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인산 Aug 27. 2020

용문산, 안개와 소낙비에 흠뻑 젖다

한강기맥 비솔고개에서 용문산까지

수도권 중심으로 코로나 19가 재 확산되고 있다. 감염경로를 모르는 '깜깜이 환자' 비율도 집계 이후 최고치라고 한다. 23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수도권 밖으로 확대되었다.

산행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어 주말을 내버려 둘 리가 없는 친구들이 한강기맥 '비솔고개~용문산' 구간 산행을 제의했다. 오대산 두로봉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해서 계방산, 발교산, 용문산, 청계산 등을 거쳐 양평 두물머리까지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며 이어지는 산줄기, 약 167km의 이 산줄기가 이름하여 한강기맥이다.

저번 한강기맥 '비솔고개~신당 고개' 구간 산행의 맥을 용문산 쪽으로 이어서 메꾼다는 의미도 있어 새벽잠을 양보하기로 했다. 대중교통편이 불편하여 각기 직접 차를 몰아서 들머리와 날머리에 한 대씩 세워둘 요량이니 코로나 19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05:30, M의 전화에 허둥지둥 배낭을 챙겨서 용문사로 향했다. 알람을 잘못 맞췄던 것이다. 한 시간 만에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부근 식당에서 아침을 들며 나를 기다리던 친구들을 픽업해서 비솔고개로 이동했다.


낯익은 비솔고개에서 저번과는 반대 방향 싸리봉 쪽 기슭으로 접어들며 산행을 시작했다. 단월봉, 천사봉, 용문산 가섭봉을 거쳐 용문사로 내려설 계획이다. 예보된 오후쯤의 중부지방 강한 소낙비가 이곳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지만 산은 무거운 안개에 잠겨있다.


싸리봉까지 2km 가까이 이어지는 비탈길이다. 잊지 못할 옛 추억담은 무료하고 힘겨운 산행의 안줏거리다. 두 친구가 풀어놓는 삼남길 종주 스토리 중 강진 어느 산자락 새벽 들녘에서 목격했다는 트럭 안에서 도자기 빚던 남녀 얘기는 단골 레퍼토리다.


계속되는 가파른 비탈길이 힘겹다. 안개에 잠긴 숲 공기는 살랑대는 바람이 있어 제법 선선하지만 몸에는 땀이 배고 이마에서도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중단하는 자 승리하지 못하고 승리하는 자 중단하지 않는다, 라는 옛 구호를 되뇌어 보며 묵묵히 된비알을 오른다.

싸리봉 정상의 해발 811.8m를 알리는 이정표는 도일봉까지 거리가 1km 남짓이라고 알린다. 안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숲에 가려 싸리봉 정상은 별다른 조망이 없어 보인다. 기맥에서 벗어나 자리한 도일봉 쪽을 버리고 싸리재로 난 비탈길로 내려간다.

양평군에서 세운 이정표는 '비솔고개'를 '비술 고개'라 적고 있다. '비솔'과 '비슬'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비술'까지 끼어들어 진짜 이름은 안개에 덮인 산처럼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서 싸리재를 지나고 듬성듬성 관중이 무리 지어 있는  성긴 숲 비탈길을 따라 단월산 정상으로 향한다. 바닥에 쌓인 낙엽은 비에 촉촉이 젖어 더욱 붉어 보인다. 이 지역 특산물이라고 하는 뼈를 이롭게 하는 나무라는 '골리수(骨利樹)' 즉 고로쇠의 수액은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단월산 정상은 별다른 특징이 없고 '단월봉 778m'라 적힌 표지가 나무줄기에 달려있다. 절벽을 등지고 자리한 노송 한 그루가 있어 그 옆에 배낭을 내리고 과일로 허한 배를 달랬다.

산길로 내민 수풀 잎사귀에 맺힌 물기를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고개를 수그리며 봉우리를 오르고 고개로 내려서며 앞으로 나아간다. 땀에 젖은 몸에 와 닿는 바람이 에어컨 바람처럼 차갑다. 문례봉으로 오르는 비탈길 옆 나무 밑둥치에 돋아난 버섯을 발견한 M이 가까스로 버섯 세 송이를 나무에서 떼어낸다. 항암 등 약용으로 쓰이는 말굽버섯이라고 한다.

