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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Nov 15. 2020

오대산 여름 산행

한강기맥, 두로령에서 비로봉까지

장마가 주춤하며 잠시 물러난 칠월 주말이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추자 오락가락하던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지붕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횡성휴게소는 인파로 넘친다.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선 버스가 6번 국도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노인봉과 동대산 사이에 있는 해발 960미터 진고개에 도착했다.

재작년 여름 친구 H와 진고개를 출발해서 노인봉을 거쳐 소금강 계곡으로 내려서는 산행의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 산행은 반대쪽 방향으로 길을 잡아 동대산 두로봉 두로령 상왕봉 비로봉을 거쳐 상원사로 내려서는 17km에 이르는 만만찮은 오대산 종주 코스다.

진고개 터널 능선 위 하늘이 층층 뭉게구름을 피워 올렸다. 산행 채비를 마치고 도로를 건너 스틱을 집으며 동대봉 자락으로 오르는 산객들 뒤를 따라 우리 일행도 발을 내디뎠다.

산자락으로 접어드는 경사진 길 옆 완만하고 너른 밭 너머로 짙은 녹색 산줄기가 하얀 구름이 수놓은 파란 하늘을 이고 있다. 진고개를 뒤돌아보니 노인봉 쪽 들머리로 올라서고 있는 산객들이 눈에 들어온다.

진고개에서 동대산까지 1.7km 계속되는 오르막 길이 힘겹다. 내 뒤로는 아무도 없고 멀찍이 앞서간 동행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발이 무겁고 어깻죽지가 뻐근하고 숨도 턱밑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면서 오르다 멈추다 반복한다. 스틱을 짚고 허리를 굽혔다가 하늘로 머리를 쳐드니 잠시 눈앞이 핑 돌며 노랗다. 꼬박 한 시간 만에 해발 980m 진고개에서 450여 미터를 올라 해발 1433m 동대산에 올라섰다. 걱정하며 기다리던 친구들이 반긴다.

노심초사 페이스를 되찾으려 애쓰며 다시 앞서가는 친구들을 뒤따라 발을 옮긴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한 바가지는 손으로 훔쳐낸 듯하다. 내 뒤로는 인기척이 없고 간간이 몇몇 산객들이 마주쳐 지나갈 뿐이다. 덤성덤성한 상수리나무 고목과 수풀이 무성한 길을 3km여 지나 규암 바위 서너 개가 산길 옆에 우뚝 서 있는 차돌백이에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차돌백이에서 2km 거리 신선목이 사이 능선도 오르내림이 있다. 땀에 젖은 얼굴에 선선한 바람이 와 닿으며 기운을 북돋워 준다. 숲 속에서 경쾌한 새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산길 옆 곳곳은 멧돼지가 파헤쳐 놓은 흔적들로 어지럽다.

오르막 능선에서는 어김없이 예정된 코스를 버리고 아직 먼 거리에 있는 두로령이나 북대 삼거리에서 탈출하는 게 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내리막이나 평평한 능선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턱턱 내딛는 발과 다리에 얹힌 몸은 사막의 모래 둔덕이 바람에 스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양쪽으로 경사가 느슨한 능선을 낀 병목처럼 생긴 지형의 신선목이는 그 이름처럼 신선들이 산중을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자리를 틀고 앉아 쉬기에 안성맞춤이지 싶다. 신선목이 모여 앉아 휴식하며 허기를 달래고 두로봉으로 길을 재촉한다.

곳곳에 떡갈나무와 박달나무 고목이 부러져 드러누웠고 동해 쪽에서 고지를 점령하려는 적군처럼 능선을 타고 밀려오던 안개구름이 제풀에 지쳐 흩어진다. 지친 몸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마음은 생기로 가득 찬 아름다운 원시의 숲을 찬찬히 음미할 볼 여유가 없다.

두로봉 옆 벤치에서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50여 미터 거리에 있는 두루봉 표지석 쪽으로 향하는 길을 출입금지 표지판이 '중요 야생동식물 보호'라는 명목으로 가로막고 있다. 해발 1422m 두로봉은 백두대간 마루금 중 하나로 한강기맥의 기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작되는 한강기맥은 1.2km 떨어진 해발 1310m 두로령과 오대산 여러 준봉들을 거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까지 뻗어갈 것이다.

