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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06. 2021

백덕산과 사자산

알람보다 한 시간 일찍 잠이 깼다. 채널 쇼핑을 하다가 윔블던 준결승전 첫 세트를 지켜봤다. '페더러의 우아함과 나달의 힘을 겸비한 선수’라 평가받는 조코비치가 나달로부터 첫 세트를 가져갔다. 神技의 경지에 오른 두 선수가 서로 상대의 작은 허점을 파고들며 스코어 게임 세트를 따내는 모습이 스펙트컬한 한 편의 드라마 같다.


'테니스의 황제' 페더러는 8강에서 탈락했다니 컨디션 난조나 대진 운이 나쁘거나 실력이 녹슬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판교역에서 객실이 헐렁한 첫 전철을 타고 경부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주말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령되었지만 일출 전 구름이 드리운 새벽 공기는 아직 달궈지지 않아 선선하다.

영동선 고속터미널에서 M을 만나 제천행 버스에 올랐다. 승객이 절반도 차지 않은 버스가 출발하고 졸다 깨다 하다 보니 두 시간여 만에 진한(辰韓) 발상지라 여겨지고 점말동굴 의림지 등이 떠오르는 도시 제천으로 들어섰다. 주택가 골목 좁은 도로변에 나란히 자리한 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시골스러워 보인다.

단양에서 차를 달려온 H와 합류해서 사자산 자락의 법흥사, 영월 무릉도원면과 평창읍 경계에 있는 백덕산 산행의 출발지로 향했다. 제천-법흥사 30여 km, 82번 국도를 달려 제천의 경계를 벗어나면 강원도 영월 주천면이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횡성 강림면과 영월 수주면 주천면을 지나 한반도면에서 평창강과 만나 서강으로 흘러든다. 영월에서 동강과 만난 서강은 남한강의 본류가 되니, 물이 산과 골을 따라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로 회귀하는 것은 뻔한 진실을 앞에 두고 시시 때때 궤변을 내뱉는 사람들도 거스를 수 없는 엄숙한 자연의 이치다.

구불구불 흐르는 주천강을 끼고 주천과 무릉도원의 면사무소가 사이좋게 자리한다. 무릉도원면 김삿갓면 한반도면 등 독특한 이름의 행정구역을 가진 영월의 경계로 들어서니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주천강 위로 놓인 다리 서넛을 건너 무릉도원면에 들어서서 법흥천과 나란히 달리는 무릉법흥로를 따라간다. 계곡을 따라 들어선 펜션과 캠핑장은 말쑥한 차림으로 곧 몰려올 피서객을 기다리고 있다. 법흥사 일주문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 채비를 했다.

지나는 차를 얻어 타고 백덕산 우측 능선 신선봉으로 오르는 들머리까지 2km여 거리를 줄였다. 고향 영월을 떠나 대전에서 살다가 16년 전 이곳으로 돌아와 펜션과 야영장을 운영한다는 그분, 차 한 잔 들고 가라는 후덕한 그분의 과분한 호의를 뒤로하고 풀과 숲이 무성한 들머리로 들어섰다.


들머리에서 해발 1100미터 신선봉까지 3km여는 힘겨운 오르막길이다. 800미터 고지 능선 위로 접어드니 시야가 조금 터이고 비 오듯 하던 땀도 그치고 한결 편해졌다. 능선 너머 계곡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고, 멧돼지란 놈은 능선 흙길 여기저기를 들쑤셔 놓았다.


고도가 오를수록 소나무 숲은 참나무 숲으로 그리고 산죽이 뒤덮인 능선으로 바뀌었다. 두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바위 위에 올라서니 흥원사와 법흥계곡이 눈 아래로 들어오고, 백덕산에서 좌측 사자산과 구봉대산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이 눈높이로 길게 펼쳐져 있다.


