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천 터미널 부근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명성산 산행 들머리인 산정호수까지는 7km 남짓이다. 대학시절에 찾았던 남이섬 화양동계곡 등과 함께 언젠가 한 번 찾아온 듯한 산정호수에 대한 기억은 멀리서 가물거린다.
선선한 기운이 도는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두 세 명씩 무리 진 산객들이 띄엄띄엄 들머리로 향한다.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을 따라오는 물소리가 서늘하다. 여름의 끝자락을 떨치고 가을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아직도 몸은 정직해서 계곡을 따라 한참 걸으니 이마에 땀이 솟고 등에서는 땀이 배어 나온다. 계곡은 좁아지다 넓어지고 완만하다 가팔라지며 곳곳에 폭포와 소沼를 만들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는 등룡폭포는 높고 너른 너럭바위 위에서 이단으로 물줄기를 떨어뜨리며 장관을 펼친다. 폭포 아래 데크에서 폭포를 감상하는 산객들은 벌써 가을의 한 복판에서 단풍처럼 마음이 붉게 물든 듯 들떠 있다.
발치 앞으로 다가온 좌우 등성이로 능선이 가까이 있을 것이라 가늠해 보지만, 예상을 여지없이 뒤엎으며 계곡은 등성이 사이로 깊숙이 파고든다. 군 포격 훈련시설을 알리는 경고판이 붙은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아 서며 계곡과는 작별하고 철망을 오른편에 끼고 억새 지대를 향해 오르막을 치고 올랐다.
데크가 놓인 억새바람길에 올라섰다. 좌우 너른 능선을 억새가 온통 뒤덮었다. 다음 달 억새축제를 앞두고 나무데크를 놓는 일꾼들의 일손이 분주하다. 억새밭 초입 아래쪽 바람은 아직 푸른빛을 띤 억새를 살랑살랑 감질나게 흔들며 이마에 솟은 땀을 씻어준다. 능선 위 팔각정에 오르니 야생화와 어우러져 물결치며 일렁이는 억새군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능선 위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일거에 땀을 훔치며 능선 너머로 사라진다.
팔각정에서 삼각봉으로 오르는 암릉은 억새밭과 멀리 겹겹이 늘어선 산군을 보여주다가 능선 뒤로 숨겨놓았던 산정호수를 내놓는다. 온몸으로 바람을 받으며 좁고 긴 암릉을 지나는 길 곳곳에 핀 이고들빼기 산부추 구절초 쑥부쟁이 등 야생화들이 발랄한 시골 아가씨처럼 바람에 산들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삼각봉으로 가는 긴 능선 우측으로 산군에 둘러싸인 야산은 산림을 걷어내고 도로와 표적을 만든 군부대 포격 훈련장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군부대 포격훈련이 잦아지며 등산객들 불안이 크지자 입산 통제하는 날도 늘어났더란다. 아웃도어 전문기업인 블랙**는 100대 명산 목록에서 명성산을 빼고 9월 1일부터 남양주의 천마산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시나브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해태상이 장방형 사각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삼각봉에 닿았다.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고 화재와 재앙을 물리친다는 영험한 상상의 동물, 이곳 해태상은 포격훈련으로 자주 발생하는 산불 예방을 염원하며 포천시 주도로 경기소방본부 헬기 지원을 받아 2008년 6월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해태는 훈련장이 있는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쓰이면 힘써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은거한다(用行舍藏)는 말도 있으니, 산중으로 부름 받은 해태는 자기 본분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지 싶다.
해태상을 뒤로하고 600여 미터 거리의 명성산 정상으로 향한다. 그 중간 능선에 '여기부터는 강원도 철원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얼떨결에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넘는다. 해발 923미터 명성산 정상 표지석은 철원군에서 세웠다. 표지석 바로 옆에서 일단의 산객이 자리를 틀고 앉아 음식판을 벌여 놓아 인증 숏을 남기고 서둘러 궁예봉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918년 부하였던 왕건에게 이곳까지 쫓겨와서 최후의 결전을 치른 궁예, 중과부적으로 전의를 상실한 그가 군사들에게 해산을 명하자 모두 태봉국의 비운을 통곡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이 산중에서 가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명성산 또는 울음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평탄하고 완만한 굴곡의 능선으로 연결된 삼각봉 명성산과 뚝 떨어져 앉은 궁예봉은 가파른 암반 길을 오르내려야 닿을 수 있다. 그 형세가 사면초가에 몰린 궁예처럼 보이기도 하고 봉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는 기왓장 파편들은 궁예의 비극적 최후를 얘기해 주는 듯도 하다.
