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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Aug 20. 2021

용봉산과 덕숭산

하현달을 보며 전철역으로 향했다. 금년 들어 첫 원행으로 충남 홍성의 용봉산과 예산의 덕숭산을 잇는 연계 산행을 하려 한다. 수서에서 갈아탄 3호선 전철 객실은 한산하다. 산악회 버스 출발지인 신사 전철역의 역사 화장실은 배낭을 멘 산객들로 붐빈다.


버스는 예정시각이 되자 지체 없이 출발했다. 차창 밖은 여전히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일행끼리 삼삼오오 나란히 앉은 여러 연령 대의 남녀 산객들로 빈 좌석이 거의 없다. 앞 좌석 젊은 여성 일행은 참새처럼 재잘대고 옆 좌석 나이 든 산객 두 분은 거북이 움직이듯 느릿느릿 말을 주고받는다.

경부고속도로 죽전 정류장에서 등산복 차림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자신들이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버스는 산객 두어 명을 더 태웠다.

닉네임이 외모와 잘 어울려 보이는 '오리 거위' 산행대장이 버스 맨 앞에 일어서서 그새 눈을 붙인 승객들을 깨우며 출발지, 코스별 경유지와 도착지, 픽업 시간 등 산행에 대해 열의에 찬 모습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아산만 위를 가로질러 놓인 서해대교를 중간에서 잇는 행담도의 휴게소에 들러 이십여 분 휴식 후 출발했다. 덕산읍 초입에 '온천지구에 변전소가 웬 말이냐'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도시 농촌 산촌 어촌을 불문하고 전국 도처가 님비(NIMBY)로 갈등을 빚고 있는 시대다. 출발 두 시간 이십 분 만에 산행 기점인 용봉 초교 앞에 도착했다.


폐교했거나 학생 수가 줄어서 황량해 보이는 여느 시골 초교의 모습과는 달리 용봉 초교 교정은 도회지 학교의 교정 마냥 넓고 번듯했다.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전교생 수가 77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농으로 인한 공동화는 이곳도 피해 가지 못했나 보다.

버스에서 내린 산객들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스틱을 펴고 몸을 움직여 푸는 등 저마다 제 방식대로 산행 채비에 분주하다.

머리 뒤로 내려쬐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이응노路에서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며 산행을 시작한다. 아담한 산세에 뒷동산 놀러 가듯 마음이 편하다. 용봉산 들머리 기슭 비탈에 대웅전을 앉힌 용도사가 맞이한다. 다른 전각 없이 대웅전만 있는 단출한 사찰이지만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조성한 고려 중기 양식의 상하리 미륵불이 인상적이다. 사찰 뒤로 난 산길은 자연석을 서너 개씩을 이어 붙인 돌계단이다.


"J항공은 아침 6시 대에 운항하는 제주행 3대 중 1대만 떴대."
"승무원 6명에 승객 6명을 태웠다나.."
앞서 걷는 여성 산객 두 분이 나누는 대화가 코로나 19 여파의 일면을 실감 나게 전해준다.

그늘 없는 암반 길을 오르자니 따스하던 햇빛이 어느새 따갑게 느껴지고 계절이 무엇인지 잊게 한다. 금세 조망이 뒤로 좌우로 트이고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 준다. 능선은 곧바로 용봉산 정상을 내놓지 않고 투석봉을 주봉의 호위장인양 앞에 세운 것이 명산다운 면모를 갖췄다.

투석봉은 레드 카펫을 드리운 듯 암반 길 대신 마사토가 깔린 솔길을 내어주며 지척인 용봉산 정상으로 인도한다. 해발 381미터 용봉산 정상 표지석은 일부러 쌓아 올린 듯 보이는 바위 무덤 위에 놓였다. 길쭉한 이등변 삼각형 자연석에 '龍鳳山'이라 음각된 표지석 글씨가 산세만큼이나 유려하다.

