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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04. 2020

광백과 우담바라

광교산 백운산 우담산 바라산

금년도 절반이 다 지나가려 한다. 하오재 고개에서 남진하려던 애초 산행 계획을 광교 쪽에서 북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청계 고개를 지나는 차편이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광교역에서 내려 광교산 남쪽 자락의 경기대 교정을 후문에서 정문 쪽으로 가로질렀다. 코로나 19로 인해 불타는 파토스로 지고한 로고스를 추구해야 할 드넓은 상아탑엔 새소리만 시끌하고 멀리 능선에서 뻐꾸기 소리도 가끔씩 내려앉곤 한다.


광교저수지 쪽 들머리에는 제법 많은 산객들이 동행을 기다리거나 등로로 향하고 있다. 비가 한두 방울 듣는다. 더위도 주춤하니 여러 방향과 코스로 많은 산객들이 산정을 향해 오를 것이다. 등산의 목적을 등정보다는 등정 과정에 두는 머메리의 '등로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만큼 처음 찾는 이 코스가 스스로 흡족하다.

들머리 '반딧불이 화장실'은 산행 채비를 하기에 요긴해 보인다. 좌우로 광교저수지와 캠퍼스를 낀 능선을 따라 광교산 속으로 든다. 평탄하고 너른 산길이 형제봉 직전까지 십 리 남짓 이어진다. 너덜길이나 비탈길과 달리 발 디딜 곳 걱정 없이 내딛는 발걸음이 수월하고 편하다.

"100대 명산 인증했죠?"
"인증이 중요한 게 아냐."
젊은 산객 둘은 큰 배낭을 하나씩 둘러맸고 선배로 보이는 산객은 손에 든 큰 쓰레기봉투에 집게로 쓰레기를 주워 담으며 후배 앞에서 몸소 산교육을 실천해 보이고 있다.

능선 위쪽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린다. 비탈이 시작되는 곳에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고 계시다. 이른 아침 산객들을 찾아 오산의 어느 사찰에서 오셨더란다. 산행 중에 여러 사찰에서 점심 공양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보시하는 마음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 온 지폐 한 장을 탁발함에 넣었다.


돌고 도는 것은 돈이라지만 사랑도 원한도 복수도 돌고 도는 것이니 삼가 악업 짓지 않기를 바라며, 묵주 하나를 건네주려는 스님에게 손사래를 치며 발을 옮긴다. 목탁 소리는 능선 마루까지 길게 이어진 나무 계단이 끝날 때까지 끊이지 않고 뒤를 따라온다.


계단길이 다하고 노송들이 바위틈으로 굵은 문어발 같은 뿌리를 드러낸 길을 오르면 형제봉 암벽이 앞을 막아선다. 암벽 위로 새로 놓인 나무계단 옆에는 예전에 타고 오르던 밧줄이 그대로 걸려있다.


산객들이 바위틈에 비집고 선 노송과 함께 해발 448미터 형제봉 표지석 주위 바위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고 있다. 표지석은 친구들과 3년 전 올랐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다.

형제봉에서 비로봉 쪽으로 내려서는 나무계단 길 옆 숲에서 어린 아기 고양이 서너 마리가 장난을 치는 고양이 가족이 지나는 산객들이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주말 아침을 즐기고 있다.

평탄한 능선을 지나 이어지는 나무 계단 길은 어른 셋이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만치 너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은 옛말이고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 단지나 주택들이 산 밑자락으로 파고든다. 늘어난 인근 주민들이 휴식을 찾아 밀려들어 좁은 옛길이 버텨내기가 힘겨웠을 것이다.

노 산객이 짊어진 배낭 속 스테레오에서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온다. 느릿하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옛 트롯과는 달리 바쁜 현대인의 취향을 반영한 현대 트롯의 행진곡 풍 빠른 템포에 발걸음과 호흡을 맞추기가 버거워 보인다.

비로봉 바로 아래 등로를 조금 벗어난 곳 가파른 사면 높은 암벽에 "忠襄公金俊龍勝戰地"라 적힌 전승비가 있다. 병자호란 때 전라 병마절도사였던 김준용(1586~1642) 장군이 청 태종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 등을 사살하고 승전한 사실을 정조 때 화성 축성 총리대신이던 채제공이 새긴 것이라 전한다.


대다수 산객들은 가파른 비로봉 쪽을 피해 토끼재로 우회하여 시루봉으로 향한다. 비로봉에는 최치원의 일화를 들려주는 망해정(望海亭)이 자리하고 있다. 당에서 이름을 떨치고 29세에 귀국한 최치원, 골품제의 족쇄에 좌절하여 전국을 떠돌다 이곳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울릴 사람이 없는 종이 자신의 신세가 같다고 한탄했단다. 비로봉을 종루봉으로도 부르는 까닭을 알겠다.


