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지나는 관악산

삼성산과 관악 팔봉능선

by 꿈꾸는 시시포스


구월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아침 공기가 청량하고 하늘은 높다. 탄천을 가로질러 야탑천을 따라 쌍용아파트 정류장으로 갔다. 도촌에서 출발한 3330번 버스는 서현 판교를 거쳐 외곽순환도로 진입 후 청계 고개를 넘고 평촌을 지나 종점이자 회차지인 안양역까지 갈 것이다.

버스가 평촌을 지나 구 안양으로 들어서자 도로와 주택 그리고 빌딩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성남, 안양, 고양은 각각 분당, 평촌, 일산이라는 색다른 태생의 신도시라는 형제와 동거하는 도시들이다. 새것과 옛것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때로 알력 하며 용납, 융화, 공존하는 부조화의 조화가 절묘하고 경이롭다.

호암 산문은 호압사의 일주문 인양 우뚝 솟아 호암산의 들머리를 알려준다. 그 앞에서 봇짐을 등에 멘 보살 한 분이 합장하고 호압사로 난 경사진 시멘트길을 오른다.

그 길로 들어서며 몸을 낮추고 걸음걸이를 조절했다. 자고로 멀리 가려는 자는 제풀에 쉬이 지치지 않게 보폭을 작게 하고 높이 오르려는 자는 자세를 낮추며 서두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호압사 뒤 능선은 서울 둘레길과 호암산 삼성산으로 가는 산행 길이 교차한다. 그 길을 이른 아침이나 새벽에 집을 나섰을 얼리버드들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호암산 가는 능선 곳곳에 웅크리고 앉은 호랑이 모양, 병풍 모양, 공깃돌 모양 등 온갖 형상의 거대한 바위들에 넋이 빼앗겨 자꾸 눈길을 주다 보니 나아가는 걸음이 더디다.

호압사 뒤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와 조금 지난 조망점에 올라서면 툭 터인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관악에 안긴 서울대 캠퍼스, 여의도 63, 잠실 롯데 등 드넓은 서울 벌을 가득 채운 빌딩 숲, 햇빛에 반짝이는 주홍빛 양화대교를 비롯한 한강을 가로질러 놓인 교량들...

서쪽 멀리 인천의 문학산과 청량산 너머로 삐쭉 솟은 인천대교 교각, 광명의 도구 가서-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서독산- 능선, 계양산과 그 너머 마니산, 그리고 북악 백운 북한 도봉 수락 불암 남산 아차 등 서울 주변의 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다.

단체 산행객이 많은 서울대 입구나 사당에서 오르는 산행 코스와는 달리 삼성산 쪽은 혼자나 두어 명 단출한 산객들만 드문드문하다. 주로 세상의 짐을 얼마쯤 내려놓았을 법한 신선풍의 반백이나 백발의 산객들이 많다.



능선을 치고 오르며 세차게 부는 서늘한 초가을 바람이 이마와 몸에 밴 땀을 식혀주고 기운을 돋궈준다. 주위 풍광을 조망하거나 조용히 생각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호암산에서 장군 능선을 따라 삼성산으로 가는 길은 갈림길이 많지만 이정표가 드물어서 자칫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높고 낮은 봉우리들도 표지석이 없어 이름을 알 수 없다. 이름은 있지만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민주동산과 헬기 포트 지점을 지났다.

낯선 산길에 이정표가 요긴하듯 인생에서 만나는 갈림길은 산길보다 수천수백 배 많을 터이니 가르쳐주고 코칭해주는 멘토가 없다면 아찔하지 않겠는가. 잘못 든 산길처럼 어긋난 인생길은 되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나는 종종 길이 희미하거나 길을 잘못 든 때면 목적지 방향을 더듬고 찾아 그 길을 택해 나아간다. 또 지도 앱을 들여다보고 마주치는 산객들에게 길을 묻기도 한다. 자세히 알려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로부터는 잘 모른다거나 엉뚱한 대답을 듣기도 하지만.

