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봄

by 약천

탄천변에 벚꽃이 만발했다. 오일 장날이지만 아직 한산한 모란 거리에 쑥떡 김밥 붕어빵 노점상은 일찍이 자리를 잡았다. 지하상가는 빵집과 분식집이 먼저 문을 열었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기 중인 8호선 전철 객실 긴 좌석엔 승객이 듬성듬성하다. 거리나 전차 안이나 지하상가나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한적한 주말 풍경이다. 수진 신흥 단대오거리를 지나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렸다.


친구를 기다리며 정류소 부근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빵 가게에 들러 빵을 두세 개 골랐다. 과일가게 주인은 과일을 진열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선거철이라 다양한 공약을 내세운 다채로운 색상의 플래카드가 거리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멀리 보이는 청량산 줄기는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알 수 없는 희뿌연 연무에 잠겨 희미하다.


약속시간에 도착한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산행 들머리 산성 체육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 앞 도로변은 공사가 한창이고 이른 시각이라 산객들은 드문드문하다. 약사사로 오르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계곡은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른다. 청설모는 완연한 봄 날씨에 신이 났는지 나뭇가지 위를 날렵하게 옮겨 다닌다.


기부자 이름이 적힌 석등과 불상 조각 돌기둥이 좌우로 촘촘하고 길게 늘어선 비탈진 포장도로를 한참을 오른다. 약사사는 한국불교 여래종 총본산으로 옛 한흥사를 재건하여 1967년 창건했다고 한다. 경사가 급하고 좁은 산기슭에 자리한 때문일까, 입체적 구조로 인왕문 범종각 대웅전 삼성각 성모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산행을 할 때마다 사찰 한 두 곳을 들르곤 했는데, 약사사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기품 있는 자목련이 피어 있던 곳'으로 기억하는 그 사찰은 어디였을까? 남한산성이 자리한 청량산과 검단산을 잇는 능선 서쪽 기슭 약사사를 비롯해서 백련사 상도사 덕운사 만덕사 등 여러 사찰이 있으니 그중 하나일 터이다.


약사사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참나무 숲은 성기고 바위틈을 비집고 자란 진달래가 꽃을 피웠다. 이백과 두보가 마셨다는 두견주는 어떤 맛이었을까?


누명을 쓰고 동래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정서에게 봄 졉동새 울음은 구슬펐을 것이다. 두 해 전 들렀던 수영강변의 정자와 시비가 놓인 정과정 유적지는 빌딩과 도로에 포위되어 외딴섬처럼 쓸쓸했었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슷하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 <정과정곡(鄭瓜亭曲)> 부분, 정서 -

능선 턱밑 약수터는 수량이 많지만 '음용불가'라는 안내문이다. 능선으로 올라섰다. 오른편 검단산 방향을 뒤로하고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니 남한산성 다섯 개의 옹성 가운데 하나인 제1옹성이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저번 산행 때 허물어져 형체만 남아있던 것이 잘 복원되어 늠름한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제7암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벽을 우측으로 끼고 동문 쪽으로 향한다. 남장대 터 바로 앞의 제2남옹성치는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 남한산성 다섯 개 치(雉) 가운데 하나다.


일찍 한 시각 너른 남장대 터에 건장한 젊은 남녀 20여 명이 막걸리와 음식을 펼쳐놓고 입을 맞춰 구호를 외친다. 성곽은 청량산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고 휘돌며 산성마을과 행궁을 품은 성 안과 밖을 경계 짓고 있다. 계곡에 묻혀 보이지 않는 동문으로 난 내리막 길로 접어들면 멀리 능선 사이 골짜기에 안긴 망월사와 동문 쪽에서 치솟아 오른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계곡을 끼고 능선 둔턱에 위태하게 자리한 동문엔 '좌익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4대문의 이름에 유교사상이 반영된 서울 도성처럼 남한산성의 동서남북 4대문은 좌익문, 우익문, 지화문, 전승문이라 불린다. 정조 때인 1779년 성곽을 개축하고 붙였다는 남문 지화문(至和門)과 북문 전승문(全勝門)의 이름에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염원과 의지가 엿보인다.


차량이 연신 오가는 남한산성로 옆 '세계유산 남한산성' 표지석을 둘러보고 동문을 거쳐 능선으로 오르는 성곽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황진이 전설이 전하는 송암정 터를 휘도니 장경사에서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동장대 터까지 두어 번 번갈아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은 산성길 최대의 고비 중 하나다. 동장대에서는 북쪽으로 이어지는 긴 성곽과 북동쪽 벌봉 일대를 휘도는 봉암성 쪽이 훤히 보인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올라서서 성 안 동태를 조망하며 병사들을 지휘했다는 바위 봉우리가 벌 모양을 닮아 벌봉이라 불린단다. 암문으로 나서 벌봉 쪽을 둘러보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북문이라 불리는 전승문을 지나고 기품 있는 노송이 늘어서 있는 평탄한 길을 따라서 국청사 쪽으로 행한다. 국청사 옆 약수터 다람쥐 모양의 수구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국청사 뒤에 있는 서문 밖으로 나서서 성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암문으로 올라와 서장대에 올랐다. 수어장대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남녀노소 상춘객이 적지 않다. 무망루 매바위 등을 둘러보고 장대 마루에 잠시 걸터앉았다.


수어장대 아래쪽 성곽 옆 영춘정도 누군가가 차지하고 앉았다. 남문을 빠져나와 지화문을 등지고 좌측의 길을 택하여 하산길에 올랐다. 완만하던 산길은 문득 경사가 급한 계단길로 바뀐다. 가파르던 경사가 주춤하는 평탄한 능선에서 좌우로 덕운사와 백련암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좌측으로 난 길은 벚꽃이 만개한 작은 절집으로 인도한다. 벚꽃나무 아래 놓인 긴 통나무 벤치에 산객들이 앉아서 휴식을 하고 있다. 절집 좁은 마당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높은 돌계단 옆에 보랏빛과 연분홍빛 꽃을 활짝 피운 자목련 한 그루가 서있다. 가는 줄기에 여러 갈래 가지를 뻗은 모습이 사람으로 치면 약관을 갓 넘겼을 듯 풋풋하다. 몇 해 전 이맘때쯤에 보았던 그 자목련이던가? 고개가 갸웃해진다. 계단 옆에 선 안내판이 절 이름이 '덕운사'라고 일러준다.


예전 모습 그대로인 돌탑 군락 옆을 지나 체육공원으로 내려섰다. 원점 회귀 산행인 셈이다. 한낮의 공원엔 봄바람을 쐬러 나온 행락객들이 적지 않다. 공원 정자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바둑과 장기 판에 골몰해 있다. 같은 색깔의 점퍼를 입은 선거운동원들, 스피커 볼륨을 높인 무인 유세차량, 공사로 어수선한 도로,... 흐드러지게 핀 봄꽃처럼 봄을 만난 사람들 세상도 분주하다.


마스크를 쓴 승객들이 모란으로 가는 버스에 타고 내린다. 아침 뉴스에서 오늘 00시 기준으로 국내 코로나 19 확진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모란 장터 부근은 이른 아침과는 달리 거리와 골목마다 둑 터진 봇물처럼 사람들로 생기가 넘친다. 눌러도 눌러도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봄을 어찌할 것인가!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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