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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04. 2021

울릉도 성인봉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렁울렁 울릉도

강릉에서 배편으로 울릉도로 입도했다. 저동에 짐을 내리고 이튿날 오전 출발하는 '섬 일주 투어'에 올랐다. 도동을 출발해서 시곗바늘 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통구미 남양 구암 태하 성불사 나리분지 관음도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기실 타이틀과는 달리 성인봉 산행을 염두에 둔 일정이다.


울릉도 군목(郡木)인 아름드리 후박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관해정(觀海亭) 앞에서 버스에 올라 도동에서 투어객 10여 명과 합류했다. 해안을 따라 난 좁은 도로의 왼쪽은 망망대해요 오른쪽은 용암이 흘러내리다가 굳은 깎아지른 절벽이 절경을 펼친다.

울릉도 저동항(좌)과 관해정(觀海亭) 부근 모습

육지로 기어오르는 거북형상 바위와 향나무 자생지로 유명한 통구미 마을에서 버스가 잠시 정차했다. 일제강점기 남획으로 멸종된 강치, 거북바위 앞 강치 가족 조각상이 인간의 무자비한 약탈과 이기심을 질타한다.


곳곳에서 터널을 뚫고 매립하고 도로를 넓히고 축대를 고치는 등 공사가 한창이다. 비파산, 사자바위, 투구봉 등이 볼만한 남양을 지날 때 마을 뒤로 하늘 높이 구름을 이고 있는 성인봉 모습이 경이롭다. 태극문양처럼 층층이 휘도는 수층교와 울릉도 첫 개척지라는 태하 마을을 지나고 현포에서 코끼리 바위도 조망했다.


태풍 레끼마의 북상

현포 부근 호박엿 판매점을 둘러볼 때 가이드 겸 버스기사가 오늘 중 서둘러 섬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귀띔한다. 중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큰 피해를 끼친 태풍 레끼마에 이어 일본 동남쪽 해상에서 북상 중인 제10호 태풍 크로사가 15일 전후 울릉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예보다.


추산리 성불사는 바다로 내리 꽂힐 듯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원뿔꼴의 송곳봉 옆 평지에 살짝 비켜 앉아 있다. 석조약사여래 대불을 봉안한 이 사찰은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내자는 염원을 담아 호국 불사로 2000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태풍이 오면 2~3일은 배가 뜨지 못한다.'는 현지인들 말에 따라 출도 일정을 오늘로 하루 앞당기기로 했다. 그렇지만 강릉행 배표는 이미 매진이고 10여 석 남았다는 도동발 묵호행 '씨스타 3호'는 터미널에서 직접 예매를 해야 한단다. 산행을 포기할까, 배표를 구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섬에 갇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하다.


버스가 60만 5천 평 나리분지로 올라섰다. 내겐 산행 기점이요 투어객들에겐 휴식과 점심식사 장소다. 산행 소요시간과 여객선 출발시간을 가늠하며 나리분지에서 산채비빔밥 점심을 든다는 아내와 투어 일행을 뒤로하고 성인봉으로 향한다. 일일투어 종점 도동에 오후 한 시쯤 도착할 아내에게 배표 예매를 당부했지만 성인봉으로 향하는 마음이 무겁다.


너른 나리분지를 뒤로하고 숲 쪽으로 걷다 보면 깃대봉, 알봉 둘레길, 성인봉 등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성인봉까지 3.47km라고 알려준다.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은 울창한 숲에는 수천수만 마리의 매미들이 어디서 다 모여든 듯 장마철 터진 봇물처럼 떼창을 불러댄다.


산책로처럼 평탄한 그 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이마엔 땀이 맺히고 바람은 느리지만 서늘하고 나무들 틈새로 내리비치는 햇빛은 강렬하다. 섬백리향 군락지와 투막집 앞 갈림길을 지난 500여 미터 지점 너른 터 산비탈 바위돌 틈새에서 쉼 없이 약수가 흘러나오는 성인수가 쉬어가라 손짓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일단의 산객들처럼 나도 약수로 목을 축이고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계단 길을 따라 성인봉까지 2.15km가 본격적인 산행이다. 계곡을 좌우로 넘나들며 높은 곳으로 난 나무계단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 난간을 잡고 머리 높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발 한발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흡사 깊은 우물에 들어앉은 개구리 꼴이 아닐까.


해발 670미터 능선에 올라서니 성인봉 우측의 여러 준봉들이 멋진 그림을 펼쳐 보인다. 속까지 개운하게 씻겨줄 듯한 바람은 덤으로 안겨준다. 천연기념물 189호로 지정되었다는 원시림 또한 장관이다.