산행 중 만나는 빠른 걸음 무리한 추월도 서슴지 않는 산객은 대체로 혈기왕성한 젊은이다. 가파른 경사와 다투고 능선과 씨름하거나 다그치며 산을 오르는 모습이 마치 산을 정복하려는 듯 보인다.



산에 푹 빠져들어 느긋하게 산과 하나가 되는 것이 산을 오르는 묘미가 아닐까. 그래서 산을 오르는 것은 '등산' 보다 '산행'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사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전쟁이요 누군가에게는 더불어 어울려서 한바탕 노는 신나는 놀이다.

바위로 된 봉우리 위에 탑처럼 암석이 솟은 깃대봉에 올라 툭 터인 사방을 조망했다. 장쾌한 경관이다. 깃대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호방하게 휘날린다.

할머니 세 분이 산을 오르며 다가올 추석을 걱정한다. 손주들 세뱃돈으로 지갑과 주머니는 더욱 얇아지게 될 것이라고. 할머니들 뿐이랴. 명절은 누구에게나 마냥 즐거운 날은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고역일 수도 있다.

거대한 철탑을 머리에 인 삼성산에서 무너미 고개로 내려가는 긴 능선은 늠름하고 굳센 관악의 온전한 모습을 내내 조망하며 걷는 길이다. 그 속에 안기는 것도 좋지만 보면서 걷는 것도 더없이 좋다.

고도 270여 미터 브이 자형의 협곡인 무너미 고개는 서울과 안양을 잇는 좁은 길로 바닥에 깔린 자갈 사이에 물기가 촉촉하다. 무너미에서 깃대봉 쪽으로 방향을 잘못 잡아 계곡을 넘고 능선을 가로지르는 소위 '알바'를 했다.

모기와 날파리가 달려들고 거미줄이 곳곳에서 앞을 가로막고 깊이 쌓인 낙엽에 발목이 빠지며 팔봉 쪽 능선을 찾아 길을 잡았다.

팔봉 초입 제1봉 아래쪽에 다다르니 봉우리 위쪽에서 터져 나오는 '얏호' 함성이 팔봉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린다. 제1봉 아래 왕관바위가 푸른 숲 속에서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팔봉능선의 제8봉 국기봉에서 1봉 쪽으로 넘어오는 산객들이 많다. 어떤 이는 바위봉을 타고 넘고 어떤 이는 우회한다. 나도 어떤 암봉은 우회하고 어떤 봉우리는 타고 넘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봉우리들을 하나씩 지나며 나아갔다.



게양대 위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는 제8봉, 그래서 동명이봉인 '국기봉'을 지나 과천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탔다. 저번에 올라왔던 육봉 능선 옆 다소 평탄해 보이는 능선을 하산 길로 택했다. 왼쪽으로 연주대 오른쪽으로 육봉 능선이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능선 중간쯤 나무 그늘이 진 바위에 앉아 휴식하며 샌드위치 커피 바나나로 허기를 달랬다. 지친 몸은 바나나와 커피를 달고 향기롭게 받아들인다. 능선을 타고 넘는 바람이 서늘하게 마음속을 쓸고 지난다. 시야는 멀고 넓다.

높은 하늘 하얀 뭉게구름 사이 까마득히 멀리 자유로운 영혼처럼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영혼이 불멸한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호암과 관악의 구월은 아직 여름이 다 지나가지 않은 듯하다. 김삿갓이 구월산을 지나며 '작년 금년 매년 구월 구월산을 지나는데 구월산 풍광은 늘 구월'이라고 읊은 구월산의 구월 풍광이 궁금해진다. 지금은 갈 수 없는 산, 방랑시인의 멋드러진 시 한 수로 짐작할 뿐...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네.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
구월산 풍경은 늘 구월일세.

- 九月山(구월산) / 김삿갓(1807~1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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