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금오산, 봄의 꽃 잔치 고드름의 눈물

황금빛 까마귀 전설 간직한 금오산 산행

by 꿈꾸는 시시포스

새벽에 몸을 일으켜 원행에 나설 채비를 했다. 강남 고속버스 경부선 터미널은 예전과 달리 유저 프랜들리하고 산뜻하게 변해있다. 이곳에서 고속버스를 탔던 기억이 까마득히 멀다.

터미널 지하상가 철문은 아직 대부분 열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 06:40분발 구미 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빈자리 서너 개만 남기고 승객들로 가득 찼다. 경부고속도로는 초입부터 차량들로 빽빽하다.

전용차로를 막힘없이 달린 버스는 금강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휴게소 옆 황톳빛 금강 물길은 요 며칠 내린 비로 제방을 삼킬 듯 호기롭다.

정지용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회돌아 나간다는 옥천(沃川), 달이 놀다 가는 월유봉(月遊峯)이 있는 황간을 지났다. 멀리 무채색 높은 산줄기와 달리 가까이 스쳐 지나는 능선은 물에 연둣빛 물감을 떨어뜨린 듯 신록이 번지고 있다.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을 지날 즈음 도로변 능선에는 참꽃이 나물 캐러 나온 수줍은 처녀들처럼 얼굴에 잔뜩 홍조를 띠었다.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서면 김천 고을이다. 꽃 잔치를 벌인 듯 온통 분홍빛으로 덮인 모교 뒷동산 송정(松庭)도 멀리서 스쳐 지난다. 봄이면 교문에서 교정까지 이어진 벚꽃 터널을 지나 등교하던 때가 어제 같다.

버스가 출발 세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속 시외 통합 터미널인 구미터미널은 인구 43만 도시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왜소하고 낡았다. 장거리 여객운송의 몫을 철도에게 빼앗긴 탓도 있을 것이다. 터미널에서 금오산 입구 주차장까지는 택시로 족히 십오 분여면 충분하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노을 속으로 나는 황금빛 까마귀를 보고 이름 붙였다는 금오산은 영남 팔경의 하나로 70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고속도로를 지날 때 멀리서 그 모습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한 번 오리라 벼르던 이 산을 오늘에야 찾는다.


금오산 도립공원 탐방안내소 옆 자연보호 헌장탑 조각상을 둘러보고 등산로로 들어섰다. 산행 코스를 대혜 문-영흥정-해운사-도선굴-대혜폭포-할딱 고개-오형 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현월봉-헬기장-성안 연못-칼다봉-금오지로 정했다.

금오산성의 정문 격인 대혜문으로 오르는 길 머리 위로 해운사까지 연결된 케이블카가 지난다. 산정에서 주능선을 타고 산 밑자락 계곡까지 내려온 성곽과 연결된 대혜문을 들어섰다. 누각 위로 올라서서 보니 계곡 좌우로 나무들은 순백 황금 분홍 등 자기만의 빛깔로 꽃을 피웠다. 선경이 따로 없지 싶다.

대혜문을 지나면 우측에 지하 168미터에서 하루 120톤의 알칼리성 석간수를 솟아낸다는 영흥정(靈興井)이 있다. 약수를 한 모금씩 마셨다.

금오지로 흘러내리는 대혜문 왼편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다. 오른편 바위 절벽에는 신비로운 모습의 도선굴이 자리한다. 그 아래 신라 승려 도선이 창건한 고찰 해운사(海雲寺)는 고요하다. 대웅전 등 전각을 들여다보니 삼삼오오 간절한 발원의 합장이 이어지고 있다.


해운사 뒤 절벽의 도선굴은 깎아지른 암벽에 철책을 세우고 좁게 낸 벼랑길을 지나야 닿는다. 도선은 수직 절벽에 크게 뚫린 입구 뒤로 너른 공간의 이 천연 암굴에서 수행을 했더란다. 굴 위 절벽에서 굴 입구를 스쳐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는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를 피해 숨어든 피난민에게 생명수였다고 한다.

도선굴과 할딱 고개 갈림길 해발 400미터 지점에 280미터 높이 대혜폭포가 웅장하다. 명금폭포(鳴金瀑布)로도 불리는데 폭포수가 그 이름처럼 금오산을 뒤흔들듯 계곡을 가득 채우며 울린다. 폭포 암벽에 ‘욕담(浴潭)’이라 새겨진 이곳에서 조선 최고의 과학사상가로 불리는 대 성리학자 여헌 장현광(1554~1637)과 그 문도들은 연중행사처럼 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폭포를 뒤로하고 오르는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된 가파른 길은 할딱 고개까지 길게 이어진다. 할딱 고개 위 툭 터인 바위 능선에 올라서면 가까이 계곡 건너편 도선굴, 멀리 계곡 좌우측에서 아래로 교차하는 능선들 사이로 금오저수지가 눈앞에 다가온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등산로 옆 곳곳 바람에 꺾인 소나무 가지나 줄기가 널브러져 있다. 바위틈에서 역경을 딛고 옹골차게 자란 키 작은 소나무와는 달리 필시 곱게 웃자란 나무일 터이다.


