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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Sep 13. 2021

오대산과 상원사

양재에서 친구 M을 만나 산행버스에 올랐다. 출발 두 시간 반 만에 진부IC로 내려 월정사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산 그늘이 차창으로 들이치던 태양을 가려 주어 차양막을 걷었다. 월정사성보박물관을 지나자 길 옆 전나무 숲이 보기 좋다. 월정사매표소를 지나서 계곡을 따라 10km 지점에 월정사가 자리한다.


영동과 영서 군부대들을 두 달 마다 옮겨가며 근무하던 군 복무 시절인 30여 년 전에 들렀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옛 기억을 되살려 주었었다. 차창 밖 숲 너머로 어렴풋한 옛 기억처럼 월정사를 스쳐 보낸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월정사에서 계곡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상원사까지 이어지는 약 8.5km의 숲길은 선재길이다. 화엄경에서 53인 성현을 편력하며 구도하던 선재동자의 이름을 딴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녹음 속에 묻혔다 나타났다 하며 오르내리고 있다.

산행 들머리 상원사 주차장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리니 부근에는 산객 등 행락객들이 적지 않다. 주 목적은 오대산 산행이지만 상원사와 적멸보궁 등 그 품에 안겨있는 불교성지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오대산은 문수 관음 대세지 지장 등 네 보살과 아라한이 각각 상주하며 설법하던 곳이라는 동서남북중 다섯 개의 평평한 대지로 둘러싸여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산상에 5개 대형(台形) 봉우리가 있어 이름 붙은 중국 산시성 북동부의 불교 영산 오대산과도 그 이름과 유래가 닮았다.


넉넉치 않은 주어진 시간과 가야할 거리를 가늠하며 중대를 거쳐 비로봉으로 직행하려다가 만화루를 통해 상원사에 들렀다. 상원사는 한암 스님의 깊은 불심으로 6.25 전쟁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고 남은 사연과 함께 여러 유물과 많은 얘기를 안고 있다. 청풍루 대신 옛 출입문이던 만화루에 문지기인양 지키고 서있는 단단한 고목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조각한 전신 달마상을 스쳐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상원사 동종은 경주 봉덕사 에밀레종과 더불어 현존하는 단 두 개의 신라 범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다. 725년에 주조되어 안동누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다가 조선초 예종 때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유리 보호각에 있어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종신에 양각된 공후와 생을 주악하는 비천상 등 아름다운 모습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세조, 그 패역한 인간의 고통마저 따뜻하게 감싸 안아 피부병을 낫게 했다는 문수동자, 그 동자상과 문수보살이 자리한 문수전 앞을 한참 서성였다. 숭유억불의 국시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멀고 가까운 여러 사찰을 찾아 자신이 쌓은 패덕과 악업을 조금이나마 씻어 보려 했던 것일까?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인륜을 저버리는 왕이나 간신들과는 달리 불사이조의 두문동 칠십이현, 불사이군의 사육신 등 끝까지 의리를 지킨 충신들이나, 조광조 정약용 등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거나 죽임을 당한 숱한 명현들은 당대 불운한 생과는 달리 역사에 길이 아름다운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이생 건너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면 이생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는 분명해 보인다.


기념품 매점 수다라 앞에는 양산을 들고 고무호스로 화단에 물을 뿌리는 보살님과 연꽃닢 우산을 들고 쪼그려 앉아 있는 동자상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상원사를 빠져나오면서 올려다 본 만화루의 천정, 장고와 북을 치거나 피리나 나팔을 불고 비파를 타는 등 천진한 얼굴과 자연스런 몸 동작의 문수동자들을 그린 천청화가 오색광명 깨달음의 희열을 눈으로 보는 듯 하다.


비봉을 향해 중대로 가는 넓은 길, 돌과 시멘트로 정치하게 포장된 그 길을 따라오르다가 아차 싶었다. 허리통을 잡았던 스틱을 손잡이 부분으로 고쳐 잡는데 느낌이 낯설다. 배낭을 벗어 던지고 문수전으로 달려갔더니 스틱 주인은 포대화상 같은 미소로 내 실수를 용인한다. 쪽문 사이로 문수동자상을 한 번 더 보고 난간에 기대어 있던 스틱을 집어 드는데 스틱은 칠칠맞은 주인을 다시 만난 것이 반가울까?