신선봉에서 백덕산 정상까지도 만만찮은 여정이다. 능선 중간중간 막아선 거대한 암봉들을 좌우로 우회하고 철제 계단을 오르는 길은 그나마 그늘이 져 다행이다. 평탄한 능선 길은 고맙지만 어쩌면 가파른 비탈길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경사 큰 비탈일수록 짧은 시간에 고도를 높여 더 빨리 정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든 고비는 동시에 비약의 기회일 수도 있다.


무겁지만 한 발 한 발 쉬지 않고 옮기다 보니 어느덧 해발 1350m 정상에 닿았다. 작은 걸음이 모여 먼 길을 가게 하니 다른 일도 산행과 마찬가지일 터이다. 촉 소열제의 유훈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이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있듯이...


한낮 태양이 강렬히 내려 쬐는 정상을 뒤로하고 사자산 쪽으로 향했다. 큰 배낭을 지고 우리와 같은 코스로 올라왔다는 홀로 산객은 사자봉을 지나 구산대봉 쪽으로 진행할 거라며 호기롭게 걸음을 옮긴다. 고도 1000이 넘는 긴 능선 길 곳곳을 막아선 바위 봉우리들을 우회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멀찍이 앞서가는 H를 두고 M과 함께 숨을 고르며 코스를 점검하다가 예정 경로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뿔싸! 앱을 확인하니 해발 1180미터 사자산도 지나쳤다. 우회한 여러 봉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사자산이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법흥사로 내려가는 갈림길도 지나쳐 북쪽 횡성군과 평창군 경계인 문재 쪽으로 한참을 내려오고 말았다. 1km여를 되돌아 오르는 알바는 괴롭고 힘겹다. 모자 창끝에서 땀방울이 이른 봄 처마 밑 고드름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목은 타고 발바닥은 뜨겁지만 무아지경 runners' high처럼 걸음은 저절로 앞으로 움직여 주니 신기하다.


법흥사 뒤 연화봉 쪽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사재산 1봉 1166m'라 적힌 나무 푯말이 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카카*맵'은 이곳이 '사자산 1181m'라 표기하니 어느 것이 맞는지 의아하다.


여기서 남쪽으로 1.5km여 지점이 해발 924m 연화봉이다. 연화봉은 전국 여러 곳 같은 이름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능선 아래에 사찰 하나를 품고 있다. 연화봉에서 해발 520여 미터에 자리한 법흥사까지의 희미한 하산 길은 가파르고 험해서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코스다.


유격 훈련하듯 땀과 피로가 범벅이 될 즈음 비탈길이 끝나고 사찰에 딸린 밭과 함께 하늘에 닿을 듯 키 큰 노송들 사이로 범종 소리가 들려오던 법흥사가 모습을 보인다.


월정사의 말사로 자장율사가 창건한 법흥사는 상원사, 정암사, 통도사, 봉정암과 함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자리한다. 신라 말 선문 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이던 이 사찰엔 널찍한 터에 비해 대웅전 적멸보궁 산신각 심우장 등만 남아 단출한 모습이다.


어른 키 높이 지름의 큰 대리석 물동이가 사자머리 아가리가 쏟아내는 약수를 받아 그득 품고 넘쳐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땀에 젖은 머리와 얼굴을 찬 약수 물로 헹궜다. 대웅전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200여 미터 비탈길이 힘겹다. 목탁소리는 끊이지 않고 꿇어앉아 합장한 불심은 가늠할 길 없다.


법흥사에서 일주문까지 1km여의 아스팔트 길을 나란히 터벅터벅 걸었다. 긴 여정을 마치고 열 시간 만에 산행 원점, 대리석 거북과 코끼리가 양쪽 기둥을 받치고 선 사자산 일주문으로 돌아왔다.


번잡한 세상일들을 떠올릴 겨를을 주지 않던 산행, 온갖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라는 적멸보궁의 목탁 소리, 산행 끝에 마주한 텅 빈 허기와 갈증을 짊어지고 제천 터미널에서 두 친구와 작별하고 막차에 몸을 실었다.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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