할딱 고개를 지나고 고드름이 열린 암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오백 여 미터를 오르면 낙동강을 굽어보는 해발 800여 미터 절벽 위에 어른 키 높이의 돌탑 군락이 있다. 도량동에 거주하는 김용수 옹이 열 살 때 세상을 떠난 선천 장애 손자를 위해 쌓고 금오산과 손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오형'돌탑이라 했단다.

탑을 이룬 수 천 수 만 개의 돌 하나하나에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간절함과 애절함이 배어 있을 것이다. 탑을 돌아보며 합장하던 70세쯤의 그 노인이 필시 그 분일 터이다.

오형 돌탑 군락을 뒤로하고 마애불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생강나무와 현호색이 꽃을 피웠고 흙 길 곳곳에는 물기가 얼어서 장탉의 발처럼 땅 위로 돋았다.

국보 490호 마애보살입상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거대한 암벽 모서리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이다. 바위의 결을 따라 얼굴 등 신체와 사지를 4미터 여 높이 마애불로 또렷이 끌어낸 석공의 손길이 경이롭다.


마애불 지나 바람이 잔잔한 기슭에 보랏빛 현호색이 지천으로 꽃을 피웠다. 현월봉 오르는 길 절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은 봄 햇볕이 따가운지 저만치 물러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현월봉 아래 암벽에 둘러싸여 아늑한 약사암을 지나 위쪽 능선의 '동국 제일문'이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을 지나면 이내 정상으로 평탄하게 이어진 능선이다. 능선 너머 김천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다.

정상 쪽에서 제일 먼저 거대한 높이의 통신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현월봉에는 정상과 그 아래 멀찍이 각각 하나씩 정상 표지석이 서있어 의아했다. 1953년 주한미군의 통신기지에 내주었던 정상과 기지 일부를 60년 만에 돌려받아 표지석을 새로 세운 까닭이라고 한다.

이념 분단 자주 등 좀체 풀리지 않는 난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 영험스러운 산의 본모습을 훼손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막았다니 애석한 일이다. 그뿐만도 아니다. 정상 아래 능선을 타고 넘는 송전선로와 송전탑은 여전히 흉물스럽게 버티고 서서 도립공원의 격을 깎아내리고 있다.

해발 976미터 우뚝한 현월봉은 사방을 굽어보고 섰다. 낙동강 상류 해평의 냉산, 강변 구미공단과 산자락에 안긴 마을들, 교자상 모양의 천생산을 뒤로하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인동(仁同)의 모습도 또렷하다.

금오산 정상에서 칼다봉 방향 8백 미터 아래에 천연 분지 성안마을이 있다. 마을로 내려오는 능선에 서있는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는 이 마을에 만여 명이 족히 거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발 8백 미터에 한때 이런 마을이 조성되었고 더구나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 개 우물과 일곱 개 연못이 있다고 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사찰 주위에 백 개의 연못이 있다는 백담사는 큰 산 설악이 품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금오산 '구정칠택'은 믿기지 않는다. 성안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 옆에 능선 위쪽에서 내려오는 실개천이 만든 연못과 실개천을 따라 100여 미터를 거슬러 올라 능선 바로 아래에 샘처럼 물이 솟고 있는 수원지를 손수 확인하고서야 감탄사를 토하며 고개룰 끄덕였다.

성안 연못과 금오지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의 발원지에서 다시 등산로로 내려와서 칼다봉으로 가는 능선길로 들어섰다. 한쪽이 절벽으로 그대로가 천혜의 성벽이나 다름없는 능선 중간중간 돌과 바위를 쌓은 흔적이 남아있다.

해발 715미터 칼다봉 능선 왼편 가파른 바위 절벽에 와 부닥치는 바람 소리는 폭풍인 듯 파도인 듯 거칠다. 바람은 사정없이 나무를 흔들고 산객의 모자챙을 뒤집으려 달려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처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흔드는 것이 바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금오지 유선장 쪽으로 난 가파른 비탈, 완만한 능선, 바윗길, 포근한 흙길, 자갈길 등 다채로운 긴 능선을 따라 하산했다. 금오지 둘레길 꽃놀이 행락객들은 여유롭고 가까운 듯 멀리서 현월봉은 산객에게 잘 가라고 배웅하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