기맥 줄기 우측으로 살짝 물러나 앉아 있는 폭산으로도 불리는 문례봉 정상에 올랐다. 가로로 '천사봉'이라 적힌 아담한 표지석이 놓여 있다. 해발 1004m의 봉우리 이름으로 잘 어울린다 싶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세 분 알바했죠?"
"아뇨. 천사봉 찍고 오는 길입니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문례봉에서 기맥 주능선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우리 일행에게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던 산객 셋, 그중 타이즈 차림의 여성이 스트레칭을 하며 취조하듯 짓궂게 캐묻는다.

기상도 읽는 법을 터득했다는 M, 용문산 부근에는 오후 세 시경 소낙비가 몰아칠 것이라는 말에 발길을 채근한다. 길 옆에 보랏빛 초롱꽃 한 송이가 산객의 눈길을 붙잡는다. 곳곳에 거미들이 애써 쳐놓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힌 거미줄은 인간이 도저히 흉내내기 힘들어 보이는 예술작품이다.


용문산과 용문봉을 잇는 능선 안부로 올라섰다. 용문산 정상 가섭봉까지는 900미터 거리다. 삼 년 전 봄날 양평 세수골을 출발해서 백운봉과 장군봉을 거쳐 용문산에 올랐었다. 그때 이곳을 지나 험준한 용문봉을 오른 후 천신만고 끝에 용문사로 내려갔던 기억을 M이 상기해 준다.   


자욱하게 낀 안개에 묻힌 가섭봉 언저리 너덜바위길을 앞을 가로막는 나무 등걸을 헤치며 좌측으로 휘돌고 가파른 계단을 지나 해발 1157m 정상에 올라섰다. 산정 아래는 온통 안개바다에 잠겼다. 산객들이 산정 군부대 철망에 매달아 놓은 색색 선명한 리본들이 티베트 설산의 타르초를 연상시킨다.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주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바람의 깃발' 타르초와 달리, 산객들이 매단 리본은 천신만고 끝에 산정에 오른 희열을 바람에 나부끼며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산객들이 드문드문 정상으로 오르고 내린다. 안개에 묻힌 정상 옆 정자에서 들리는 산객들의 대화 소리는 유쾌하고, 정상 막바지 계단을 오르는 산객들 표정은 힘겨워 보인다.


장군봉 쪽 기맥 줄기를 외면하고 상원사 방향 능선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용문사로의 3.4km여 하산길은 예전과 달리 곳곳에 나무계단을 놓아 한결 수월했지만 바위 투성이의 거칠고 가파른 길이다. 맑은 날이면 선명했을 용문봉의 장관도 안갯속에 묻혔다.


가섭봉에서 용문사까지 하산 길 절반도 못 미쳐서 가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셔츠 위로 톡톡 떨어지는 가벼운 빗방울이 입속의 민트 초코처럼 시원스레 느껴진다. 가끔씩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멀리서 어르렁거리는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모두 서둘러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어 입었다.


가늘게 흩뿌리던 비는 2시가 조금 못된 시각부터 이내 굵은 소낙비로 바뀌었다. 내 일회용 우의가 찢어지고 빗줄기는 굵어져 H의 우산을 빌려 우의를 대신했다. M은 비구름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며 큰 바위를 찾아 잠시 소낙비를 피해 가자고 한다. H는 M의 제의에 아랑곳 않고 내려가는 길을 재촉한다.


일회용 우의를 입은 M과 우산을 받쳐 든 나는 겨우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을만한 작은 공간을 내어준 바위 아래 몸을 숨기고 소낙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십여 분 남짓 몰아치듯 쏟아붓던 굵은 소낙비가 가는 비로 잦아들었다. 용문사를 500여 미터 앞두고 계곡 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용문사 경내로 들어서서 여래불의 금빛 광채가 번져 나오는 대웅전 뜨락 디딤돌에 걸터앉았다. 기와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뒤로 비스듬히 내려앉는 용문산 줄기를 배경으로 삼층석탑과 천 년이 넘은 푸르고 늠름한 은행나무가 살아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허허~"

비솔고개로 향하는 M의 소나타에서 노래 <타타타>가 흘러나온다. 비록 안개에 가렸지만 싸리봉 천사봉 문례봉 용문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여(如如)'히 한강기맥을 잇고 있었다.

2020-08

매거진의 이전글 오대산 여름 산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