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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Feb 08. 2021

옥순봉과 구담봉

가은산과 대강 막걸리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신림을 지나고 제천의 경계를 넘고 단양으로 향한다. 멀리 흰 눈을 덮어쓴 금수산이 구름에 정상부를 숨긴 채 늠름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흐린 날씨 구름 눈 고도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서 당초 산행 목적지 금수산을 대신해서 구담봉과 옥순봉, 여의하면 가은산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제천터널 단양터널을 지나 남한강 위 단양대교를 넘었다. 단양 IC로 내려서면 단조천이 죽령천으로 안겨드는 대강면이다. 죽령 너머 풍기를 잇는 이곳은 중앙선이 지나는 교통 요충지다. 이 부근을 지날 때면 대강 막걸리는 단양과 풍기가 고향인 친구들의 단골 얘깃거리다. 마침 지나는 도로변에 양조장과 함께 매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차를 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벽면 한쪽에 "대강 양조장, 청와대 만찬주!"라는 표제 아래 故 노무현 대통령이 막걸리 사발로 건배하는 사진들로 빼곡한 액자가 걸려 있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H는 한 박스, 나는 어떤 맛일지 궁금증을 풀고자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노 대통령께서 좋아하셨나 보네요?"
"만찬주 사러 많이 댕겨갔지"
가게를 나서면서 묻는 말에 일흔이 훌쩍 넘어 뵈는 수수한 모습 주인 할머니의 나직한 한 마디 대답에 자부심이 묻어 있다.

대강 양조장의 역사는 1918년부터 시작되어 2003년 국내 최초로 검은콩 막걸리 특허와 2004년 청와대 납품으로 이어졌더란다. "누룩 원료로 쌀 대신에 밀을 고수하여 전통 막걸리의 농후한 맛과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는 4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조재구 씨의 인터뷰가 눈에 띈다. 옛 것은 배척하고 버려야 할 고리타분한 것이라 여기는 세태는 "해 아래 새것은 없나니"라는 성서 구절을 한 번쯤 곰곰이 곱씹어볼 일이다.


남조천을 따라 이어지던 단양로에서 남한강을 따라 난 월악로로 갈아탔다. 수몰 전 옛 단양을 지나고 단양천을 넘고 얼음이 풀리고 있는 강과 말목산 제비봉 등이 어우러진 수려한 산수화 속을 달리는 H의 쏘나타가 애틋한 '겨울연가'를 들려줄 듯하다.

건너편 강줄기를 따라 솟구친 암봉들이 능선을 이루고 있는 말목산은 거대한 수석을 눈앞에 가져다 놓은 듯 감탄을 자아낸다. 기묘한 모습만큼이나 산세도 험준하고 등로도 없어 종종 말목산에 들었던 산객이 불귀의 객이 되기도 한다는 H의 귀띔이다.

단양군수 퇴계와 애틋한 정을 나눈 두향을 추모하는 두향제가 매년 열린다는 장회나루가 발치에 내려다 보인다. 옥순봉, 구담봉, 금수산, 제비봉, 옥순대교, 만학청봉, 강선대 등을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다는 유람선에도 한 번 올라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장회나루를 스쳐지나 단양과 제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 계란재 공원에 차를 세웠다. 이곳에서 얕은 능선을 타고 오르다 보면 갈림길 오른편에 단양팔경의 제5경 구담봉 왼편에 제6경 옥순봉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먼저 600미터 거리 구담봉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파른 계단이 놓인 암봉 세넷을 오르내려야 짙푸른 남한강 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으로 마주하고 선 구담봉에 닿을 수 있다.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 무늬를 띠고 있다는 구담봉은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모양이라고도 한다. 우측 제비봉 아래 가장자리를 따라 얼음이 풀리고 있는 장회 나루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짙은 감청색 남한강 수면에 내려앉은 산 그림자가 한 폭의 수묵화다.

구담봉 쪽으로 능선을 치켜세운 말목산이 발아래 짙푸른 남한강을 좌우로 가르고 그 좌측 가은산은 새바위와 둥지봉 품고 솟아 있다. 퇴계가 타계하자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녀 두향, 짙푸른 저 강물처럼 그녀의 퇴계를 향한 사모의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발을 빠르게 내닫기가 아까운 절경 앞에 한발 한발 느릿느릿 걸음을 늦추며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옥순봉 쪽으로 향한다. 댐에 갇힌 청풍호는 산과 산줄기 사이로 깊이 파고들며 긴 꼬리를 감추고, 왼편 멀리 고개로 난 길은 하늘로 모습을 감춘 듯 사라진다.