시루봉 쪽 능선으로 내려서서 고도 450여 미터 능선을 따라 걷는다. 구름에 가려 태양은 빛을 감추었고 까마귀 울음소리는 경쾌하다. 옅은 바람은 시원하고 간간이 바람에 실려오는 끈적한 밤꽃 냄새는 덜 익어 떫은 감이나 드라이한 풀 보디(full-body) 와인의 맛을 연상케 한다.


"힘드시죠?"

"예, 44년생 원숭이 띤데, 이 정도면 괜찮지요?"


시루봉 언저리에서 양손으로 스틱을 짚고 비탈길을 오르는 트롯 노 산객과 다시 마주쳐 지나며 두어 마디 주고받았다. 한자 '七十七'을 세로로 써놓으면 '喜'와 비슷한 데서 유래했다는 희수(喜壽), 젊은이 못지않게 산을 오르고 있는 노 산객의 노익장이 오래도록 꼿꼿하길 마음으로 응원해 본다.


너른 나무 데크 가운데 바윗돌 하나가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해발 582m 광교산 정상에 올라섰다. 부지런한 노상 한 분이 아이스박스 하나를 놓고 있는 모습은 지나온 다른 봉우리와 다름이 없다.


표지석이 있은 곳에서 우측 고기리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어 250여 미터를 진행했다.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가 나오는데 그 위에 올라서면 사방이 훤히 조망된다. 지도 앱은 이곳이 가장 높은 고도의 시루봉으로 표시하고 있다.


은판나비 한 마리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산객을 붙잡는다. 잠시 방향을 잃어 아무도 찾지 않는 시루봉 정상을 확인하고, 또 지리 설악 속리 가야 치악 태백 등 고산에서 주로 서식한다는 이쁜 나비를 이곳에서 우연찮게 본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새벽이슬 머금은 산에 오르면
고향 어머니 가슴이 느껴진다.
늦은 밤 반딧불이 축제를 열고
종달새, 꾀꼬리 새벽잠 깨우는
푸른 광교산은
우리 어머니를 너무 닮았다.
- 장세영의 詩, 1999.「광교산」中 -


광교산 표지석이 있는 곳을 다시 지나며 백운산 쪽으로 길을 잡는데 시 한 편이 산객의 눈길을 잡는다. 수원시 장안구의 <광교산에 어울리는 시 공모전, 1999>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수원북중 학생은 지금쯤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루목 대피소를 지나고 긴 계단을 오르면 500여 미터로 고도를 높인 능선이 중간중간 우뚝우뚝 암봉들을 세워 놓았고 지친 산객들은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허기를 달랜다.


백운산 쪽 봉우리들을 송전탑과 레이다 기지가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능선 한가운데를 턱 막아선 통신대 울타리를 한참 휘돌면 의왕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와 정상 표지석이 자리한다. 이곳 백운산 정상은 청계산과 광교산을 잇는 코스를 주파하는 '청광 종주' 산행에서 필시 거쳐가야 한다.


곧이어 지나갈 '우담바라'라고 불리는 우담산과 바라산은 고분재와 바라재를 끼고 하오재 고개 너머 청계산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청광 종주' 산행의 난코스로 꼽힌다. 지치고 서서히 허기도 지기 시작할 즈음 연이어 봉우리와 고개를 오르내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분재를 지나고 바라산으로 오른다. 광교산과 백운산 광백 능선을 지날 때 인접 수원 안양 시청에서 코로나 19 확진자 발생 알림 문자가 하나씩 날아들었는데 이번에는 성남 시청에서 한 개 날아든다. 너른 나무 데크가 놓인 바라산 정상을 지나고 바라재 쪽으로 난 '365 희망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내려간다. 도랑처럼 깊고 좁은 바래재를 건너 1.1km를 오르면 해발 425m 우담산이 평평하고 너른 정상을 내놓는다.


하오재까지 2.4km는 더 이상 오르막이 없어 마음이 편하다. 산객도 드문 노송 숲길이 호젓하다. 폭신한 흙길 위엔 땀의 흔적인양 스틱 자국들이 수북하다. 하오재 고갯마루를 내려보는 백운산의 막내 봉우리 옆구리를 트래버스 하듯 비껴지나 칡넝쿨과 잡초가 우거진 학의동 공설묘지를 옆에 끼고 청계 톨게이트로 내려섰다.


부추전에 생탁 한 사발이 산행의 피로에 부대낄 내 몸과 영혼을 위로할 소확행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추사는 "달을 불러 매화와 함께 친구 삼아 산에 머문다(且呼明月成三友 / 好共梅花住一山)"라고 했으니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 나름일 터이다. 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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