지나온 능선과 삼각봉 명성산 등 여러 봉우리가 훤히 바라보이는 궁예봉의 천 길 낭떠러지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을 열고 허기진 배를 달랬다. 명성산과 궁예봉 사이 안부로 되돌아 내려와서 산안고개로 하산길을 잡았다.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돌과 바위가 깔린 가파른 너덜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지난 태풍에 넘어진 건지 길 옆 여기저기 나무들이 꺾이고 부러져 누워있고 길바닥엔 잔가지가 흩어져있다. 길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쓰러진 노송을 타 넘고 지난다. 번잡한 생각과 과한 욕심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중심을 잃게도 한다. 쓰러지지 않은 나무들은 스스로 가지를 꺾어 던져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정호수에서 철원으로 넘어가는 산안고개로 내려섰다. 날머리 산자락 평지에 암벽을 잔뜩 드러낸 명성산을 배경으로 가지런히 놓인 벌집들 주위로 꿀을 모으는 벌들이 분주하다. 아스팔트 길 옆에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린다.
들머리 부근 등룡폭포를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던 젊은 여성 둘, 하산 코스에서 다시 조우한 그들은 지친 기색도 없다. 아스팔트 길을 앞서 걷는 가벼운 발걸음이 코스모스처럼 발랄하다. 기실 그 어떤 꽃이 젊음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멋진 펜션과 잘 가꾸어진 각종 꽃들이 눈길을 잡는 호수공원까지 3km 남짓 거리가 무거워진 발 때문인지 멀게 느껴졌다. 사륜 모토바이크 행렬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스쳐 지난다. 호수변 식당가 산책로 유원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호젓한 주말 오후를 느릿느릿 유영하듯 만끽하고 있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산정호수를 뒤로하는 마음은 가을을 기다리는 억새처럼 일렁인다.
[프롤로그..]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북상 중이라는 태풍 '타파'의 영향인지 낮게 드리워진 하늘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파트 옆 공원에서 산책을 나온 듯싶은 노년의 부부 한 쌍이 언쟁을 하고 있다. 오래도록 숨기며 참아왔던 상처가 곪아 터진 걸까? 수 십 년을 서로 마음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온 부부도 가끔 삐걱거리는 순간이 있나 보다.
까치는 상쾌한 공기에 절로 기분이 좋은지 마실 나온 사람처럼 땅에 내려앉아 깡총거리며 깍깍댄다. 터미널로 가서 휴전선과 10여 리 떨어진 철원군 서면 와수리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포천과 철원에 걸쳐있는 명성산을 둘러볼 요량이다. 48인승 버스에는 승객이 채 열 명도 되지 않는다.
통로 건너편 젊은 여인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신발을 벗은 채 양반다리로 앉아서 팩을 찍어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등 치장에 여념이 없다. 군 복무 중인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걸까? 앞 좌석 두 중년 여인은 오랜만에 만났는지 신변잡사를 둑 터진 봇물처럼 그치지 않고 쏟아 낸다.
복정 전철역 부근엔 여느 주말처럼 산객들을 기다리는 산행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송파 석촌 잠실로 이어지는 말쑥한 송파대로 보도를 걷는 얼리버드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잠실역 옆 L빌딩은 얼굴을 차창에 바짝 붙이고 머리를 뒤로 잔뜩 젖혀도 꼭대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한강 상류 쪽으로 88m 높이 주탑 4개 위에 88 올림픽 성화대를 형상화한 모습이 인상적인 올림픽대교를 바라보며 잠실대교를 건넌다. 한강은 아무 일렁임 없이 잔잔하다. 세종-포천 간 고속도로 남구리 IC로 들어서서 망우산 밑 터널을 순식간에 지난다.
별내를 지나고 수락산 자락을 관통하는 남양주 터널도 지나서 한 시간 여만에 포천으로 들어섰다. 한산한 거리와는 달리 바짝 군기가 들어 보이는 신병들과 휴가를 나온 듯싶은 젊은 병사들이 행선지로 향할 버스를 기다리는 시외버스터미널은 제법 번잡하다.
포천 시내를 벗어나 43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는 도로변에 철원 운천 산정호수 비둘기낭 폭포 등의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스쳐 지난다. 포천천이 한탄강 지류인 영평천으로 흘러드는 곳, 영중면 '38선 휴게소'는 6.25 이전 이 일대로 남북을 가르는 38선 철책이 가로놓였음을 말해준다. 자그마한 운천역에 30여 년 전 내 모습처럼 따블 백 맨 대한민국 청년들이 도열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