청량한 바람은 솔솔 불지만 내달음질로 땀이 흥건한 이마와 목덜미를 훔치며 중대사자암으로 향한다. 돌계단을 오르고 능선을 휘돌면 가파른 능선을 따라 층층이 당우들이 들어선 사자암이 맞아준다. 맨 위 5층의 비로전을 들여다 보고 동서남북중 다섯 대 모습 등 바깥 벽면의 벽화를 둘러보았다.


적멸보궁은 사자암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 상원사 계곡 쪽으로 뻗쳐나온 아담한 능선마루 위에 호위하듯 둘러싼 오대산 주능선에 포근히 안겨있다. 정암사 통도사 법흥사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보궁으로 오르는 긴 화강석 돌계단 옆에 하늘매발톱은 겉과 속 꽃잎이 각각 보라색과 노랑색으로 신비스런 꽃을 활짝 피워냈다.


적멸보궁은 규모가 아담하지만 용마루와 처마의 기와, 속처마의 나무조각, 문짝 그림 등은 온통 용의 머리 형상으로 위엄스럽다. 반면, 보궁 바깥 벽면은 학과 산수가 어우러진 멋드러진 그림이 채우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마애석탑이 있는 보궁 뒤로 한 바퀴 돌아 비로봉으로 길을 잡는다.


비로봉까지 고목 숲으로 덮인 1.5km 능선길은 바람이 좋다. 에어컨 바람과는 견줄 수 없는 상쾌함이 마음까지 스며든다. 정상 아래 막바지 태양의 열기로 나무계단 위 폐타이어 깔판에서 피어오르는 고무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오대산 비로봉 정상의 산객들
 고사목과 하산길 모습

해발 1563미터 비로봉에는 먼저 올라온 산객들이 모여 들뜬 모습으로 산정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다. 사방으로 툭 인 전망은 상왕봉 두로봉 노인봉 동대산 등 오대산 군락과 발왕 가리왕 계방 방태 점봉 설악 등 산군들까지 보여준다.


산객들 대부분이 비로봉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 가지만 상왕봉과 북대삼거리까지 이어지는 3km 남짓 완만한 능선은 주목 군락과 기묘한 모습의 자작나무 고목들이 이름 모를 풀꽃들과 어우러진 환상적인 길이다.


크고 작은 상처를 품었지만 의연히 서 있는 고목들, 삼삼오오 한 가족처럼 뿌리를 한 곳에 둔 자작나무들, 줄기와 가지를 해골처럼 드러내고 쓰러져 누운 고목, 용트림하며 하늘 높이 치솟은 거목 등이 어우러진 그 길은 알 수 없는 오랜 원시의 숨결이 느껴진다.


고사한 주목과 키가 작지만 둘레가 굵은 당당한 주목이 옆에 서있는 공터에서 허기를 채웠다. 상왕봉과 두리봉 사이 길림길에서 임도로 내려섰다. 녹음이 짙은 가파른 능선을 끼고 내려가는 임도에도 시원한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온다. 굽이굽이 휘돌며 비로봉 아래 쪽로 깊숙히 파고들고 나는 임도 위로 지나온 능선이 거대한 담장처럼 막아섰다 비켜섰다 한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휘돌던 임도가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아래쪽 깊숙히 멀던 계곡이 슬며시 다가오며 상원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물소리도 점점 더 크고 경쾌하게 들려온다. 상원사탐방지원센터로 내려서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동서남북 대를 비롯해서 코앞에 두고 지나친 청풍루와 청량다원, 한암 탄허 만화 선사의 부도전, 세조와 문수동자의 일화를 전하는 관대걸이, 하산길 비켜지나온 북대 미륵암, 세종실록지리지에 한강의 첫 물이라 기록했다는 ‘서대 수정암의 우통수’ 등 오대산이 품은 숱한 명소에 끌리는 마음을 타일러 버스에 몸을 싣는다.


상원사탐방지원센터에서 집어온「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라는 책자 속 시 한 편으로 아쉬워하는 마음을 달래본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山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산에 언덕에, 1963,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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