옥순봉도 구담봉처럼 둥그스름한 바윗돌에 원만한 글씨체의 표지석이 산객을 맞이한다. 나란히 자리한 330m 286m의 작은 봉우리들이 단양팔경 중 각각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으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석 뒤쪽 남한강을 마주하고 선 절벽 위 너른 전망데크에 올라서니 옥순봉의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있을 듯싶다. 청풍호로 흘러드는 적곡천 건너편의 괴곡리와 청풍호 건너 상천리를 연결하는 옥순대교가 강과 어우러져 한 폭 그림을 펼쳐 보인다.


호수 건너편 둥지봉 가은산 금수산 능선이 짙은 색에서 차츰 옅은 색으로 흐려지며 차례로 첩첩 겹쳐 서있다. 청풍 군수에게 옥순봉을 단양군에 떠어 달라고 떼를 썼다는 단양군수 퇴계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겠다. 제천시에 속하는 옥순봉이 단양의 팔경 중 하나로 자리한 것은 '동방의 주자'로 칭송받는 퇴계의 억척 때문으로 보여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옥순봉은 제천 십경 중 하나라고도 하니  아름다운 것은 서로 나누면 더 아름답고 마음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옥순대교를 건너서 옥순봉 쉼터에 차를 세웠다. 안내판 지도를 보니 가은산 원점회귀 산행은 7km 남짓 코스다. 구담 옥순 두 곳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흡족하여 가은산 산행에서는 빠지고 싶었지만 두 친구의 의지는 단호하다. 쉼터 안내문이 제천 10경 중 제8경인 옥순봉이란 이름은 퇴계가 "단애를 이룬 석벽이 비 온 뒤 솟아나는 옥빛의 대나무 순과 같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들머리로 올라서서 고도를 높여 가자 청풍호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위 구담봉 옥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엇이건 전체를 제대로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조금 떨어져서 봐야 하는 것처럼 옥순봉도 이처럼 멀찍이서 보아야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 솟은 가늠산과 가은산을 잇는 주 능선을 왼편에 끼고 평이하고 완만한 산길을 오르고 내린다. 청풍호 쪽으로 길게 내리 뻗은 능선 끝자락에 새가 앉아 있는 모양의 새바위를 발치까지 다가가서 바라보았다. 그 좌측에 홀로 떨어져 우뚝 솟은 둥지봉 쪽에 꼬리를 둔 새바위가 금세라도 먹이를 찾아 날아오를 듯하다.


앞으로 수년간 함께 산행을 할 수 없어 이번 산행이 고별 산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친 몸과 느슨해진 의지를 다독이며 멀찍이 앞서가는 두 친구를 따라잡게 채근한다. 향도를 맡은 H가 둥지봉을 건너뛰고 곧바로 정상 쪽으로 코스를 고쳐 잡으니 발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가은산 정상으로 오르는데 구름 속에 숨어있던 태양이 고개를 내민다. 건너편 수직 절벽으로 두르고 벼랑 위 독수리 둥지처럼 솟아 있는 둥지봉 모습에 일행 모두 그쪽 코스를 외면하길 잘했다며 안도했다.

전망이 트인 가은산 정상 목전 너럭바위에 앉아 M이 배낭에서 꺼낸 한라봉을 까서 입에 넣는다. 눈 아래 동양화처럼 펼쳐진 둥지봉과 가늠산 사이 깊은 계곡 저 멀리 옥순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별다른 조망이 없는 해발 575미터 가은산 정상 표지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챙기고 서둘러 2km여 거리의 가늠산 쪽 긴 능선으로 접어들었다.

곰바위 기와집 바위 등 중간중간 나타나는 큰 바위들이 산행 막바지에 밀려드는 피로와 무료함을 달래준다. 바다 깊이 잠수했다가 한참만에 수면 위로 솟구치며 내뱉는 해녀의 숨비 소리처럼 길게 휘파람를 한 번 내뱉었다.

가늠산 목전에서 계곡 쪽으로 난 등로로 방향을 바꾸었다. 빠르게 고도를 낮추어 가자 층층 쌓인 바위 암벽 아래 굴러 내린 바위 사이로 두텁게 낙엽이 쌓인 계곡이 나왔다. 코끼리들이 피안의 세계로 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는 영화 <타잔> 속의 계곡처럼 또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골짜기처럼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계곡이 끝나고 올라왔던 길로 접어들며 얕은 능선을 휘도니 눈에 익은 옥순대교와 옥순봉이 지친 산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다리 아래 수면 위로 내려앉아 반짝이는 햇빛이 퇴계를 향한 두향의 마음처럼 남한강이 수줍게 일렁이고 있다고 속삭인다. 단양역에서 H와 작별하고 M과 얼마 전 개통된 KTX이음 고속철에 몸을 실었다.

귀가길이 한참인데 벌써 배낭 속의 대강 막걸리 맛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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