좁은 계단 길이나 능선에서는 마주오는 산객들과 서로 길을 양보하며 암봉에 불쑥불쑥 솟은 기암괴석, 바위틈에서 옆으로 자라난 소나무 등에 정신을 팔다 보니 어느새 노적봉을 지나치고, 암벽에 기대어선 촛대바위와 행운 바위 사이로 난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섰다.

힘껏 밀어봐도 움짤도 하지 않는 '흔들바위'를 지나 바위들이 콩나물 솟듯 엉겨 붙어 솟은 악귀봉에 다다랐다. 그 왼쪽 아래 전망대에 서면 산 아래에서 악귀봉 쪽으로 비쭉 삐쭉 하늘로 치솟을 듯 늘어선 두꺼비 바위가 하나의 능선을 이룬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악귀봉 정상부 고개를 위로 쳐든 모양새의 물개바위에 산객들이 몰려있고, 정상을 이룬 바위에 눌러앉은 산객들은 해변 바위에 올라 햇볕을 쬐는 물개들처럼 꼼짝을 않는다.

귀와 꼬리를 쫑긋 세운듯한 형상의 '삽살개 바위'가 앙증맞다. 모양새는 삽살개보다는 진돗개나 고양이와 더 닮아 보이지만 말없는 바위는 사람의 주장과 독선을 묵묵히 수용할 밖에 도리가 없다. 어디 사물만 그러하랴. 자기보다 돈, 명예, 권력, 학식 등이 조금이라도 모자라 보이는 약자를 무시하고 이해라도 서로 엇갈리면 은연중에 침묵을 강요하는 모리배도 수두룩하다. 오만과 아집은 패망의 지름길인데...

크고 작은 봉우리가 여덟 개라는 용봉산은 홍천의 팔봉산을 양쪽에서 잡고 널려 놓은 듯 암봉들이 길게 연이어 자리한다. 덕산 전망대에 올라서니 충남도청이 자리한 내포 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미세먼지가 많아 시야도 갑갑하겠지, 라는 우려와는 달리 양털 구름이 푸른빛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시야도 그런대로 멀리 트인 편이다.

가루실 고개 갈림길에서 수암봉으로 직진하자, 내려서서 덕숭산으로 향하자, 의견도 두 갈래로 갈라졌다. 산행 욕심이 여전한 친구를 뒤따라 수암봉으로 향하다가 장군바위 부근에서 수암봉 정상을 밟고 오겠다는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거대한 바위들이 한데 모여 능선 한가운데를 온전히 차지하며 우뚝 솟아 있는 장군바위에 올랐다. 이쪽저쪽 바위로 건너뛰며 앞뒤로 길게 뻗은 수암산과 용봉산 능선, 내포신도시, 건너편 덕숭산과 가야산 등을 홀로 조용히 조망하니 더없이 호젓하고 좋다. 등과 이마를 흥건히 적신 땀이 바람에 식어 금세 서늘해졌다.

친구는 예상보다 수암산 정상까지 거리가 상당했다며 서둘러 돌아온 기색이다. 작가 박완서는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라는 산문집에서 "타는 사람보다도, 나는 사람보다도, 뛰는 사람보다도, 달리는 사람보다도, 기는 사람보다도, 걷는 사람이 난 제일 좋다."라고 했으니, 힘들지만 가야 할 덕숭산으로 열심히 발을 내디뎌 봐야겠다.

건너편에 덕숭산이 범접하기 힘든 피안의 영험스러운 산처럼 우뚝 솟아있다. 용봉산과 덕숭산 사이에 긴 이랑처럼 끼어 있는 동네 둔리 쪽으로 내려간다. 산자락 넓은 밭 가장자리를 지날 때 두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젊은 농군은 트랙터로 밭갈이가 한창이다. 논과 밭 그리고 온 산천은 바야흐로 봄이다.