내려오는 산객들이 계단 수가 1600여 개라 많이 힘들 것이라 걱정스레 귀띔해 주는 말에는 힘겹게 오른 성인봉이 펼친 장관에 흠뻑 빠졌다가 내려오며 누리는 여유로움이 은근히 배어 있다. 오히려 내겐 거친 산길 대신 가지런히 놓인 계단 길이 반갑고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어떤 장관이 펼쳐질지 기대와 셀렘 마저 인다.


성인봉으로 한 발 한 발..

울창한 숲 속에서 간간이 이름 모를 새가 휴식을 방해하는 산객이 귀찮다는 듯 부스럭 소리를 내며 종종걸음으로 내달린다. 울릉도에서 여름을 보내며 번식을 하고 일본 시마네현 오키노시마 섬 등에서 월동을 한다는 울릉도 군조(郡鳥)인 천연기념물 237호 흑비둘기일지도 모르겠다.


해발 750미터 주 능선으로 올라서니 정상까지 820미터라는 이정표가 반긴다. 속이 움푹 파인 고목 두 그루가 눈길을 끈다. 저리 큰 상처를 끌어안고 오랜 모진 세월을 꿋꿋이 견디고 늠름하게 서있니 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넝쿨에 몸통이 칭칭 감긴 어떤 나무는 두 마리의 큰 바다뱀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조각상 '라오콘'과 흡사하다.


배편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여 눌러대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갑갑하다. 성인봉이 막바지 가파른 능선으로 전파를 차단하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것일까. 계단 땀 시간 전화와 씨름하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산행이 더욱 힘겹다.


성인봉 600여 미터 못 미쳐 만난 약수터는 가슴 높이의 돌담 벽 가운데 거북목처럼 튀어나온 꼭지로 굵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지형이 많은 물을 머금고 있다가 저리 약수를 내뿜는 것이리라. 한 바가지 받아 들이키니 갈증이 가시고 기운이 돋는다.


성인봉 턱밑에 서 있는 도동과의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면 곧 정상이다. 원시림에 둘러싸인 바윗돌 무더기 중앙에서 칼날처럼 뾰족한 바윗돌에 '성인봉(聖人峯)'이라고 한자로 세로 새김 한 정상 표지석이 반긴다. 표지석 뒤쪽 조망처에 서니 천두봉 형제봉 미륵봉 말잔등 등 나리분지를 옹위하듯 둘러싸고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들이 바람에 흐르는 구름에 머리를 보였다 숨겼다 한다.


산객이 한 명도 없는 해발 986미터 성인봉 정상에서 표지석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마음껏 느끼면서 한동안 나란히 서있었다. 도동 쪽으로의 하산은 가파른 경사만큼이나 시간에 쫓기는 마음도 급하다.


오를 때와는 달리 바닥은 라텍스를 밟는 듯 폭신한 흙길이다. 바람에 서걱대는 산죽 군락이 늘어선 길을 한참 지나고 보수 중이라 출입이 막힌 팔각정도 지났다. 자못 기대했던 전망은 없지만 고사리과 초목의 융단이 깔린 능선에 늘어선 쭉쭉 뻗은 원시림이 시원스럽다.


도동과 안평전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지나 멀리 성인봉에서 갈라져 내린 산줄기 사이에 안긴 사동이 숲 너머로 보일 듯 말듯하다. 춤추듯 울릉 울릉 출렁대는 다리를 건너고 도동과 사동으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오면 산행 막바지다. 왼편으로 도동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KBS울릉중계소 쪽 날머리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근심과 그리움

비록 시간에 쫓겨 느긋하게 산행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일 년 중 300일이 안개에 덮인다는 성인봉을 온전히 볼 수 있었으니 이만한 행운도 없지 싶다. 아내가 오늘 뭍으로 나가는 배표를 구했다니 천만다행이다. 저동으로 가서 짐을 챙겨 도동항으로 넘어왔다.


유치환이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있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이라고 노래한 울릉도, 지금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섬이다. 내일은 광복절이라 이곳에도 태극기가 물결치고 광복의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질 것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화산체로 곳곳에 절경을 품은 섬, 일본으로부터 두 번이나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서계를 받아낸 안용복의 혼이 살아있는 섬, 순박하지만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는 섬, 울릉도를 뒤로하고 배에 올랐다.


빗물이 어린 '씨스타 3호' 유리창 밖으로 도동 항이 어른거리며 멀어져 간다. 청마처럼 문득 그리운 마음이 사무치거나 간절함이 가슴에 맺힐 때면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가보면 어떨까? 떠나기 전에 일기예보를 주시하면서. 2019-08 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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