단계 하위지의 시 -


야트막한 비봉산 좌측 허리로 돌아가면 비봉산 뒤쪽 정자와 체육공원이 나온다. 충혼탑 쪽으로 50여 미터, 아무런 표지도 없는 비봉산 정상을 다녀오니 체육공원에서 큰 소리로 호방하게 웃어 젖히던 백발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형제봉으로 가는 능선 마루까지는 봉황의 긴 목덜미에 해당할까? 지하 160미터에서 끌어올렸다는 암반수로 목을 축이고 본격적인 산행에 올랐다. 영봉정까지 1km여 솔밭 오솔길 옆으로 「비봉산의 유래」, 「선산의 역사」, 「우리 고장의 인물」, 「서울이 못된 선산」 등 안내문이 연이어 늘어서 있다.


'백 골짜기에서 하나가 모자라 왕도가 되지 못했다'는 전설이나, '조선 인재 반은 영남에서 났고 영남인재 반은 선산에서 났다'는 기록도 있으니 산수와 인물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은 유별날 만도 하지 싶다.


능선 마루 팔각정자 영봉정(迎鳳亭) 위에서 주민 몇 분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2층 정자 위는 충혼탑에서보다 좌우가 더 넓게 터인 전망을 펼친다. "학문이 천명되어 훌륭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시민의 운세가 솟는 태양과 같고 무성한 숲처럼 번영하기를 기원한다"는 건립 취지문이 남다르다.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는 선산군 호구 수가 1,005호 12,012명, 인동현이 657호 4,551명이었다고 한다. 변두리였던 구미가 공업도시로 변하면서 역으로 선산이 그에 예속되었으니 주객이 바뀌는 것은 예사요 영원한 갑도 을도 없는 것이 세상사인가 보다.

영봉정에서 기양(연악) 지맥 분기점인 해발 434m 능선 마루까지 2km여는 호젓하고 순한 오르막 솔길이다. 대 숲이 산 언저리에 간간이 있었지만,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봉황이 솔잎도 좋아한다면 큰 날갯짓으로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 같다. 하늘에는 태양이 숨바꼭질하듯 구름 뒤로 숨었다 나왔다 한가롭다.

능선 마루 봉황의 어깻죽지 가운데 지점은 비봉산 왼쪽 날개인 신산(神山)과 오른쪽 날개인 형제봉의 갈림길이다. 외면할 수 없어 들어선 신산 쪽 능선길 넝쿨이 발목을 잡고 넘어진 나무가 앞을 막아선다. 한 배에서 난 형제도 습성과 기질이 다르듯 한 봉우리에서 갈라져 나온 능선인데 습생이 서로 판이하다.

내려섰던 골에서 신산으로 오르는 길 나뭇가지 사이로 노루 한 마리가 능선 너머로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토끼는 등산로 옆에 크고 깊은 굴을 파 놓았다.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 나뭇가지와 거미줄을 피하고 넝쿨을 밟고 넘었다. 땀이 흐르고 다리가 뻐근해지면서 가까워 보이던 봉우리가 멀게 느껴졌다.

'기양 지맥 신산 457m'라는 표지판이 나뭇가지에 걸린 정상은 별다른 조망이 없다. 분기점으로 돌아와서 형제봉 쪽으로 들어서니 다시 활달한 솔숲 길이 이어진다. 마사토처럼 밝고 경쾌한 흙으로 덮인 육산의 능선 위 한가운데 떡 버티고 누워 있는 거대한 바위들, 부처바위가 이채롭다.

부처바위 위에 올라서면 옥성면과 도개면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눈에 들어온다. 부처바위를 지나 오른쪽 기슭 옥성 자연휴양림으로 난 포장 임도를 가로질러 비탈을 오르고 헬기 착륙장과 능선 마루를 두어 번 지나야 형제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531m 형제봉, 제일 높은 이곳을 '봉'으로 122미터 야트막한 비봉산을 '산'으로 부르는데 대해 많은 산객들이 의아해한다. 비봉산 형세가 봉황을 닮았다 믿는 이곳 사람들이 어깻죽지에 해당하는 형제봉 대신 봉황 머리 부분을 주봉으로 보아 '비봉산'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 싶다.

형제봉 뒤편 낙동강은 비봉산 왼쪽 신산 줄기를 휘돌아 선산읍 앞에서 감천을 끌어안고 남으로 흘러간다. 어제저녁 뉴스에 "낙동강 수질 6등급 최악 전락, 수질개선 손 놓은 환경부"라는 소식을 전하던 낙동강 물줄기는 산줄기와 평야 사이로 유유자적하다.

형제봉 아래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산불감시초소는 문이 닫혀 있다. 봉황의 오른쪽 긴 날갯죽지를 따라가는 하산길도 평탄하고 쾌적한 솔길이다. 능선 오른쪽으로 선산휴게소와 대원 저수지, 그 너머 연악산에서 수선산을 지나 뻗어온 능선이 솟아오른 원통산, 앞쪽으론 광덕산, 월유봉 등이 눈에 들어온다.

통일신라 때 만든 국보 제130호 죽장사 오층 석탑을 다시 찾지 못한 아쉬움을 능선 중간에 솟아있는 바위에 올라 오른편 산자락에 안겨있는 죽장사를 보는 것으로 달랬다.

우백호 격인 우측 능선 끝으로 내려서니 원각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아파트와 이웃해서 산기슭에 기대어 자리하고 있다. '그 원각사가 바로 이 절이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원통전을 들여다봤다. 본존불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가지런히 가부좌하고 있다.

이곳서 이십여 리 떨어진 무을 연악산 기슭의 수다사, 소풍 단골 목적지였던 그곳 대웅전에 아미타불이 협시 보살도 없이 홀로 대웅전을 지키고 있어 늘상 외롭고 쓸쓸해 보였었다.

1968년 원각사 대세지보살상 복장유물의 불상 조성기, '순치(順治) 6년(1649년)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지 수다사 아미타불은 언제 어디서 누가 조성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약간 구부린 모습이 수다사 아마타불과 닮은 원각사 대세지보살상, 수다사를 떠나 이곳으로 오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미아가 된 관음보살상과 함께 수다사로 돌아와서 아미타불과 재회하여 나란히 자리하면 좋겠다.

연락이 닿은 고향 친구 G와 선산객사 앞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하며 지내온 얘기를 나눴다. 중학 졸업 후 처음 본다는 세월에 한 번 놀라고 어제 본 듯 스스럼없음에 또 한 번 맞장구치며 놀란다.


옛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읍내를 벗어나 친구와 작별했다.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산줄기 너머 용암처럼 붉던 저녁노을이 잦아들며 어둠이 내리고 있다.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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