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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06. 2020

수리산 산행과 세상 읽기

수리산 산행

아파트를 나서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온통 화단을 점령했다. 두세 번 태풍이 지나고 나자 매미 소리는 온 데 간데 없어졌다.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가 멀찍이 지났고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가 코앞이니 가을도 목전이다. 

십 년 전 여름과 4년 전 겨울 산행에 이어 다시 수리산을 찾는다. 가파른 관모봉 쪽 수리약수터를 들머리로 했던 예전과 달리 밤바위산 쪽에서 시작하여 슬기봉 태을봉 관모봉까지 수리산을 온전히 한 바퀴 휘돌아볼 생각이다.  

어제는 9호 태풍 마이삭이 물러간 청아한 하늘에 수백수천 척의 범선이 일제히 돛을 펼치고 항해하듯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한껏 마음을 부풀게 했었다. 금년 9월 1일부터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에서 명칭이 변경된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청계 톨게이트를 지나자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모습의 수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1991년 판교-하남 분기점 구간을 시작으로 하여 2007년 사패산 구간을 마지막으로 완공된 총 128km의 이 도로는 1km당 100억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 든 국내 최고가의 고속도로라고 한다. 산본 IC로 내려서서 산행 날머리 부근 산본 고교 뒤에 차를 세우고 1.4km 거리 산본역으로 향했다.


산본로를 따라 반듯한 도로와 건물, 길 옆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교통량이 많지 않은 도로와 넓은 인도, 두세 명이 모여 러닝을 하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태생부터 교통 교육 환경 등 많은 문제를 잉태하는 무계획한 난개발 현장을 목도할 때는 불편과 분노의 감정이 일곤 하는데, 독수리 둥지의 알처럼 수리산 품에 아늑하게 안긴 산본 신도시는 콤팩트하고 스마트해 보이기까지 하다.

산본 전철역에서 친구 M을 만나 시민체육광장 부근 들머리로 향했다. 일곱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인데 여기저기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고 산에서 내려오는 분들도 제법 많다. 산과 더불어 사는 동네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트막한 능선으로 올라서서 산행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는 전망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를 조망했다. 호랑이 꼬리처럼 좁고 긴 평탄한 능선을 따라 가벼운 옷차림 맨손으로 걷거나 러닝을 하는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숲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산객에게 올 가을 어떤 열매를 준비하고 있냐고 묻는 듯하다.

밤바위정에서는 할머니라고 하기엔 젊은 아주머니 여남은 명이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정자 위에 차려놓고 수다를 떨고 있다. 어느 시골 동네의 아침 모임을 보는 듯하다.

중간중간 자리한 이정표는 능선 좌우로 갈라지는 샛길의 시작점을 알려준다. 들머리에서 2.29km 거리 해발 185미터 감투봉 너른 나무데크 위에 놓인 벤치들은 사람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


과거 공부하러 떠난 연인을 위해 기도하던 아가씨를 두고 용과 호랑이가 서로 다투던 이곳, 끝내 두 연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 감투봉의 비극적 전설은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건지 아리송하다. 감투봉 한편에 서 있는 표지판이 감투봉 명칭의 유래와 함께 들머리부터 임도오거리까지가 군포 수릿길 14개 코스 가운데 제1코스 '수리산 둘레길' 16km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도심에서 바로 이렇게 가까이 우거진 숲과 같은 길은 흔치 않다. 거창한 장비도 필요 없다. 편한 운동화 한 켤레와 약간의 시간만 준비된다면 바로 출발해 보자. 군포에서는 문을 열면, 집 앞에 바로 수리산이 있다."