멀찍이서 표지석을 한 번 보고 나서 두로령으로 향한다. 고목 아래 둘러앉아 점심을 들고 있는 산행대장 '스네일' 일행 셋에게 인사를 건네고 발길을 재촉해서 '백두대간 두로령'이라 적힌 큰 화강석 이정표가 서있는 두로령도 지났다.

북대를 거쳐 상원사로 탈출할 수 있는 찬스인 두로령을 애써 외면하고 1.9km 떨어진 상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북대 삼거리부터 상왕봉으로 난 능선은 작년 유월 친구 M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상원사를 출발하여 적멸보궁 비로봉 상왕봉 북대 삼거리를 거쳐 상원사로 회귀했던 그때 산행의 기억을 옮겨 본다.

"상왕봉과 북대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3km 남짓 완만한 능선은 주목 군락과 기묘한 모습의 자작나무 고목들이 이름 모를 풀꽃들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길이다.

크고 작은 상처를 품었지만 의연히 서 있는 고목들, 삼삼오오 한 가족처럼 뿌리를 한 곳에 둔 자작나무들, 줄기와 가지를 해골처럼 드러내고 쓰러져 누운 고사목, 용트림하며 하늘 높이 치솟은 거목 등이 어우러진 그 길은 알 수 없는 오랜 원시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디서 출발하셨어요?"
"진고개에서 올라왔어요."
"와우 그 먼 길을 어떻게..."
"죽을 둥 살 둥 올라왔겠지."

숨을 헐떡이며 상왕봉으로 올라서는데 머리칼이 파뿌리처럼 하얗게 센 두 노 여성 산객이 비로봉 쪽에서 걸어오며 말을 건넨다. 내 기진맥진한 몰골에 한눈에도 산행의 고초가 고스란히 묻어나나 보다. 뒤이어 그들이 '막내'라 부르는 젊은 여성 한 분이 지친 몸을 끌고 상왕봉에 도착해서 그들과 합류한다.

툭 터인 조망은 지나온 봉우리들과 능선과 함께 가야 할 비로봉 쪽도 눈앞에 펼쳐 보여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들꽃과 함께 무성한 풀숲의 능선 주변은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주목 군락 보호구역을 지나 다소 느슨하지만 힘겨운 비탈 끝에 홀연히 비로봉이 모습을 보인다.


해발 1563미터 비로봉 정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오른 환희를 만끽하려는 듯 좀체 자리를 뜨지 않고 있다. 사방으로 하얀 구름을 능선에 인 산군들을 펼쳐 보이고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같은 산행 버스를 타고 온 젊은 두 수녀님을 비로봉에서 보니 시간에 쫓기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수녀님들은 종주 코스 대신 진고개-노인봉, 상원사-비로봉 왕복 산행 중일 터이다.

가파른 나무 계단과 돌계단을 연이어 한참 동안 내려가다 보면 은은한 목탁 소리가 바람에 실려온다.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영취산 통도사와 함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월정사 적멸보궁이 지척이다.

반듯하고 너른 화강석 돌계단이 중대 사자암 방향 아래쪽과 적멸보궁 방향 위쪽으로 나있다. 적멸보궁엘 다녀온다는 준을 기다리며 만과 나는 돌계단 옆 '용안수' 우물에서 긴 자루가 달린 국자로 물을 떠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증과 피로가 멀리 달아나 버릴 것 같다.

적멸보궁 관리와 예불을 위한 전각으로 가파른 산비탈에 5층 구조로 들어서 있는 중대 사자암을 지나 비탈진 산자락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을 따라 상원사로 내려왔다. 달마 조각상과 화려한 천정화가 일품인 만화루(萬化樓)를 거쳐 봉덕사 에밀레종과 함께 유일하게 신라 때 주조된 동종이 자리한 동정각(動靜閣)을 둘러보고 너른 마당으로 들어섰다.

높은 계단 위 문수전의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문수동자는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린 모습이 만화루 천정화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나그네 이리저리 돌고 돌아다니며
오대산 비탈길을 얼마나 헤매느냐
문수보살 여기 있는데
미타에게 물어 무엇하리오"

누군가 보았다는 만화루 천정화에 새겨진 글귀처럼 하루 종일 나는 무얼 찾아 오대산 비탈길을 죽자 살자 걸었던 것일까? 복덕과 지혜의 보살이라는 문수동자에게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할걸 그랬나 보다. '천고의 지혜 깨어있는 마음'이란 편액이 걸린 누각 아래를 지나 상원사를 나서서 높은 돌계단을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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