가루실 마을로 내려섰다. 일손이 분주한 '설향 딸기' 직판장에서 달콤한 딸기 향이 흘러올 듯하다. 둔리 저수지 아래쪽을 휘돌아 1km여 경사진 아스팔트 길을 오르면 수덕사로에 닿는다. 철새가 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줄지어서 하늘 높이 날고 있다. 느긋한 날갯짓으로 보아 월동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귀향처가 있는 새들은 행복하지 싶다.

덕숭산 밑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쳐놓은 철조망 펜스를 우회해서 덕숭산 옆구리로 치고 들며 정상까지 줄곧 직진으로 급경사가 이어진다. 발 다리 허리 어깨 등 시시각각 온몸에 이는 고통과 씨름하는 알량한 인내심을 달래고 응원하며 나아갈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긴 능선을 따라 나고 들고 가고 오는 등산로가 여럿인 용봉산과 달리 덕숭산 옆구리를 치고 오르는 길은 정상까지 탈출로도 없어 2km 남짓 거리를 별다른 조망 없이 묵묵히 올랐다. 기진맥진 1시간여 만에 해발 495미터 덕숭산 정상이 마침내 모습을 보였다.

용봉산과는 달리 덕숭산에는 산객들이 많지 않다.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어져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지만 산행지로 보다는 수덕사로 더 유명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덕숭산 부근에는 가야산, 개심사, 해미읍성, 윤봉길 의사 생가, 남연군묘 등 귀에 익은 명소들이 많다. 덕숭산 북쪽으로 보이는 가야산 아래에는 남연군의 묘가 자리한다. 영화 '명당'에서 후대에 왕이 날 음택이라는 풍수가 말에 따라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로 선친 묘를 이장한다.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길 욕망하고 사사로운 이익 앞에 공공의 이익 따위는 아랑곳 않는 권력층의 모습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덕숭산 북쪽 자락에는 '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기개를 품고 1932.4.29일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등을 처단한 민족영웅 윤봉길 의사의 생가가 자리한다. 가히 범상치 않은 산세가 불세출의 영웅을 나게 한 것은 아닐까.


넉넉지 않은 시간에 쫓기며 하산을 서둘렀다. 바윗돌이 널브러진 길에 침목 계단을 놓아 걷기가 편하다. 비구니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나란히 정상 턱밑에서 몰려온 잿빛 구름이 비를 몰고 올까 우려하며 발길을 돌리고 있다. 다음을 기약한다지만 정상까지의 거리가 지척이라 괜스레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동안거 기간인지 '묵언정진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놓인 일광문(日光門) 등 정혜사로 통하는 문들은 모두 닫혔다. 담장 얕은 곳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경내는 인적은 없고 정적이 덮고 있다. 예산 팔경의 제1경인 수덕사, 그에 딸린 선원으로 덕숭산 높이 자리한 정혜사에서 굽어보는 전망을 단념해야만 하니 아쉽다.

층층 계단을 내려서며 만공탑 옆을 지나고, 바위 절벽에 양각한 관음보살입상과 향운각 사이 바위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약수 한 모금으로 갈증을 씻어냈다. 물 맛이 중생을 위난으로부터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자비처럼 달고 상쾌하다.

향운각을 지나 인수봉처럼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이엉을 엮어 지붕을 얹은 소림 초당 앞 출입구에는 인간계와 선계를 가르듯 대나무 걸개가 산객의 궁금증을 거두게 한다. 산 정상부 정혜사에서 1,020개나 된다는 돌층계로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따라 계곡물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수덕사까지 내려왔다.