수릿길은 수리산에서 따온 이름으로 수리(修理)는 ‘마음을 닦아 이치를 깨닫다’라는 뜻이라는 설명과 함께 군포시 홈페이지의 수리산 둘레길 소개글에는 자연 친화적과 도시로서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수시로 스쳐 지난다. 솔솔 부는 선선한 바람에서 가을 기운이 느껴지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입김이 서려 마스크는 축축하고 안경은 흐리다.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마스크를 벗어 숨을 틔우곤 했다. 수도권에 내려진 코로나-19 대응 2.5단계 조치 때문인지 오르내리는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마음의 자세가 엿보인다. 뉴스를 통해 듣는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의 경우 막연하고 검증하기도 어려운 공공의 안녕보다 눈앞의 실질적인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한 시간 여만에 표지석이 놓인 해발 258미터 무성봉에 올랐다. 안성 칠현산에서 시작하여 강화 문수산에 이르는 한강기맥 가운데 당정동 구례 고개에서 슬기봉까지가 군포시 구간이라는 표지판 설명이다.

슬기봉으로 오르는 길목 안부는 감투봉, 슬기봉, 덕고개 등 다섯 갈래 길로 갈리는 임도 오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다. 슬기정 정자를 지나면서 둘레길과 등로가 나뉘는데, 슬기봉으로 급경사가 시작되는 비탈길은 둘레길과 달리 한산하다. 여러 산 된비알에 붙은 깔딱 고개나 할딱 고개쯤에 해당된다고나 될까.

군 시설물이 자리한 슬기 봉의 허리춤으로 난 나무데크에 올라 수암봉 쪽을 한 번 조망하고 태을봉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산본 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형상의 바위가 자리한 봉우리 위에 이정표 등 새로 설치하려는 시설물들이 널려져 있다.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남한산성과 연인산에 이어 2009년 경기도의 세 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에 걸맞은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

가파른 밧줄 바위 능선에 나무 계단이 놓여 오르고 걷기에 한결 편하다. 자연 친화적일 뿐 아니라 사람 친화적인 계단이다. 계단을 올라 날카로운 바위 투성이 칼바위 능선을 지난다. 터널 밖 짧은 구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병목안에서 차량 소음이 확성기처럼 증폭되어 귀를 따갑게 때린다.

능선 중간쯤 바위 절벽 위에 앉아 수암봉 쪽을 조망한다. 건너편의 수암봉과 슬기봉, 태을봉, 관모봉 등에서 굽이쳐 내린 능선이 병목안으로 수렴하는 모습이 거대한 물줄기들을 협곡으로 쏟아붓는 이과수 폭포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칼바위 능선을 지나고 병풍바위 능산 아래로 우회하는 계단을 지나 해발 489미터 태을봉에 올라섰다. 산객들이 큼지막한 표지석과 함께 인증 숏을 남기고 있다. 태을봉에서 채 1km도 되지 않는 거리에 관모봉이 자리한다.

경사진 너덜바위 길을 올라 수리산의 북단에 솟아 있는 해발 426미터 관모봉에 닿았다. 다른 곳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봉우리 위 게양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산행을 시작한 지 네 시간 여가 지났지만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산행은 접근성이 좋은 집 근처 산을 찾는 이점이기도 하다.


"더운 날씨에 노고 많으십니다."
"불편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계단 놓이면 한결 편해지겠는데요."
"예, 좋은 산행되세요."

수리약수터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산정 바로 아래부터 나무데크 계단을 놓는 작업이 한창이다. 가파른 비탈에 계단을 놓는 작업이 힘들어 보이는데도 오히려 산객들의 산행에 불편을 끼칠까 걱정하는 인부들의 마음 씀씀이가 가상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아침에 잠잠하던 매미가 여름의 끝자락이 아쉬운지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소리가 조금은 쓸쓸하고 구슬프다는 생각을 하며 날머리 부근 산기슭의 수리약수터에 닿았다. 지붕 아래 너른 약수터에 설치된 수도꼭지 두 개, 그중 하나를 틀어 콸콸 쏟아지는 약수를 페트병에 담아 갈증을 풀었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끝이 있기나 할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때, 당연시하며 누렸던 세상의 모든 평범했던 일상이 특별한 일상이 되고 있는 시기다. 인내하고 절제하며 애써 마음을 수그리고 늦추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다만, 동네 뒷산에 오르거나 작은 호수를 마주하고서도 에베레스트나 대양을 꿈꾸는 상상력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가짐 또한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땀 흘리며 묵묵히 산을 오르는 산객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수리산 산림욕장 입구를 알리는 아치형 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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