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물러나고 불볕더위가 찾아왔다. 이런 무더운 날에는 꼼짝하지 않고 집에 있거나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히는 것이 상책일 텐데, 산행이라니 좀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다.
장맛비에 젖고 시름에 젖어 눅눅해진 몸과 마음을 강렬한 햇볕에 바짝 말려 보려는 심산이 발동한 걸까. 출어에서 돌아와 던져두었던 찢어지고 엉킨 그물을 다시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도락산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친구 M과 함께 했다. 이른 아침 집 밖 공기는 후끈하다. 신사역 부근 출발지에 행선지와 함께 낯익은 산악회 이름들이 앞유리창에 붙은 산행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폭염에도 아랑곳 않고 많은 남녀노소 산객들이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두 시간쯤 달렸을까, 천등산 남서쪽에 멀찍이 자리한 아담한 천등산 휴게소는 차량과 인파로 빼곡하다. 지금은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렸으니 옛 노래처럼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일은 없지 싶다.
중앙고속도로 단양 IC로 내려서면 대강면인데, 친구 모친이 좋아했다는 맛이 특별하다는 대강막걸리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한 번 맛보고 싶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임이 도로변 남조천 건너편으로 스쳐 지난다. 사인암은 한때 이곳에 머물렀던 고려 때 정 4품 '사인' 직책을 지낸 우탁을 기려 붙인 이름이란다. 도락산 서쪽 단양천 선암계곡을 따라서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 자태를 뽐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과 더불어 단양팔경으로 불린다.
지방도로 '사인암로'는 첩첩산중 협곡을 지나 59번 국도 '선암계곡로'와 합류한다. 차창 밖 산비탈에 기대어선 집 울타리에 능소화가 만발했고 오동나무는 가파른 산자락과 키재기 하듯 하늘 높이 쭉 뻗었다.
버스는 상선암 부근 월악산 국립공원 탐방센터에 산객들을 토해놓았다. 도락산이 병풍처럼 뒤에 둘러선 들머리 상선암 마을 가파른 골목을 한참 지난다.
마을 담벼락 옆 대추나무는 새끼손가락 끝마디 만한 열매들을 무성한 잎 사이에 품었고, 비탈 경사진 밭에는 콩, 옥수수, 참깨, 고추 등 농작물들이 하나같이 짙은 녹색을 띠었고, 마당이 깊은 집 울타리에 얼굴을 내민 해바라기와 원색의 꽃들은 산골 처녀처럼 발랄하다.
들머리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검봉과 채운봉을 지나 나오는 삼거리에서 신선봉과 도락산 정상을 다녀온 후 오른쪽의 형봉 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내려설 요량이다.
숲으로 들자 계단이 나오며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그런지 다리와 관절이 찌릿하고 심장은 금세 버거워한다. 후끈한 열기에 터진 수도관처럼 열린 땀샘은 그칠 줄 모르고 얼굴과 온몸을 땀범벅으로 만들었다.
월악의 식구답게 가파른 오르막길 중간중간 기묘한 모습의 큰 바위들과 암봉이 나타나지만 마음은 하나하나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다. 검봉까지 오르는 동안 지나왔을 작은 선바위, 큰 선바위, 범바위는 제대로 짚어 보지도 못하고 스쳐 지났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모자와 스틱조차 귀찮고 무겁게 느껴진다. 혈기방장 하던 때 나를 잘 건사해준 심장 다리 폐..., 이런 몸 식솔들을 이제는 내가 보살피며 잘 돌봐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앞서 갔던 산객이 지갑과 휴대폰이 든 작은 가방을 초입 계단 난간에 두고 왔다며 되돌아 내려오고 있다. 조금 올라가려니 그분 모자도 땅에 떨어뜨려 놓았다. 산에서 버려야 할 것은 땀과 상념뿐일 터인데, 그 산객은 선경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일까, 아니면 더위에 정신이 일시 혼미해졌던 걸까?
해발 600미터쯤에서 시야가 트이고 공기도 열기가 좀 빠졌다. 검봉 마루에 올라서고 바람이 제법 시원한 능선을 돌자 채운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천국의 계단처럼 앞에 버티고 서있다.
똬리를 틀고 앉아 혀를 날름대는 독사보다 더 고약한 뙤약볕이 내려쬔다. 그렇지만 기실 이 강렬한 햇빛은 저 아래 마을 논밭 곡식들의 알곡을 영글어 여물게 하니 농부들에겐 여간 고마울 수 없을 것이다.
검봉과 채운봉을 지나서 나오는 정상 600미터 전 삼거리는 바람골이다. 최신 에어컨 저리 가라다. 1미터 10미터 100미터 전진이 더디다. 온전히 거대한 한 개 바위인 신선봉은 두 군데 움푹 파인 몸에 연못처럼 물을 담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전망이 툭 트여 황장산 운달산 주흘산 월악산 등 부근 산군들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산이든 산객들이 넘쳐나는 요즘은 산짐승도 배려해야 하니, 정상까지 거리를 가늠할 수 있던 정상에서의 '야호' 함성도 기대할 수 없다. 정상으로 난 마지막 능선은 레드카펫을 대신해서 솔이 울창한 평평한 흙길이 힘겨운 산행의 노고를 치하하듯 맞아준다.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망이 없는 해발 964미터 정상에는 표지석과 벤치가 자리하고 있다.
몇몇 산객들이 앉아서 땀을 훔치며 숨을 고르고 있고 다른 산객들은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남기기에 바쁘다. 어떤 부부의 스마트폰을 건네받고서, 팔 한쪽씩을 머리 위로 올린 하트 포즈를 이끌어 내어 인증숏 한 컷을 선사했다. 34년 만에 이런 끔(깜) 찍한 모습을 연출해 본다니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없지 싶다.
올라올 적에 오른쪽 뺨에 닿던 바람이 내려가는 길에는 왼쪽 목덜미를 서늘케 해준다. 삼거리 바람골 쪽에서 환호가 간간이 들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이 저렇게 산객에게 위안을 주고 때론 감격케 하는구나. 허긴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처럼 하찮은 것일망정 어디엔가 요긴한 쓰임이 있기 마련이다.
삼거리 갈림길을 지나고 형봉과 제봉 등 몇몇 봉우리를 오르고 내린 후 하산 길은 급격히 고도를 낮춘다. 내려가는 능선 곳곳에 솟아 있는 기암들의 절경이 눈을 즐겁게 하지만 공기는 점점 무겁고 더워진다. 설악 소백을 비롯한 여러 산의 높은 봉우리가 신선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을 보면 신선들은 한눈에 산 아래를 굽어 볼 수 있고 선선한 바람도 있는 높은 곳을 좋아하나 보다.
상선암 마을로 내려섰다. 상선암 아래쪽 선암계곡에서는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물놀이가 한창이다. 버스가 기다리는 중선암 쪽으로 내려가서 화장실에서 주섬주섬 세수를 하고 땀을 씻으며 셔츠를 갈아입었다. 속속 산행 버스로 돌아오는 산객들은 온통 땀에 젖은 모습이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다.
우암이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또한 즐거움이 뒤따라야 한다'라는 뜻에서 이름했다는 도락산(道樂山).
도락산 자락 절벽 아래 선암계곡에 땀에 젖은 몸을 담그고 깨달음으로 가는 내 나름의 '길'을 생각해 보는 '즐거움'도 한 번 맛보고 싶었지만... 예정된 시간표를 내밀며 재촉하는 버스에 올라 귀로에 오를 수밖에. 20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