수덕사 너른 마당과 전각들 주변엔 적지 않은 나들이객들이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오후 한때를 유영하고 있다. 반듯하고 너른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니 열반에 들기라도 한 듯 해탈이라도 한 듯 마음속에서 이는 기쁨과 희열이 적지 않았다. 이는 필시 노곤한 산행의 끝을 고하는 지점에 제시간에 무사히 골인했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작은 고통만 벗어나도 안도하고 희열감도 드니 인간사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 희열이 기다리고 있을지 감히 짐작조차 못하겠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옛 노래로 인해 '비구니 사찰이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예상은 여지없이 어긋났다. 수덕사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등을 두루 갖춘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덕숭총림으로 그에 딸린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라고 한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 <수덕사의 여승> 1절 -


모진 속세의 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해서 일각일초를 아껴 불도에 정진할 비구니가 법당에서 흐느끼며 울 까닭도 없으련만, 노래를 듣는 속인들의 측은지심을 건드려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흐느껴 우는 것은 비구니가 아니라, 출가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연인이나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산군 덕산면에 속하는 덕숭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수덕사(修德寺)는 한 세기 반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다. 백제 위덕왕(554~597) 때 창건했다는 학계 추정과 법왕 1년(599년) 지명(智命)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대웅전 안에 모신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과 노사나불 괘불탱은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차례로 고려 충렬왕 34년(1308), 조선 인조 17년(1639), 조선 현종 14년(1673)에 조성되었단다.

복장유물에서 1639년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대웅전 삼존불을 대하는 느낌이 남달랐다. 고향에 있는 사찰 '수다사' 대웅전의 아미타불이 1649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란으로 인한 상처를 보듬으며 병자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벼르던 때 삼존불 조성은 백성들 마음을 위로하고 뜻을 하나로 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굽어보는 듯한 자세와 넓고 당당한 어깨와 무릎 등이 수다사 아미타불과 닮았다.

예정된 시각이 멀지 않아 마음에 이는 조급증을 달래 가며 수박 겉핥듯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범종각 고루 등 전각들을 빠른 걸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기둥과 처마 등에 단층을 하지 않고 외벽도 불화 대신 샛노란 단색으로 처리해서 담박한 대웅전, 특히 측면 기둥과 공포가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조화를 이뤄낸 면 분할이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는다.

"공포와 가구부재에 나타난 세련된 곡선미와 질서 있는 구성미는 구속된 형식에서 탈피한 자유화 형식"이라는 어느 지식백과의 설명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고대와 현대의 미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 않음이 경이롭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나 구조 장식 양식 규모 형태 등이 백제의 특성을 보인다는 설명도 마찬가지다.

대웅전 앞 너른 마당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서면서 사천왕문 금강문 일주문을 차례로 지나며 수덕사를 빠져나왔다. 일주문을 마주 보고 서서 왼편으로 개울 위에 놓인 돌다리 수덕교를 건너면 수덕여관과 禪미술관이 나란히 자리한다.


원래 비구니들이 머물던 절집이었다는 수덕여관 문으로 들어 마당을 지나 훌쩍 빠져나왔다. 근현대 우리나라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이응로(1905~1992)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라 한다.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 후 사면되어 이곳으로 돌아와서 머물다 1969년 프랑스로 떠났다고 한다.

여관 한쪽에 자리한 너럭바위에 그가 남긴 두 개의 암각 추상화는 시간에 쫓겨 찾아볼 생각조차 잊고 말았다. 그 의미를 묻는 말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라고 대답했다니, 느긋하게 안내문을 읽어보는 여유라도 가졌더라면 지나칠 수 없었을 터인데, 나는 내 모습이 어떤지 살펴볼 기회를 놓친 셈이다.

수덕여관은 바삐 스쳐 지나는 산객에게 이응로와 더불어 그의 조강지처인 박귀희 여사, 일엽 스님, 나혜석 등 그 시대 자신을 거쳐간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부챗살 모양의 지붕이 이채로운 '수덕사 禪미술관' 앞 광배를 두른 귀여운 모습의 양면 부조 좌불상 옆을 지나고 사하촌과 산문을 경계 짓는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라는 현판이 걸린 선문을 나서며 덕숭산과 수덕사에 작별을 고한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는 말을 되뇌며.. 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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